연재 제 6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굴지의 제약회사에서 톱 세일즈맨이 되다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굴지의 제약회사에서 톱 세일즈맨이 되다
열심히 1년을 재수하여 대구에 있는 대구고등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후일 알았지만 깡촌의 시골중학교에서의 학업실력과 대구의 일류 중학교 같은 학년과의 학업실력은 엄청난 차이가 났다.
대구에 유학하면서 타 고교의 학생과 사귀게 되었는데 고교 2학년 때 하루는 그 친구가 영어 시험지를 좀 봐 달라고 했다. 그 친구의 학교는 그 당시 등록금만 내면 합격하는 만년 미달의 3류 고등학교였는데 영어시험지가 적어도 필자의 눈에는 중학교 3학년 정도의 문제였으니, 창피한 소리이지만 옛날의 칠곡의 깡촌 중학교에서 ‘잘해 봤자’였던 실력이었던 것이다.
1982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몇 군데 응시한 대기업 입사시험에서도 수차례 고배를 마셨다. 우여곡절 끝에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에 면접을 보게 됐는데 늘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기에 거의 포기한 심정에서 할 말이라도 좀 하자고 마음을 비웠다.
최종 면접에서 회장 내외분과 사장이 임석한 가운데 회장님이 ‘술을 잘 하느냐’ 고 물어 왔다. “막걸리는 배불러서, 소주는 취해서, 양주는 돈이 없어 못 마십니다.” 라고 했더니 껄껄 웃으셨는데 결과는 합격이었다.
필자는 우선 앞으로의 계획으로
1. 7년 안에 ‘톱 세일즈맨’이 된 뒤 퇴사
2. 짬나는 시간을 이용해 석사학위 취득
3. 영어·일어 학습 뒤 해외영업 진출 등 3가지 목표를 세웠다.
1. 7년 안에 ‘톱 세일즈맨’이 된 뒤 퇴사
2. 짬나는 시간을 이용해 석사학위 취득
3. 영어·일어 학습 뒤 해외영업 진출 등 3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 필자는 입사 지원 시 마케팅부서로 내근직을 지원했다. 2년여를 마케팅 부서에서 PM직을 수행하다가 생각을 바꿔 영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영업사원으로서 상기의 목표 달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무엇보다 최고의 세일즈맨이 되겠다는 현실적 목표가 필자에게 더 많은 추진력을 보태 주었다.
예를 들어 세일즈를 하면서 영업회의 시 월간목표를 발표할 때 남들은 대개 200이라고 할 때 필자는 보통 800이라 말하여 회의실의 사람들이 수군거렸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다음 달 결산회의 때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져 있었다.
보통 다른 영업사원들이 200의 목표를 세워놓고 180을 하여 90%의 실적달성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800의 목표를 세워 70%인 560의 실적을 올렸으니 소위 달성률은 낮았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3배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코웃음 치던 영업부에서도 이런 실적이 몇 번 계속되자 모두들 필자의 영업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필자는 맨 먼저 시내의 약국을 방문하여 시장조사를 철저히 하여 모든 실제적 수치를 가지고 영업에 임하였다.
실적도 덩달아 올랐다. 5년 만에 회장보다도 표면적 월급은 더 많이 받았다. 세금도 더 많이 내는 톱 세일즈맨으로 사보에 2년 연속으로 게재되기도 했다.
한 가지 기억나는 일이 있다. PM시절, 우리 회사에서 필자가 만든 소화제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자연 필자의 업무도 많아졌다. 더 많은 실적을 위해 지방출장이 잦았는데 그 당시 새마을 열차를 타고 가곤 했다.
서울을 좀 벗어난 소도시의 철로변 전봇대에 소화제 광고가 몇 십km를 가더라도 연달아 붙어있어 아주 흐뭇했던 기억이 있다. 소화효능이 좋아 이미 국민소화제가 되어 있었던 바로 그 대웅제약의 베아제이다.
연재 제7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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