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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5.11 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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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문화신문] 일반적으로 도식이란 다이어그램과 같이 복수 항목의 관계나 사물의 커다란 윤곽을 나타내는 소묘를 말하지만, 철학적·미학적 개념으로서의 도식은 대상의 지각과 산출에 의한 정신의 규제적인 원리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어의 경우에 전자를 le schéma(도식), 후자를 le schéme로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개념은 원래 전자를 후자에 적용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복잡한 사상(事象)에 대해서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복수 항목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다이어그램을 쓰는 것은 그 현상을 분석하고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며, 그러한 전체상(全體像)을 얻어서 처음으로 그 현상을 하나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라첼리에(Jean Lachelier, 1639-99)는 도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도표를 그릴 때 상상력 안에서 순수한 경향의 상태에서 찾아지는 규칙’
미학에서 이 개념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은 레이먼드 바이엘(Raymond Bayer)이 효시다. 그는 ‘도식현상(schmatisme)’으로서 문체ㆍ공통 토포스(topos)ㆍ카논(canon)ㆍ유형 등을 채용하고, 그 특징을 구체적 보편에 의해 독특한 고차원적 감수성이라는 점을 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예술현상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의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체험은 항상 다른 것으로 통하는 보편적 특질을 전개해 간다는 것이다.
 
 도식은 구체적인 개별적 경험을 보편적인 개념으로 다른 개별적인 표현에 매개하는 것이다. 래이먼드 바이엘은 결과로 얻을 수 있었던 표현을 도식적인 것만을 채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도식이 움직이고 있는 장소는 넓다. 인간의 창조는 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소여(所與)로 변형하는 것이다. 도식이란 단적으로 인간적인 창조적 상상력의 형이 아니면 안 된다.
 
개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보편성이 있는 표현에 통로를 개척하는 예술가의 감수성은 독특한 것이며 보통 지각과 무연(無緣)한 것이 아니다. 그 메커니즘을 생각하는 동시에 칸트를 참조해야 한다. 칸트야말로 도식의 구조를 처음으로 지적하여 이론화한 인물이다. 그는 선험적 감성론이란 감각적 지각이 어떻게 성립하는 것인지를 해명하려고 했다.
 
 이 문제는 고전적인 것으로써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질적인 두 개의 실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다시 말해, 인식하는 것은 정신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물적 대상을 지각하는 경우, 컵이 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대상을 어떤 의미에서 정신화하지 않으면 자기와 동화될 수 없다. 이 동화에는 정신의 능동적 작용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우선, 물적 대상에 한하지 않고 인식인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신이 능동적인 형식으로서의 카테고리(순수오성개념)라는 것을 내세웠다. 그것은 일종의 규제적인 틀이며 대상이 제어될 때 처음으로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양ㆍ질ㆍ관계ㆍ양상의 네 가지에 대해서 각각 세 개의 규정성이 상정(想定)되고 있다. 그러나 카테고리는 순수개념오성이며 감각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 대상을 알게 되는 경우에 직접 이것을 감각소여에 적용할 수는 없다.
 
거기에서 감각소여와 카테고리를 이어 나가는 제3자, 다시 말해, 지성적인 것과 동시에 감각적인 것으로서 칸트는 선험적도식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시간의 형식 안에서 이 도식의 활동을 인정하고, 네 개의 카테고리의 각각에 대해서 도식을 규정했다(시간의 계열, 내용, 순서, 총괄). 따라서 도식이란 정신이 물적 대상에 제의하는 이른바 정신화하기 위한 능동적 원리이다.
 

문제는 지각론이 아니라 도식의 개념이다. 칸트에 의하면 순수한 감각적 개념의 근저에 있는 것은 대상의 상(Bild)이 아니라 도식이다. 예를 들면, 삼각형의 경우 각도나 변을 비교하면 수없이 많은 것이 있어서 서로 다른 상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 대한 도식은 개념과 상의 중간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 즉, 단순한 개념(3변을 가지는 다각형)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려 내고 있지만 특정한 각도나 변의 비교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삼각형에 해당된다.
 
이 의미에서 도식은 감각적 대상과 개념을 매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식없이는 눈앞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 보는 네발 동물을 아마 동물로서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이미 동물의 도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개(犬)라는 같은 종류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은 그 수준에서의 도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이것을 도식이라고 하지 않고 이미지라고 부를 때가 많다. 그러나 감각적인 상이 아니라 상당히 개념적인 표상으로서의 도식이다.
 

칸트가 문제로 하는 것은 이러한 개별적인 도식이 아니라 선험적 도식이다. 그것은 각각의 도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그것과 달리 예술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칸트의 도식보다도 개별적인 수준에 있다. 그래도 칸트의 구상은 예술의 경우에서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 대상을 지각하여 이해하는 것이 결코 단순한 수동적인 프로세스(process)에서가 아니라 정신의 능동적인 관여가 전제되어 도식이 거기에서 대상에 적용되는 정신의 규정적인 계기라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지각의 능동적 형식으로서의 도식에 대해 잘 알려진 것으로 곰브리치의 설이다. 그가 말하는 도식은 심리학으로부터 차입된 심리구조(mental set)의 형태라고 생각된다. 이미 파장을 맞는 수신기를 가져서 그들 미술가의 작품에 임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상술(上述)한 바와 같이 기대의 수준을 심리구조라고 칭하고 있다.
 
 ‘심리적 구조란 정확하게 말하면 투사개시의 준비가 갖추어진 상태, 혹은 지각의 주변에 언제나 명멸하고 있는 환상의 색이나 환상 이미지의 촉수를 밀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즉, 지각의 선별작용을 하는 독자적인 태세다. 개인적인 것도, 또한 시대의 규정에 의한 것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작품의 경향으로서의 양식과 같다.
 
곰브리치의 사상에는 독창적인 것은 없다. 도식의 사고방식을 미술의 장면에 적용한 것에 새로움은 있어도 지각이론이나 도식개념에 혁신을 초래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강점은 무엇 보다도 도식에 관한 풍부한 실례를 채용해 보도록 한다.
 
 
 

고래사진.jpg


 고래 판화, 16세기 말 ~17세기 초 
 
 

도식적 꽃.jpg


 MILLEFLEURS: 도식적인 꽃과 동물, 15세기,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두에 그려진 고래(鯨) 판화 2점에는 진짜 고래에는 없는 귀가 그려져 있다. 그것은 화가가 귀를 착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16세기 중간쯤 독일의 신문에 실린 로마의 조망도 성·탄제로 성에는 급경사 지붕의 목조가옥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로마가 성새도시(城塞都市)라고 생각한 화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독일의 성새도시를 모델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는 상당히 황당한 것이지만 언뜻 보면 완전히 사실적이라고 보이는 그림조차 왜곡을 보게 된다.
 
17세기의 화가 마테우스·메리안이 그린 파리의 노틀담 측면도는 언뜻 보면 충실하게 재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큰 반원형 창문을 가진 좌우 대칭의 높은 건물’이라는 사원관(寺院觀)에 따라 현실의 모습이 개변(改變)된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오른쪽에 치우쳐 있는 대문 좌우 쪽에 잇대어 지은 행랑을 중앙에 두고 있다.
 
이것들의 예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미술이 개념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회화는 결코 자연적 기호가 아니다. 순수한 사실묘사라고 말하기 쉽지만 실제로 불가능과도 같다. 그것을 위해 타인의 지적을 받아 수정을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나아가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곤란해도 초등도식(initial schema)를 선택하고, 이것을 과정으로 묘사하는데 순응하는 수 밖에 없다.
 
그 미술가는 시각적 인상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이라든가 개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고래를 그린 화가는 반드시 귀가 있는 동물의 머리를 표상하는 도식을 가지고 있고 로마를 그린 독일 화가도 성새도시의 도식에 있어서 성에는 급경사 지붕이 딸려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또한 노틀담 화가 메리안도 대성당은 좌우 대칭이 아니면 안되었다. 어떤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일반적인 이미지, 즉 도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화가는 그 도식을 출발점으로 만드는 것과 맞추는 것(making and matching)에 의해 작업을 진행시켜 간다. 초등도식(初等圖式)은 관찰하는 것도 불가결하다. 그것이 특히 작품해석에서 채용할 수 있었던 것이 mental set·swap allocation table인 것은 위에서 본대로다.
 
기대를 갖지 않고 관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며 과학에 있어서 조차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칼·포퍼(Sir Karl Raimund Poppe)가 역설한 것과 같이 모든 관찰은 자연에 대한 질문의 결과이며 시도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칸트가 ‘요소적·원리적인 수준으로 함께 이야기한 것, 지각에는 정신이 능동적인 관여가 전제되어 있는 것, 그리고 이른바 정신에 있는 것 밖에 볼 수 없다,라는 것의 옳음이 보다 유의미한 구체적인 활동에서 확인됐다고 말할 수 있다.
 
 
 

스위스사진.jpg


 스위스의 지도 제작자인 마테우스 메리안이 1615년에 판화로 만든 파리 지도(메리안 지도).
             퐁 뇌프 다리. 다리 뒤쪽 시테섬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곰브리치에 있어서는 지각 혹은 해석의 장면에서 ‘mental set’가 창작의 장면에서는 도식이 각각 별개로 논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도식은 창작의 장면에서 작용하는 규제적인 원리이지만 고래(whale), 성새도시, 카테드랄(cathedral, 대성당)은 모두 표상의 왜곡된 예이며, 창조성이 생각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들의 도식이 기능하는 실태는 과거 경험의 집적(集積)에 의해 형성된 기대 혹은 예측에 의한 지각의 규제라는 성격이 강하다. 그것에 대해 참으로 창조론으로 기능하는 도식을 생각한 것으로서는 베르그송의 ‘역동도식(Le schéma dynamique)’이 있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말하는 역동도식이 무엇인가 말하자면 그 자신이 거론하고 있는 예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상기하려고 할 때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목구멍에서 나오려고 하는 그 느낌에 주목하는 것이 좋다. 이 목구멍에서 나오려고 하는 느낌이 그 이름의 역동도식과 같은 것이다. 베르그송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기나, 설교사가 그 텍스트의 전체를 암기할 때의 메커니즘, 그위에 창조적인 예술가의 발상 등을 ‘지적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기억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상기하는데 노력없이 기계론적인 암기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말이 나오는 것 같은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상기에 손이 간 것이 있다. 역시 긴 문장을 기억할 경우를 예로 든다면 기억술의 서적이 가르치고 있는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다. 문장을 조심스럽게 읽고 그 다음 내적인 조직을 생각하고, 단락 또는 부분으로 나눈다. 거기에서 전체의 도식적인 겨냥을 할 수 있고, 그로부터 이 도식의 내부에 가장 두드러진 표현을 끼워 넣는다.
 
그리고 상기할 때는 반대로 이 추상적인 골조에 구체적인 말을 복원해 가는 셈이어서 거기에는 이미 어느 정도 창조적인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이 도식적인 도(圖)이며, 그 기억의 요체는 모든 관념, 모든 이미지, 모든 단어를 단순히 한 점에 집약하게 한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 응축된 많은 이미지에 전개할 수 있는 단순한 표상을 가리켜 베르그송은 역동도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개념에 관해서 두 가지가 문제 된다. 우선 이 명명에서 베르그송은 ‘그리스어를 수용해’거절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어의 의미를 담아’라는 의미일 것이다. schéma도 dynamique도 함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단어이며 이 단서는 어느 쪽에도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모양을 의미하는 schéma는 특수한 의미로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한정하고 있는 dynamique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역동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러면 그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문맥에 있어서 베르그송이 ‘기타의 일절이 잔돈(monnaie)에 지나지 않는 기본화폐(piece)라고 하는 비유를 채용하면서 그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어의 dynamis에는 화폐의 가치의 의미가 있다. 이 의미를 거론하면 schéma dynamique란 고가치의 도식이라고 말하게 된다. 또 하나는 철학용어로서 친숙한 세태라는 의미다.
 
그 가운데에서 단어의 기본적인 어의로서의 계기는 당연히 은폐된 상태로부터 확실히 현현(顯現)해 가는 현실화의 경향에 있고, 이것도 또한 베르그송의 역동도식의 성격으로 타당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현실화하려고 하는 도식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은 어석(語釋)에서는 대립하지만 사상적으로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역동도식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그것 자체가 현실화된 다이어그램이 아니라 세태적인 규제적 원리라면 왜, schéme가 아니고 schéma일까? 이것이 제2의 문제이다. 사실은 베르그송에서는 유사한 개념이 또 하나 있다. 즉, 운동적 도식(le schéme moteur)이다. 이것도 또한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며 말을 들어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운동적 도식에 의한 것이다.
 
청각적 인상은 단순한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말의 움직임을, 즉 ‘초동적(初動的)인 근육감각(sensations musculaires naissantes)으로서의 듣는 말의 운동적 도식’을 듣는 사람 안에서 산출한다. 다시 말해, 운동적 도식도 현실화를 촉진시키는 원리이며, 역동적 도식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방향이 schéma에서 다른 방향으로 schéme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단지 각각 붙일 수 있었던 형용사의 성질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개념상의 구별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베르그송이 이 두 가지 도식을 어떻게 표상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에 유래하는 것이 틀림없다. 역동적도식 쪽은 전체를 응축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전체가 잠재적으로 그 곳에 있으며 그 의미에서 전체상(다이어그램)을 인정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운동적 도식 쪽은 시간적으로 전개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상이 그 곳에 있으면 빛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것을 현실화해 가는 힘이라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예술창조를 생각하면 이 두 가지 도식을 공간적ㆍ시간적이라는 존재 위상의 차이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근본적인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베르그송은 역동도식을 발명이나 예술창조에서 인정하고 있다. ‘소설을 만드는 작가, 극중인물이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극작가, 교향곡을 작곡하는 작곡가, 시인은 처음에는 정신적으로 단순하게 추상적인, 즉 비물체적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음악가나 시인에 있어서는 소리나 이미지에 전개해야 할 새로운 인상(印象)이다.
 
 또한 소설가나 극작가에 있어서는 사건으로 전개해야 할 명제, 살아 있는 인물에게라도 구체화해야 할 개인적 혹은 사회적인 감정이다. 그들은 전체를 나타내는 도식에 조작을 가하고 판명한 제 요소의 이미지에 도달했을 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역동도식이란 보통 작품의 이미지라고 불리는 맹아(萌芽)이다. 그 맹아는 스스로 전개하려는 힘을 내포하고 있는 역동성이 예술가에 대해 현실화를 촉구한다. 예술가에 있어서 이 맹아는 마치 상기할 수 없는 이름과 같이 막연하게 취할 수 없는 것이면서 명확한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도식의 역동성으로 움직임으로 해서 시행착오(making and matching)를 되풀이해서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 때, 이름을 상기하는 것과 같은 경우와 다른 한 점이 있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상기하는 경우, 역동도식의 내실은 그 이름을 상기한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예술창조의 경우, 전개의 프로세스는 엄밀한 의미로 창조이며 단순한 전개나 현실화가 아니다. 다시 말해, 작품의 맹아는 완성된 작품에 고정할 수 없다. 창조의 과정은 당초 역동도식 바로 그것의 변경을 수반해 간다고 생각된다.
 
한편 베르그송의 개념을 예술철학에 있어서 앙리·구히에(Henri Gouhier, 1989-1994)가 구체적인 플롯(plot, 구성)에 전개해야 할 극적 행동(action)을, 또한 에티엔 수리오(Etienne Souriau)는 극적 상황을 역동도식으로 논한 예가 있다.
 
베르그송의 역동도식은 그 창조성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Kant)나 곰브리치와 같은 지각의 장면에도 적용되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수용의 기능적 도식이 창조의 원리에 전환되어 가는 사실을 설명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배르그송은 지적노력(知的努力)으로서의 지식해작용(知識解作用, intellection)을 논한다. 글을 읽거나 말을 듣거나 해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수학의 증명을 풀어가는 경우와 같으며, 단지 받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떤 계산을 풀어 갈 때, 스스로 그것을 하고 있지 않으면, 풀어 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문제를 자신이 풀고 있지 않으면 그 문제의 해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읽을 때나 들을 때도 일부분 밖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나머지는 기억에 의해 보완하게 된다. 외국어 단어를 듣고 알지 못하는 것은 이 보완 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각은 기억만으로 점점 좋아질 수 없고, 명확한 형을 취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해작용(解作用)도 또한 잠세적(潛勢的)인 도식에서 지각적 이미지로 옮겨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결론한다. 이러한 고찰을 근거로 최후에 베르그송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조의 노력이 도식으로부터 구체적 이미지로 전개하는 것을 논하고, 수용과 창조를 포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극을 받을 때에 이미 능동적인 관여가 시작되고 그 발전 안에서 창조가 행하여지는 셈이다.
 
그 사상은 크로체(Benedetto Croce)의 직관=표현설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보다 구체적인 설명의 가능성을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생(生)의 수동적 측면이 능동적 측면으로 전개해 가는 다이너미즘(dynamism)을 상당 정도까지 해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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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인 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의 '도식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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