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19(화)

연재 제4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큰 바위 얼굴을 보며 큰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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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2.03.26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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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출범식 축사 (김종인)123.jpg

 

[글로벌문화신문] 큰 바위 얼굴을 보며 큰 꿈을 꾸다
 
부모님은 학하리로 이사하시면서 할아버지로부터 달랑 5마지기의 땅뙈기를 받아왔으니 소출이 갑자기 줄어들게 되어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재산은 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가을 수확 철이 지나고 나면 과거와 달리 일거리가 거의 없었던 관계로 같은 마을에 사시는 분들과 동네 사랑방에 모여앉아 노름을 하게 되었고 그 빈도가 잦아질수록 그나마 애써 농사지어서 모은 재산이 하나 둘씩 빠져 나가게 되었다. 결국 일 년 농사를 온통 말아먹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런 세월이 흐르면서 모아둔 돈도 바닥이 나고 생활은 겨우 끼니만 거르지 않는 정도였으니 자식들 교육은 당연히 등한시될 수밖에 없었다. 자식은 부모 곁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효도나 잘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특이한 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은 대부분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아 초등학교만 나오는 것이 전부이고 다만 장남인 큰형님만 겨우 중학교를 나올 뿐이었다. 큰아버지의 자식들은 대부분 대학을 나와 윤택한 사회생활을 하는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이러한 가운데 필자도 초등학교를 입학하게 되면서 어린 마음에도 가난의 서러움이 서서히 느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도 저 멀리 낙동강 너머로 보이는 금오산의 능선을 바라보면 사람 얼굴의 라인이 확연히 드러나는데 이마와 코, 턱의 윤곽이 뚜렷했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항상 필자를 지켜보면서 인자한 웃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편안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박 이사장사진1234.jpg

 
어릴 때 읽은 미국작가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소설 속 큰 바위 얼굴에 대한 희망과 동경심으로 금오산의 얼굴라인이 마치 큰 바위 얼굴처럼 어린 가슴 속에 각인되었다. 그 후 큰 바위 얼굴의 정기를 받아 큰 인물들이 나온다는 전설대로 주위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이 나타나고 있음에 그나마 위안을 받으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초등학교 시절을 올곧게 보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집 논은 장마가 지면 홍수로 인해 낙동강 물이 범람해서 일 년 농사가 결딴이 나곤 했다. 그럴 때면 제대로 쌀밥 한번 못 먹어보는 건 다반사고 춘궁기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겪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늘 호박범벅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아 어머니에게 ‘우리도 밥 좀 먹을 수 없느냐’ 고 많이 보챘던 기억도 있다.
 
 우리 가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필자가 윤달이 든 3월에 태어나 생일이 여러 해 만에 한 번씩 돌아왔기에 더더욱 생일상의 쌀밥 근처에는 가보질 못했다.
 
중학교에 진학해야 할 때가 다가왔으나 집안형편에 갈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외삼촌께서 손위 처남인 아버지에게 마지막 아들인 데다가 공부도 잘한다고 하니 중학교를 보내주라고 하셔서 아버지는 시골에서 보내겠다고 약속을 하신다.
 
중학교를 다니면서 혼자서 집 뒤편에 있는 천생산을 자주 오르곤 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과 싸워서 연전연승을 했던 곽제우 홍의장군이 진을 쳤던 산성이 있는 곳이다.
 
계곡이 제법 깊고 물도 많아 혼자서 조용한 사건을 보내면서 홍의장군의 애국심을 가슴에 새기기도 했다. 이때 역사 속에서 배운 애국이라는 개념이 지금의 출산장려운동을 하는 데 큰 동기부여가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아울러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으나 또 고등학교를 갈 수가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필자가 중학교를 입학할 때는 일류 인문계 고등학교를 거쳐서 서울의 소위 일류 대학교로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실제 필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 중의 하나는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이고 또 하나는 삼류 인문고 장학생으로 가는 것이었다. 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전선으로 바로 가는 것도 탐탁치 않았지만 삼류 인문계 고등학교 장학생으로 가는 것도 자칫 인생의 출발점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정하기 쉽지 않았다.
 
오래 고민하다가 차라리 실업계를 가서 빨리 취직을 하고 돈을 벌어서 대학을 가는 것으로 진로를 정하였다.
 
연재 제5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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