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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4.12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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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인 컬럼 (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

하이데거(Heidegger)는 ‘근대의 학문은 특정한 대상 영역에 기초를 두고 개별적 학문으로 분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M·Heidegger, a,a, O.〉 이것은 일체 근본으로서의 인간(근대적 주관이 물리학에서는 질점(質點)의 운동, 화학에서는 원자간의 상호작용 등)에 따라 개별적 학문영역을 투기(投企)하고, 그 학문영역에 있어서 각각의 개별적 학문이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 경우에 물질이 세분화되는 만큼 학문의 인식은 전문화하고 정밀하게 된다. 따라서 정밀한 인식을 추구하는 근대의 학문연구는 점차 자율적인 개별학문으로 분화하게 된다.
 
예술도 또한 근대에서는 칸트가 예술영역을 인간의 마음의 활동(판단력 및 쾌·불쾌의 감정)에 대응시켜 규정한 특정 대상 영역(미적 영역)을 기초로 하는 정신적 당위(當爲)로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대상 영역에서 예술의 자율성이 보증되어 그 영역이 시각적·청각적·촉각적 등의 영역으로 개별화되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투시도법은 외적 자연에 대한 인간의 시각적 관계를 화면에 묘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합리적으로 일치된 화면구성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외적 자연 대상의 시각적 표현활동으로서의 회화적 자율성 원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근대예술의 역사발전 과정에 있어서 이 투시도법이 회화에 자율성을 보증함으로써 도리어 존립성을 잃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자율성을 획득한 근대회화가 회화로서의 자율성을 추구할 때 현실적 자연공간 묘사의 수학적·합리적인 구성원리로서 투시도법보다 회화의 한층 본질적인 요소로서의 화면구성이 회화표현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동시에 투시도법은 필연적으로 후퇴하게 되어 자율적인 추상회화가 외적 자연묘사를 회피하게 되어 완전히 그 의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시도법을 본질적인 구성원리로 하는 풍경화는 그것 자체 풍경화의 종언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 이 사태를 명료하게 나타내는 사례에 대해서 회화의 본질을 추구한 현대회화의 선구자 세잔(Paul Cezanne)과 모네(Claude Monet)의 후기 작품에 대해서 각각 하나씩 증언을 이끌어 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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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련연못(Water Lily Pond), 100.4*201, 1919, 끌로드 모네(Claude Monet) 
 
 (1) 세잔의 풍경화는 일반적으로 현실풍경으로서는 공간이 좁고 작으며, 앞쪽 경치를 축소하여 안쪽으로 향하는 선의 수도(收斂度)의 소멸 등에 의해 과학적 투시도법의 공간구성 상태가 약하다.
 
약해지게 만들고 있는 한층 보편적·기초적인 요인은 색반(色斑), 터치에 있어서 대조의 정도가 평온해진 화상의 소구조(小構造) 형성 방법에 있어서 소구조에 의한 투시도법의 상태가 약해지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폐기되어 추상회화로 한 걸음 다가선다.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회화에 있어서 화면구성에 관해 이 소구조만큼 강렬하게 과학적 투시도법을 놀라게 한 것은 없다.
 
(2) 오랜 유럽의 클로드·로랭(Claude Lorranin)의 장대한 풍경화와 모네나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후기 작품 사이에는 알려지지 않은 심연이 입을 열게 한다.
 
예를 들면 모네의 1884년의 풍경화 《레몬 나무와 들판》은 색반의 연속체를 위해서 이 색반은 사물과 거의 같은 작품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래도 아직 눈과 화상(畵像)과의 거리가 지평선의 좌표에 의해 보증되고 있어서 여전히 풍경화라고 부를 수 있다.
수련(1918-25년)》에서는 이미 공간이 견고한 골조를 보증하고 있어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조자의 좌표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해서 자연은 원시적인 자연력이 상호 작용하는 모든 부분(물·빛·식물·천공)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영역이 된다.
 관조자는 자연을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조형적 배치의 일부가 된다. 이것에 의해 이전 풍경화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바꾸어 지고 있다.
 
여기서 풍경화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고찰에 의하면 자연공간의 투시도법적 형성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관조자는 ‘자연과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있다’고 할 때 투시도법적인 풍경의 형상은 이미 소멸되고 있다.
 
그러나 관조자가 자연 안에 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떤 자연일까? 그것을 ‘능력 생산적 자연’이라고 부르고 현대에 있어서의 자연의 화상(畵像)을 ‘능력 생산적 자연의 등가물’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주관에 의한 과학기술적ㆍ산업사회적 당위가 우리들의 생존환경에 초래한 자연환경의 오염과 파괴에 직면할 때 예술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하여 그러한 소박한 견해에 만족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물론 인간은 능력 생산적 자연의 일부이지만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그 자연을 내부에서 침해하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의 예술과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할 경우에 이 사태를 무시할 수는 없다.
 
단지 자연경관의 보전과 도시환경의 디자인에 예술과 자연과의 적정한 관계만으로는 근대적 주관의 합리적인 논리적 대상의 인식이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단지 능력 생산적 자연의 등가물로서 자연의 생명이나 에너지를 직관하게 할뿐만 아니라 현대에 있어서의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바로 그것을 감성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어떤 예술작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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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흘러내리는 아스팔트(Asphalt_Rundown),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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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차드 롱(Richard Long), 걷는것에 의해 만들어진 한개의 선(A Line Made by Working), 1967 
 

인간과 자연과의 부정적인 관계와 긍정적인 관계를 각각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대지미술로 저명한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1938-1973)의 《흘러내리는아스콘》와 리차드 롱(Richard Long, 1945-)의 《걷는 것에 의해 만들어진 한 개의 선》을 예로 들 수 있다.

전자는 도회의 한구석에 방치된 자갈이나 진흙의 퇴적물 위로부터 덤프트럭에 적재된 아스콘(asphalt concrete)을 흘려 떨어뜨리는 작품이다.
 
그 검은 점착성 물질은 부란(腐爛)한 비탈진 사면에 쏟아 부어 천천히 흘러내리며 침식되어가는 작품이다. 마치 엔트로피(entropy) 증대의 양상을 보이듯이 점차로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정지하게 된다.
 
산업용재로서의 아스팔트는 석유정제의 잔재로 입수되지만 천연의 지층에서도 찾아내 진다. 스미슨 자신은 작품을 통해서 산업자원의 낭비나 생태계의 보호 등에 대하여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현대 아스팔트의 하이웨이가 엔트로피의 증대를 향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함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R. Hobbs, Roert Smithson ; sculpture,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81)
 
후자는 ‘들판을 사람들이 오가는 동안에 평평한 풀밭이 햇볕을 받아 하나의 선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그것은 대지와 풀과 햇볕과 인간으로부터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그 이외의 재료는 필요 없고 대지를 침해할 일도 없다. 그러나 다른 시간, 다른 기상 조건, 다른 정신상태에서 걸으면 그때마다 대지 위에 다른 풍경을 연출하게 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고정된 객체로서 세계의 부가물이 아니다. 걷고 있는 동안 만들어지고 있는 그 작품도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을 가지고 있지만 영원불변한 형은 아니다. ‘보행자의 발자국은 대지의 표면을 가로질러 가지만, 대지가 그 보행을 받아들이며 형체를 옮겨 가고 있는 것이다. 대지는 예술작품의 길동무가 되고 예술작품이 세계를 향수할 때에는 대지도 또한 예술작품과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R. Hobbs, Robert Smythson; New York; Cornell Unoversity Press, 1954.)

자연 환경. 그것은 단순한 능력 생산적이며 단순한 소산적 자연도 아니고 대상화된 풍경으로서의 자연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다른 생물과 함께 그 안에서 출생하여 거기에 의존하며 그 안에 살고, 그 안에서 죽어 가는 곳, 인간이 그것을 풍요하게 하거나 황폐하게 하면서 어떠한 형태로 그것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남겨 가는 곳이다.
 
 이 환경이 인간에 의해 오염되어 파괴된 상태로, 혹은 인간과의 친화적 상태로서 스스로 그 일부가 되어서 눈으로 보이도록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스미슨이나 롱에 의해 실천하고 있는 환경예술이다. 이러한 환경예술을 종언하고 있는 근대풍경화를 현대예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를 개시하는 현대예술을생기하면서 예술의 본질을 사고해야 할 미학도 환경미학으로서 기술과 같이 단순한 경관 보전이나 도시환경 디자인의 미학이 아닌 근대과학기술의 지배 하에 있는 현대환경에 있어서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근원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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