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제3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한국출산장려협회, 다산코리아 행복코리아를 꿈꾸며
[글로벌문화신문] 증조할아버지는 유생으로 꽤나 유명했던지 그 당시 나름 양반입네 하는 사람들도 마을 앞길을 지나갈 때면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할 정도였으니 뼈대 있는 선비인 것 같다.
2남 3녀의 장남이셨던 큰할아버지께서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평양의학전문학교(현,평양의과대학)를 나와서 가까운 선산군 해평면에서 병원을 개원하여 의술을 펼치셨다.
그러나 필자의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장남만 중요시하여 교육을 시키는 시절이었기에 차남으로서 학교문턱에도 못 가보셨다고 한다. 37마지기나 되는 많은 농토를 두 사람의 머슴과 함께 농사를 지었으니 그 고됨과 부지런해야 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꼬장꼬장한 선비의 집안에서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당시에는 부모가 혼처를 구함에 매파가 몇 번 양가집을 왔다 갔다 하며 중매로 맺어 준 배필과 결혼을 하는 것이 전통적인 풍속이었다.
그런데 제일 큰누나였던 모친이 연애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를 아신 할아버지께서는 당연히 노발대발하시어 양반 집안 꼴이 말이 아니라면서 펄쩍 뛰셨다. 더 이상 험한 꼴을 보지 않겠다고 하시며 1년간을 대구로 훌쩍 떠나시어 결혼식에도 참석 안 하셨으나 그 이후 모친이 자식들을 잘 낳아 키우는 것을 보시고 화를 푸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부모님은 5마지기만을 상속(?)받아서 7남매를 이끌고 고향을 떠나 일면식도 없는 이십 리 길 떨어진 무연고 마을인 칠곡군 학하리로 이사를 하신다.
당시 학하리의 집은 필자가 태어나고 몇 년이 지날 무렵부터 마을에서 청와대로 불리었는데 왜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본채가 아마 당시 오지마을의 촌구석에서 보기 힘든 큰 기와집이라 그리했을 것 같다. 사랑채는 머슴이 사용하는 초가집이었는데 비록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아 퇴락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다.
필자의 모친은 그 당시에도 많은 9남매의 자식들을 낳은 탓도 있었겠지만 아버님을 도와 농사와 살림을 하다 보니 제대로 산후조리를 하지 못해서 몸이 많이 약해지면서 농사일은 접으시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셨다. 그때의 어머니들 말씀을 들어보면 아침에 해산하고 쉴 틈도 없이 오후에 새참을 준비하여 들로 논으로 나가서 농사꾼들을 먹였다고 한다.
세대차가 난다 하겠지만 산후조리원에서 도우미들에 둘러싸여서 산후조리를 하는 요즈음 산부들이 들었으면 기절초풍할 소리가 아니겠냐 싶다.
요즈음 말로 라떼~~ 하면서 꼰대소리라고 할 텐데 당시 현실이 그랬다고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이때 우리 엄마들의 가사노동을 생각해 보면 산후조리는 물론 그 엄한 시월드(?)속에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았을 터이다. 우리나라가 아직 세계최빈국이었을 때 어떤 풍물사진에 사오십 대의 여자 농부 셋이서 어깨에 소의 멍에를 지고 앞장서고 농부가 뒤에서 쟁기로 밭을 가는 모습을 찍은 것이 있는데, 이 당시 삶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요즈음도 인구대국이 경제대국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당시도 노동력을 경제력으로 생각했던 시절이었으니 자식들이 많은 게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요새 젊은 부부들이 들으며 대경실색할 소리겠지만 “사람의 먹을 복은 하늘이 낸다”는 인식하에 다산에 대해서 별로 걱정을 하지 않은 시절이기도 했다.
자식농사만이 남는 장사라는 말이 있듯이 그 당시 노동집약적 농경사회로서는 노동력이 담보되는 자식이 많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던가 싶다.
필자는 태어났을 때 4.5kg정도의 덩치로 크게 태어났다 하여 대생(大生)이라 했고 한편으로는 검은 코끼리처럼 크다 해서 대상(大象)으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피부가 좀 검은 탓에 언뜻 보면 흑인 혼혈아처럼 보인다 하여 모친의 불륜을 의심하기도 했다는데, 당시에는 한국전쟁으로 많은 흑인병사들이 전투에 참여했고 정전협정 이후에도 각 지방에 미군부대들이 많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 첫돌에 뒤집기를 하고 두돌이 다 되어서야 겨우 일어섰다 하니 발육도 여타 아이보다는 한참 느린 게 분명했다. 때문에 정상적인 아이로 성장을 할까 걱정도 많이 했다고 한다.
후일담이긴 하지만 얼굴색이 남보다 검었던 관계로 회사를 창업하고 영업상 해외여행이 잦았는데 한번은 외국에서 귀국했을 때였다.
화물을 찾아 출구로 나오는데 공항근무요원이 나에게 다가와 “Hey, this way, please.” 하여 무슨 검사라도 할 것이 있다는 뉘앙스로 다른 통로로 데리고 가려는 듯해서 한참을 웃었던 적이 있었다.
근무요원은 아마 필자를 필리핀등지에서 무슨 고가품 밀수나 마약운반(?)이나 하는 외국인으로 오해해서 그리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연재 제4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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