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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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한국출산장려협회 박희준 이사장의 특별 기고문
                                                                            (사)한국출산장려협회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첫째는 무엇보다 인구에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고찰할 때, 인구의 중요성이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할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세력 판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공인 인디언이 서구의 침략에 의한 학살과 전염병 창궐 등으로 인구가 급속히 줄어들어, 오늘날에는 백인들에게 주도권을 내어주고, 소수 인종으로 전락했으며, 그들이 지닌 고유문화나 언어도 상실했습니다.  미국이 세계를 리드하는 원인은 수많은 이민들이 유입되어, 급팽창하는 산업계에 노동력을 공급했으며, 서부의 광대한 지역을 개척하는데 주 동력이 되었고, 탄탄한 국내 소비 시장을 형성하였습니다. 유럽에서도 17세기 네덜란드의 번영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개신교에 대한 종교 탄압으로 우수한 개신교상공업자들이 대거 네덜란드에 유입되어, 전성기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비추어 볼 때 현재 우리나라의 인구 감소 추세는 심각하며, 장래는 더욱 암울합니다. 합계 출산율이 2.1%이 되어야 현상 유지를 할 수 있으나, 우리의 합계 출산율은 0.78%로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찾을 수 없는 낮은 수치이며 조만간 대한민국의 소멸은 자명합니다. 인구 감소와 노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내수시장은 좁아지고, 생산인력의 공급은 줄어들어 기업은 불가피하게 국내 생산과 투자를 줄이면서 해외로 이전할 것이며 이로 인해 산업의 공동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설상가상으로 젊은이의 노인에 대한 부양 부담이 가중되어, 세대 간 갈등이 증폭되며 현대판 고려장의 출현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국가안보면에서도 적정수의 병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징병제가 어려워질 것이며, 모병제의 목소리가 강해질 것입니다. 징병제에서 모병제로의 전환은 국방비의 추가적 확보가 요청되며, 추가되는 예산의 대부분은 모병제에 따른 인건비로 충당되어 실제 전력 향상에 투입되는 예산은 축소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국방비가 우리와 거의 비등하지만, 방위력에 있어 우리나라가 우위를 점하는 것은 징병제에 따른 인건비 부담이 적어서 이를 실제 전투력 증강에 투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주공산과 다름없는 우리나라에 주변 일본, 중국, 러시아가 무혈 입성할 수 있으며, 조만간 북한의 인구. 특히 청년층의 인구가 남한을 능가할 때, 국가안보는 어찌 될 것인지 암담합니다.  이러한 비극적 전망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이 저출산 문제 해결에 우선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는데, 정치인들은 정쟁에 몰두하며, 당리당략에 치우쳐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분야에 보다 많은 예산을 배정받는데 혈안이 되어 국가적 긴급과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습니다.  저출산 문제 해결은 단순히 정권 차원이 아니라, 국가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므로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국가인구위기대책특별위원회를 신속히 조직하며, 각계각층의 전문가와 국민들이 모여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해결책을 긴급히 마련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또한 정부 각 부처에 산재한 출산 관련 조직과 기구를 통폐합하여 대통령 직속하에 저출산에 관련된 미래인구가족부와 같은 전담 부처를 마련하고 인구부총리로 격상시킬 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의 컨트롤 타워를 작동시킬 인구총리까지도 검토하여 국가인구 100년 대계를 위해 전담부처에 예산과 조정 능력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은 결혼을 하려는 젊은이들의 보금자리 확보입니다. 우리나라는 소득에 비해 집값이 너무나 높아서, 자신의 노력으로 집을 마련하기 요원합니다. 특히 수도권의 집값 폭등이 전국적인 부동산 광풍을 불러왔습니다. 이러한 집값 폭등이 젊은이들이 결혼을 포기하거나 망설이게 합니다.  망국적인 부동산 폭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수도권의 집중을 완화하고 지방의 발전을 도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정책을 폐지하고, 기업이나 청년들이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갈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도권 대학에 대한 각종 지원을 줄이거나 폐지하고, 지역 대학에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각종 문화적 시설과 의료기관을 지방에 설립하여, 지방도 서울에 못지않은 문화적, 의료 혜택을 향유해야 합니다.  기업의 지방 이전을 촉진하기 위해서,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지방에 투자할 수 있도록 세제와 금융지원을 강화하고, 기업 생존에 필수적인 인력을 지방에서 확보할 수 있도록 우수 인재가 지방으로 자발적으로 갈 수 있는 여건을 지방에서 조성해야 합니다. 한데 우리나라의 여론 주도층과 정책 입안 및 집행하는 기득권층은 말로만 균형발전을 외치지만, 속내음은 정반대입니다. 국회의원들과 세종시에 근무하는 고위공무원들의 실제 거주지는 서울입니다. 이러면서 국토균형발전이니, 지방화니 외치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국민들에게 위선적인 존재로 인식되며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사교육비 경감, 자녀 양육비 지원이 현재보다 훨씬 강화되어야 합니다. 더불어 난임 수술 지원과 직장에 다니는 여성이 임신과 출산, 자녀 양육에 지장이 없도록 정부와 기업의 협력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그리고 해외에 거주하는 750만명에 이르는 재외동포의 국내 이주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국내 정착에 따르는 지원을 대폭 늘리며 해외로 이민 가는 추세를 방지해야 합니다. 현재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로 이민 가는 사람들 다수가 젊은 층이며, 우수 인력입니다. 특히 미국으로 유학 가는 우수한 인재들이 국내에서 꿈을 펼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과 사회 전체가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인재 유출을 방지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다문화 가정에 대한 지원과 배려를 통해 외국인에 대한 문호를 넓히며, 귀화요건을 완화하여, 대한민국 국적 취득이 보다 용이하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해야 합니다. 해외입양보다 국내입양을 장려하며,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사실혼을 인정하고 법률혼과 동일하게 지원하며 미혼모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며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각별한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남북한은 서로 협력하며 교류하여, 장래 평화적 남북통일을 위한 기초를 다지야 할 것입니다. 남북한의 평화적 통일은 한반도의 인구소멸을 방지할 수 있는 기초가 될 뿐 아니라, 세계 평화에도 기여하며, 튼튼한 내수시장 확보와 풍부한 노동력 공급을 제공합니다.  저는 (사)한국출산장려협회의 회장으로 있는 박희준입니다. 씨에이팜이란 맘앤베이비 전문기업을 창업하여, 출산에 따른 산모의 건강을 위한 제품을 개발하고, 일찍이 1997년부터 미래인구연구소 내에 한국출산장려협회를 설립하여 저출산의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한때 건강 악화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순간에도 저출산과 인구 감소라는 대한민국의 심각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학계와 시민단체에 저출산과 인구감소에 관한 강의를 꾸준히 진행하면서, 인구감소와 이에 수반한 국가소멸이라는 비극적 현상이 재현되지 않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인구학박사로서 이론과 현실을 적절히 조합하여 생활밀착형 인구전문가이자 인구명의로서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 있는 한국적 저출산 방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 각계각층의 주요 인사를 초빙하여 구국지사 33인을 만들어 3.1 운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외치듯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출산·출생장려 구국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근래 여당과 야당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저출산 극복을 위한 정책을 쏟아내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 (사)한국출산장려협회의 저출산 극복정책을 일부 발췌한 것에 불과합니다.  단순히 일부 교수와 연구단체의 피상적 이론에 치우친 임시방편적인 정책 시행은 예산만 소모하지, 투입된 예산에 비해 별다른 효과를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인구증대가 국력 신장을 가져오는 시대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인도는 중국을 능가하는 인구를 지니게 되었으며, 인구 구성비에서도 중국보다 생산연령층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은 인도와 친선관계를 맺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하고 있으며, 생산시설을 중국에서 인도로 이전하고 있습니다. 인구와 경제 간 상관관계 정리로 ‘맬더스 인구론’은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며, 재앙을 초래합니다.   임신과 출산으로 가족공동체가 형성되고 지속되도록 모든 국민의 의식 전환이 시급합니다. 저출산에 따른 인구 감소와 국가소멸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며, 자신과 자녀 모두에게 치명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조속히 깨닫고 각성할 수 있도록 널리 알려야 합니다. 더 이상의 망설임은 결국 대한민국의 소멸을 가져옵니다. 지금도 늦지만 절망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소멸이냐 부흥이냐 갈림길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저출산을 방지하고 지속적 인구증대를 통해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꽃봉오리를 키우는 것입니다.  이에 민간협력기구로 국가인구위기대책특별위원회 설치와 함께 국가비상사태선언을 통해 긴급조치가 발동되어야 할 것을 제안하며 대통령은 매월 출산·출생장려확대회의를 개최하기를 제안합니다.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실제로 결혼과 출산에 따른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이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정책 입안과 실천이 요청됩니다. 마지막으로 출산·출생장려 구국운동 캐치프레이즈로서 전 국민에게 호소하고자 합니다. ”출산·출생장려는 제2의 구국운동이자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를 보장합니다.  이는 꿈이 아닌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입니다.  “다산코리아! 행복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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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3
  • 연재 14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싯크릿"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한다. 영국의 버밍햄에서 개최된 유아전시회에 참가했을 때였다.  런던 한인회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마침 런던에서 유럽 각국에 있는 한인 유학생들이 모여 체육대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버밍햄에서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갔더니 주영대사와 각국의 한인회장들이 모두 참석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시간을 좀 얻어 한국의 저출산현황을 설명하고 각국마다 출산장려정책을 한국출산장려협회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두 번째로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개최되는 유아전시회인 ABC키즈 엑스포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한인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출산장려협회 회장이라면서 만나기를 요청했는데 한마디로 거절당했다.    그렇다고 멀리 해외까지 왔는데 포기할 필자가 아니었기에 한인식당 사장을 통해 함께 자리를 마련해 줄 것을 부탁해 저녁식사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다. 식사자리에서 이유를 알아보니 출산장려협회에서 연락을 하니까 혹시나 후원금이나 기부금이라도 부탁할까 봐 지레 겁을 먹고서 거절을 했던 것이었다.          여기서도 한인회장으로부터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일련의 국내외 출산장려운동을 통해서 착실히 실적을 쌓아 2018년 4월 역삼동에 30여 평의 사무실을 마련하고 서울시에 사단법인 서류를 제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 존재 유무확인과 업무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담당 주무관들이 사무실로 직접 실사를 하러 나왔다. 그리하여 드디어 2018년 6월 29일자로 여성가족부 소관으로 해서 서울시로부터 사단법인 한국출산장려협회로 허가를 받았다. 처음 출산장려운동을 펼친 지 실로 20여 년 만에 드디어 기대했던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던 것이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연재 제15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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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2
  • 연재13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싯크릿"
                                                                                                박희준 이사장     드디어 (사)한국출산장려협회 허가를 받고 2007년 4월 발기준비모임을 개최하고, 2010년 7월에는 백두산 천지에서 환인, 환웅할아버지께, 8월에는 중국태산 옥황정에서 옥황상제께, 9월에는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바로 옆에 간단한 제단을 설치하고 단군 할아버지께 출범식을 앞두고 출산장려운동의 성공을 기원하는 발원 기도까지 올렸다. 1주일 후인 2010년 9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한국출산보육장려협회’ 출범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운동에 뛰어들었다.                                                                         <임산부들과 발기인대회를 함께 하고> 이날 출범식에는 임산부와 전직 장관, 국회의원 그리고 해외 한인회장을 포함하여 300여 명의 내외빈 인사들로 대성황을 이뤘다. 격려사는 전 보사부장관을 역임하셨던 김종인 씨가 했고, 축사로는 문희 마약퇴치운동본부장과 런던 한인회장과 임산부대표가 맡아 해주셨다. 미국, 영국과 말레이시아 한인회장과 중국연변지역대표가 해외지부장을 맡아서 해당국가의 출산장려정책을 공유하는 것으로 지부의 업무를 시작하기로 협의가 되었다.                                                                      <2010년 9월 출범식을 마치고 기념촬영>   그 후 2010년엔 홈페이지를 오픈하여 인터넷 홍보를 시작했고, 이후 다자녀할인카드 특허출원,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신년자선음악회 주관, 2011년에는 3.1정신 구국운동 범국민연합과의 협약체결, 제11회 여성마라톤대회 후원, 위시맘 캠페인 및 선포식 참가를, 2012년에는 지금의 한국출산장려협회로 개칭하고 매월 전국에서 10회 이상의 맘비스쿨 진행, “아이 낳기 좋은 세상” 태교음악회 후원, 출산장려 구국운동포럼 개최했으며 18대 대통령후보자 초청 출산장려정책 발표회 개최 등의 행사를 통해 협회를 충실하게 정립해 나아갔다.       2013년에는 맘비이야기 콘서트, 빨간코데이 선포식, 동아일보 주최 춘천마라톤에서 홍보행사, 서울시 장애여성 인력개발센터 협약체결을, 2014년에는 제1회 난임의 날 공식협찬, 이주여성지원센터 개소식참가와 후원, 인구보건복지협회 지원을, 2015~2016년에는 다둥이마라톤대회 지원 및 부스참가 운영, 지자체행사 지원, ‘유모차는 가고 싶다’ 지원 및 부스참가 등을 거쳐 2017년에는 1월에는 출산장려 리더스 포럼을 만들고 정기총회를 개최하는 등 차곡차곡 실적을 쌓아가며 사단법인 허가에 대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0여 개국을 돌면서 한인회장을 만나 각국의 결혼,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한 정책들을 정리하여 협회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러한 외국정책들을 한국 실정에 맞게 잘 조정하여 ‘한국적 민주주의’처럼 우리의 출산장려정책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해외지부를 설립하고 각국의 출산장려정책을 공유하기 위해 외국으로 공무출장을 갈 때도 항상 업무가 끝나면 시간을 내어 해당국의 한인회를 방문하여 출산장려정책 공유의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협조를 구하곤 했다.     연재 제14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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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9
  • 연재 12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박희준 이사장      부르즈 칼리파 60층에서 은혼식 깜짝 쇼를 계획했으나 [글로벌문화신문] 2008년 5월 필자는 국제전시회에 프라젠트라 튼살트림을 전시하고 상담을 하기 위해 두바이로 날아가게 되었다. 마침 집사람도 부사장의 위치로 사업의 일부분을 맡아 하던 터라 동행하게 되었다. 중동출장은 처음이었고 새로운 나라의 풍물을 접한다고 생각하니 흥겨웠다. 집사람도 수학여행 가는 여고생처럼 기뻐하였다. 이때 두바이는 세이크 모하메드 왕세자의 독특한 창의력과 지도력으로 중동교역의 중심지로서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특히 국토확장을 염두에 둔 인공도시인 팜 아일랜드 건설은 아이디어 차원에서도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으로 유명했다.   마침 우리나라 삼성물산이 세계 최고 높이인 828미터의 부르즈 칼리파 빌딩을 짓고 있었는데 필자가 갔을 때는 맨 꼭대기까지 건물뼈대는 다 올라가 있었으나 60층 이상은 아직 실내공사가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 이하의 밑부분에서는 이미 상가들이 입주해 영업을 하고 있었다.         마침 2008년이 결혼 25주년으로 보통 외국에서는 나름 비중 있게 은혼식이라 하여 부부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기념하는 해였다. 필자도 이날 집사람을 위해 깜짝행사로 은혼식파티를 행하리라 작정하고 서울에서 출발할 때 집사람에게는 알려주지 않고 제법 큼지막한 현수막을 만들었다. 내용은 ‘희준과 성애의 결혼 25주년 은혼식’이라 하여 배경에 하트마크와 예쁜 꽃 디자인도 넣고 하여 제법 화사하게 제작하였다. 그런데 상담도 성공리에 마무리 짓고 조촐하게나마 결혼 25주년 깜짝 쇼를 하려고 호텔룸 안에서 백 안의 준비한 현수막을 꺼내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것을 집사람이 보고 말았다. 들키고 마니 좀 멋쩍게 되었으나 저녁을 먹기 위해 현수막을 들고 60층의 식당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통역의 예약 미스로 레스토랑에서 내국인 행사가 열려 외국인 고객들은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현수막 행사는 포기하고 바깥으로 나와 인근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사업상 외국에 한두 번 나가본 게 아니었으나 아내와 같이 이국의 야경을, 특히 독특한 중동의 야경을 함께 구경하는 즐거움도 컸다. 집사람과 이국의 식당에서 갖는 식사 한 끼가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되었고 필자를 따라와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내조해 준 집사람의 헌신과 사랑에 더욱 가슴에 아려왔다.         두바이를 봄 시즌에 가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낮에는 무려 40도까지 기온이 올라 가만히 있어도 등짝이 흥건히 젖을 정도로 무척 더우나 밤이 되면 25도 정도의 제법 선선한 기온이 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시절 이미 두바이 중심가는 우리 서울을 훨씬 능가하는 현대화가 진행되어 마천루가 키 자랑을 하고 있었다.    거리는 가로등이 휘황하게 빛나며 잘 닦인 도로의 중앙분리대 잔디밭에는 시원한 대추야자 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고 어딜 가나 실내에는 에어컨 바람이 팡팡 나오고 있었다. 바다에는 국토를 넓히는 작업으로 팜 아일랜드를 비롯하여 야자수 모양과 세계지도 모양의 인공 섬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통역이 타던 일제 SUV를 타고 나섰는데 인근에 중식, 태국, 한국, 일본식 등의 화려한 식당도 많았지만 좀 외곽으로 나가 지방의 전통음식을 먹고 싶었다. 20여 분을 외곽으로 나가 어느 소박한 아라빅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메뉴를 골랐다. 통역에게 물어보며 이것저것 손짓발짓하다가 메뉴판을 보고 어린 양갈비구이와 시시케밥을 시켰다. 손가락만 한 갈비를 실내에 설치된 화덕에서 구워주는데 아주 맛이 있었다.    케밥과 함께 소위 걸레빵이라고 하는 인도의 난 비슷한 밀가루빵이 나오고 이를 병아리 콩으로 만든 소스에 찍어 먹는데 세상 사람들의 입맛은 꼭 같은지 이것 역시 아주 맛있었다. 필자는 이날 식욕이 동했는지 양갈비 다섯 대와 두툼한 걸레빵을 두 장이나 먹었다. 하여튼 이날은 아내와 나 단둘이서 조촐하게 이국의 야경을 보며 아쉽지만 멋진 추억을 만든 날이었다.   연재 제13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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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7
  • 연재 11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싯크릿"
                                                                                              박희준 이사장      아이고 사장님, 우린 뭐 먹고 살라꼬예? [글로벌문화신문] 이렇듯 회사운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점차 안정되어 갈 무렵, 회사의 이미지 제고를 위하여 심벌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그전부터 벌써 본사제품으로 출산장려 이벤트를 시행하여 둘째 아이면 50% 할인, 셋째 아이면 100% 무료로 상품을 배송해 주던 때라 당연히 모성이나 아이 쪽으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 모성을 상징하는 말에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함함한다’라는 것이 떠올랐다. 캐릭터로 고슴도치를 결정하고 스스로 어설프나마 고슴도치 어미와 새끼를 조합, 디자인하여 전문회사에 의뢰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귀여운 맘비 케릭터가 탄생했다. 이 캐릭터 제작에 당시 4,000만 원이라는 큰돈이 들었으나 필자가 지금 봐도 아주 귀엽고 깔끔하여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이 고슴도치 모녀는 우리 회사의 심벌로서 회사의 현관문 앞에 붙여져 오고 가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또 배웅하고 있다. 이 고슴도치 캐릭터가 완성된 후에 보다 적극적인 홍보방법을 찾았다. 먼저 광고를 통한 출산장려운동을 펼치면서 공익과 사익의 가치를 공유하고자 TV 공중파 광고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광고비가 높아서 일단 잠시 보류하고 다른 방법을 찾던 중에 중기청에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방송광고공사를 통해 광고 지원정책을 펼친다는 내용을 듣고 신청하여 바로 선정이 되었다.     2008년부터 3년 가까이 KBS2, MBC, SBS 공중파를 통해서 ‘다산코리아, 행복코리아, 프라젠트라가 응원합니다’로 해서 광고를 했다. 그 와중에 IBK기업은행 행장이 우연히 TV에서 우리 출산장려 광고를 보고 연락이 오고 얼마 안 있어서 기업은행과 당사가 제휴협약서를 체결하게 되었다. 은행 측에서 프라젠트라 임산부 튼살크림과 베이비 제품을 약 2억 원어치 구입해서 임산부 대상의 우대금리 적금상품을 파는 이벤트에 경품으로 내걸어 신청자 6,000명에게 무료로 제공했다고 한다.    당사는 감사의 뜻으로 자막에다가 ‘IBK기업은행과 주식회사 씨에이팜이 출산장려운동에 함께 동참하고 있다’라고 띄워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광고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사건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회사 임직원들이 출산장려운동도 좋지만 셋째아이 출산에 무료로 제품을 보내주게 되면 막대한 제품비용과 배송비를 부담하게 되는데 ‘우리는 뭐 먹고 살라꼬예’ 하며 왜 정부의 공익사업에 우리가 참여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불만 섞인 항의를 쏟아 낸 것이다. 하지만 좀 있어 기업은행의 구매 내용을 보고서는 다들 찬성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두 번째로는 IBK기업은행 측에서 자막홍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면서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송해를 모델로 한 은행상품광고가 대박이 났다는 후일담이 나오기도 한 것이었다.   연재 제12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컬럼/인물
    2023-12-03
  • 이상만 성균관 전례위원회 연구위원 컬럼, 사도(師道)가 살아야 도덕(道德)이 일어난다
            이상만(성균관 전례위원회 연구위원)   [글로벌문화신문] 지난 달 어느 젊은 여교사가 학생지도에 힘쓰다가 학부모 대화와 교실 안 실제 상황 사이의 부조화에서 번민하던 끝에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여 생을 마감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급기야 전국교사 일동 주관으로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3만여 명의 교사가 뜨거운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섰다. 새내기 교사의 고통과 죽음을 평소에 그 누구보다 피부로 느껴왔기에 교실의 붕괴와 함께 교권의 추락을 세상에 알리려는 고뇌의 몸부림이다.       이는 일시적 시위가 아니다. 오랜 세월 누적된 교육계의 총체적 비리(非理) 현상을 동료 교사들이 직접 나서서 교육 혁신의 불가피성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참으로 큰일이다. 이대로 방관하다가는 교사를 더 죽게 만드는 공범자가 된다. 교육 당국은 지금의 드러난 현상적인 문제점을 철저히 원인 분석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교육 백년대계를 다시 세워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지난 백 년의 역사를 잠시 되돌아보고, 교육 혁신의 본질 파악에 초점을 맞추어 주요 참고사항을 언급한다. 교사는 예로부터 천직(天職)이었다. 50년 전만 해도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못했다. 그만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뭣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데 알게 모르게 교편(敎鞭)을 잡아 도우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라도 자식 교육만큼은 마을이나 이웃 마을의 선생을 찾아서 맡겼다. 서당의 훈장은 마을마다 있어서 그 연령대에 맞는 교재를 선정해서 지도하였다.  15세가 되면 향교나 서원에서 학업에 열중하다가 20세 전후에는 중앙의 성균관 사마시(司馬試)에 응하여 진사(進士)나 생원(生員)이 되어 본격적으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학습 과정을 밟다가 임금이 친히 성균관 문묘(文廟)에 성현(聖賢)을 찾아뵙고, 명륜당에서 베푼 알성시(謁聖試)나 대과(大科)를 보아 관료로 진출하여 조정의 신료로서 업무를 맡는다. 그리고 나라의 기둥과 대들보로 맡은 바 책무를 수행하면서 일생을 바쳤다. 이런 선비정신으로 900여 회 이상의 외침에도 버텨내어 은근과 끈기로 조선왕조 500년을 이끌어 왔다. 여기서 임금과 스승과 부모의 하늘 같은 은혜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금쪽같은 말씀이 생겼고, 가정과 사회와 나라에 임하면서 부모에 효도하고, 스승에 예를 갖추고, 나라에 충성하는 효(孝)와 예(禮)와 충(忠)이라는 고귀한 정신문화의 유산을 집안 대대로 전통으로 이어 왔다.   이때의 기본 교재(敎材)는 자연의 이치와 현상 세계를 집약하여 전해주는 추구(推句), 역사와 문화의 시원과 발전과정을 담아 청소년을 일깨우는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啓蒙),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小學) 등이 있고, 동양의 역사와 문화를 사자성어로 압축한 천자문(千字文)과 세상의 윤리 도덕을 고루 모은 명심보감(明心寶鑑), 동방의 천자(天子) 요순(堯舜)과 성현(聖賢)인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담은 사서오경(四書五經) 등이다. 한마디로 자연의 이치와 인성교육의 기본 핵심을 쉽게 풀어주어 사람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지도하는 선생이나 학생은 늘 진리(眞理)를 가까이 접하며 도(道)의 경지로 나아가 지행합일(知行合一) 하는 곧은 선비정신과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하여 전문성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백성을 친절하게 이끌고, 경로효친(敬老孝親)의 자세로 안팎을 두루 편안케 하며 교학상장(敎學相長) 하는 참교육의 모습을 견지하였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권력을 남용한 일부 탐관오리도 있었고,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었거나 세도정치에 몰두한 정객들도 있었다. 결국, 19세기 말 20세기 초엽,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에 온 백성은 무력을 앞세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는 뼈저린 국치(國恥)를 당했다.  이때도 전국의 훈장이 제자를 이끌고 과감히 항일(抗日) 의병(義兵)의 선봉에 서서 국내와 만주, 상해, 중경 등 외지에서도 국권 회복에 전념하였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 천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였다. 이후 서양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패권을 다투다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3년 후 휴전협정 후 폐허 속에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였다.    대통령 측근의 부정부패가 원인이 되어 1960년 민주 학생혁명이 일어났고, 1961년 군사정부가 들어서서 경제개발에 심혈을 기울였고 한글 전용시대를 열었다. 서구문물을 제도화하여 영어학습을 기본으로 시켰고, 과학기술교육에 진력하였다. 지속해서 정부 주도의 산업화에 치중함으로써 큰 성과를 내었으나 부작용으로 땅에 떨어져 가는 인륜 도덕을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70년대를 기점으로 서구화 물결 속에서 물질적 가치추구와 개인주의 성향이 심해지자 한국적 민주주의 논란이 대두하며 사라져가는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美風良俗)과 전통문화를 재인식하자는 민족주체성 확립에 관심을 끌게 하였다. 이때 고구려 소수림왕 372년에 건립한 태학(太學)의 오랜 전통을 계승하는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서도 내외의 바람과 성원에 힘입어 최초로 여성유도회(회장 조애영)가 창립하였고, 한국청년유도회(회장 최창규)가 이어 창립하여 쇠퇴하던 유교 문화와 유도부흥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이른바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라 하여 인재를 길러 널리 배출하고, 풍속을 순화하여 고르게 한다는 성균관(成均館) 본래의 교육 정신을 앞세웠다.    전국 1천만 유림이 나서서 도덕성 회복운동을 전개하여 황금만능주의 가치관의 폐해를 막고, 인륜 도덕이 살아나는 정신과 물질이 조화를 이루는 새 시대의 가치관 정립에 온 힘을 모아 사회정화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다. 현재도 전국 주요 향교 명륜당에서 방학 기간에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한자, 서예, 생활예절, 전통놀이, 사자소학 등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시도별로 미풍양속 순화를 위한 도덕성회복운동 대회를 개최하고, 명륜대학을 개설하여 관내의 남녀 어른들이 참여하여 노후를 건강하고 보람있게 보내는 삶의 지혜를 체득하도록 힘쓰고 있다. 이러한 성균관, 향교, 서원의 전통문화 현창의 꾸준한 노력의 결실이 나타났다.   최근 성균관, 향교, 서원 진흥법이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통과하였다. 이는 성균관이 일제 강점기에 민족정신 말살 정책으로 집중적으로 탄압받아온 이래 근 백 년 만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합법화 한 것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유구한 성균관, 향교, 서원의 문화 전통을 되살려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일대 반전(反轉)을 이룬 쾌거이다.       이제는 민사부일체(民師父一體)다    이미 2014년 12월에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장 정의화)에서 인성교육진흥법이 국회의원 만장일치로 통과된 바가 있고, 각급 학교와 사회단체에서 인성교육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효(孝)와 예(禮)와 민주시민의 올바른 의식을 장려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문제점이 여기저기서 노출하고 있어서 그 실효성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 중요한 논거의 일단을 지적한다면 법적인 근거는 마련되었으나 교육의 주체인 교사가 대부분 서구식 교육을 전문적으로 수료한 입장이고, 교육정책 입안자나 행정 요원도 같은 시기에 교육과정을 마친 신분이므로 현실적인 문제점은 세밀하게 분석 파악은 하였으나 교육 혁신의 대안 연구나 실제적 체험의 미비로 한계점이 나타났다.  이점을 보완하려면 전통 인성교육의 핵심인 동방의 유학(儒學)과 함께 윤리 도덕교육 과정 및 연수 기간에 적극 동참하여 실제적 체험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즉 ‘근본을 세우면 도덕이 살아난다.’는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이라는 가르침과 ‘옛것을 보듬어 새것을 알아가게 함이 스승답다.’는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와 ‘세 사람이 가면 반듯이 나의 스승이 있다.’라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의 말씀이 <논어>에 있듯이 만세사표(萬世師表)인 공자의 가르침을 존숭하는 성균관, 향교, 서원 등에서 성현의 가르침을 몸소 체득하는 수련 과정을 거치는 기본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전문 교사들도 방학을 이용하여 동양적 전통교육의 참뜻을 직접 익혀서 동서(東西) 학문과 기능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능력개발과 지혜를 습득하여 무엇이 진정 학생지도에 필요한지, 본말(本末) 관계를 숙지하여 학생수업에 적용한다면 새 시대 교사로서 인격과 자질을 재평가받을 수도 있다. 이에 대비하여 성균관, 향교, 서원은 전국 교사를 대상으로 재교육 프로젝트를 성안하여 본래의 교육 기능을 살려서 새 인성교육의 장을 제도적으로 마련하여 널리 학습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꿈많은 여교사가 왜, 그토록 안타까운 결단의 삶을 선택하였을까? 그동안 같은 길을 간 교사가 100여 명에 이른다니 교육 당국은 무엇을 했는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가, 학부모를 탓해야 소용이 없다. 오늘의 학부모는 6.25 전쟁 후 경제재건의 격동기에 허리 졸라매고 잘살아보자고 헌신한 부모가 낳은 세대이다. 상식적으로 좋은 교육환경을 찾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은 알아도, 교육부재로 몸소 신중한 가정교육을 보인 맹모단기(孟母斷機)는 잘 모를 수가 있다. 문교 행정의 조변석개 식으로 아침에 변경하고 저녁에 바꾸는 입시 위주의 교육정책으로 이미 교육불신을 체험하였고, 그에 따라 본의 아니게 치맛바람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학부모 세대이다. 젊은 여선생은 죽어서도 말하고 있다. 한 꿈많은 여교사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을 추모하는 3만 아니 5만 10만의 교사가 하나같이 검정 옷을 입고 진짜로 죽기 살기로 사생취의(捨生取義) 정신을 발휘하여 나라의 참교육 혁신에 나서고 있다. 다음으로 이 나라 교육행정의 책임을 맡은 관료들이 공무원 신분으로서 마땅히 심사숙고하여 교육계의 원로와 뿌리 깊은 교육의 본당으로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이 엄연히 존재하는 성균관(成均館)의 자문을 구하면 일이 쉽게 풀릴 수 있다.    이미 땅에 떨어진 사도(師道)를 되살리기 위하여 교사의 목소리를 국민의 함성으로 받아들여 민주시대에 알맞은 국가백년대계의 큰 그림과 방안을 마련, 제시하면 교육이 다시 살아난다. 이제는 집사부일체를 넘어서 민사부일체(民師父一體)가 답이다.     백성과 나라를 구하려 백의종군(白衣從軍)한 성웅 이순신의 호국 정신이 말한다.    필사즉생(必死卽生)!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지니,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말라!
    • 컬럼/인물
    2023-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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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희준 특별칼럼] 3.1절에 출산장려로 제2의 구국운동을 이끌다
        한국출산장려협회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3.1절! 제2의 구국운동을 이끌다 누구나 3.1절이라면 유관순 열사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운동가를 생각한다. 왜 그럴까, 당연코 의문이 생기는 질문이지 않는가? 이는 나라를 잃어본 아픈 역사와 서러움을 가진 국가요 민족이요 후손이지 않을까 싶다.   유관순 열사가 목숨을 걸고 일제에 항거하면서 던진 만세 삼창이 없었다면,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낭독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할 뿐이다.   국내 최초로 출산장려를 위해 4반세기(25년) 전인 1997년도 10월 10일에 법인 및 정책발의를 위해 ‘인구미래연구소’내에 ‘한국출산정책협의회’를 발족하고 협회의 ▶미션(사명)을 자연주의, 생명존중, 박애봉사로 하고 ▶비전(정신)을 홍익인간, 유비무환, 무실역행으로, ▶핵심가치는 출산·출생장려는 제2의 구국운동이다. 로 정했다.   초기단계에는 “출산장려는 제2의 구국운동이다”라는 케치프레이즈를 만들어 저출산이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고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아직까지 산아제한의 굴레 속에 갇히어서 어느 누구도 앞장서서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에 안타깝기만 했다. 개인이 미래의 인구문제를 걱정해 본 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 해결될 기미는 전혀 없을 때 였으니 괜히 돈키호테식의 영웅심리가 아닌가 싶을 뿐이었다.   국회의원회관을 찾아 국회의원들을 만나서 산아제한은 이제 그만두고, 하루빨리 출산장려를 위해서 방향을 바꿔 나갈 법안을 만들어 발의해 줄 것을 호소하기도 수차례 반복해 봤으나 단지 마중물 또는 불쏘시게 역할로 만족할 뿐이고 더 이상의 기대는 할 수 없었던 암담한 현실 뿐이었다.   출산장려를 해야겠다는 계기가 된 것은 어느 대학병원 산부인과를 찾은 임산부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언니, 배만 트지 않는다면 아이를 더 낳고 싶은데 말이야”라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지 않았다면 어찌 한발짝이라도 나아갈 수가 있었나 싶다.   이게 제약회사에서 소화제를 개발한 경험이 있었기에 바로 "배가 트지 않는 제품을 개발한다면 출산장려에도 조금의 도움은 되지 않을까?" 해서 국내 최초로 살이 트지 않는 임산부 튼살 전문크림인 ‘프라젠트라’를 개발한 것이 출산장려를 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를 사업화하여 수익금의 일부를 출산장려를 위한 봉사활동에 크게 기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혼모를 위한 사회단체인 대한사회복지회, 동방사회복지회, 홀트아동복지 그리고 도담하우스 등을 방문하여 임산부 튼살크림을 기부하여 격려하기도 했다.   이를 공식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협회를 설립하고 출범식을 갖는 것이라 생각하고 2010년 9월 16일에 한국프레스센터에서 300여명의 내빈들을 초청하여 정식으로 한국출산보육장려협회가 발족이 되었다.   한국출산보육장려협회의 발족을 위해서 사전에 출산장려로 인구문제 해결의 역사적인 3개 명승지를 찾아 구국의 신념으로 간절한 기도을 올렸다.   첫 번째로 백두산 천지에서 환인 하느님께 협회의 출산 성공 발원 기도를 했다. 두 번째로 중국 태산 옥황정에서 옥황상제님께 견우직녀(선남선녀)의 오작교에서 자주 만남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기도들 드렸다. 세 번째로 출범식 1주일 전에는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옆에 제단을 차려 놓고 한민족의 시조이신 단군왕검께 협회가 성공하여 대한민국의 후손들에게 행복한 대한민국을 물려줄 수 있도록 발원기도를 올렸다.   그간에 실시한 이벤트로는 맘비스쿨, 자녀 많이 낳기 기원국토순레, 자선음악회, 여성마라톤, 춘천마라톤, 다둥이 마라톤대회, 난임의 날, 임산부의 날 후원, 출산장려구국운동 포럼, 임산부포럼, 빨간코데이 개최, 유모차는 가고싶다 참가 등 후원과 참가를 통해 출산장려 홍보를 하기도 했으며 MOU도 여러 단체와 협약식을 가지기도 했으며 18대 대통령후보자 초청 출산장려정책 발표회를 가지기도 했다.     한국출산장려협회 박희준 이사장   한출협의 출산장려 사업과 관련하여 ‘다산코리아 행복코리아를 꿈꾸며’, ‘가족’의 저서는 공저로 출간을 했으며, 필자의 저서인 ‘출산장려 성공시크릿’을  228개 지자체 단체장과 20대 정부의 대통령을 비롯하여 60여 기관장 그리고 30여개의 일간지에다가 보내어 벤치마킹하여 정책을 수립하도록 배려를 했다.   20여년 간의 출산장려운동으로 그간에 국무총리상, 보건복지부장관상, 산업자원부장관상,여성가족부장관상, 중소기업장관상, 서울특별시장상을 비롯하여 2018년에 ‘유네스코 올해의 인물상’과 2019년에는 조선일보 주최 ‘행복한 세상만들기 출산장려부분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이루었다.   2019년에는 청와대 초청으로 출산장려를 위한 사회적공헌기업으로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부부동반 오찬행사에 초청되기도 했다. 중소기업 대표이자 한국출산장려협회(이하 한출협) 이사장 자격으로 유일하게 초청된 것이 그나마 행운이자 큰 보람이기도 했다.   순수봉사단체로 협회를 시작했다가 그간의 무리한 봉사활동으로 인해 20여 년간 구국동지 였던 초대 사무총장이 지난해 타계를 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두 번의 암수술을 받기도 했는데 아직 하늘의 부름이 없는 걸 보면 출산장려 구국운동을 잘 마무리하라고 오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남은 여생을 정부와 협업을 통해 반드시 인구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면 제1의 구국운동은 무엇일까?   단연코 3.1독립운동이라고 말한다. 당시로는 독립운동이 나라를 살리는 구국운동이었을 테니 말이다. 당시로는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는 것이라 본다.     민족대표 33인의 중심인물이었던 손병희(독립선언식 주도)를 비롯하여 김마리아(일본에 숨겨온 독립선언문 전파), 김원벽(독립운동의 선봉), 이승훈(독립선언서 서명 추진), 한용운(3.1운동 계획, 독립선언서 낭독)을 포함한 3.1운동의 중심을 포함한 33인이 결성이 되면서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주권회복에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펼쳤든게 바로 구국운동이 아니었든가.   나라가 풍전등화이자 백척간두와 같은 누란지위에 놓일 때는 민간에서 의병들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서 나라를 살려 내는 것이 역사적으로 반증을 하고 있다고 본다. 한출협도 이와 같은 반열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구상에서 최초로 사라질 국가 1호가 대한민국이라고 인구학자들이 예측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인구절벽 대한민국’, ‘늙어가는 대한민국’, ‘돈맹위기 대한민국’이라 하지 않는가.   그래서 한출협도 3단계를 통해서 출산장려 구국운동을 펼치고자 한다.   첫 번째 단계로는 2050년까지 한자녀 사랑으로 초저출산시대를 극복하고, 두 번째 단계로는 2070년까지 두자녀 기쁨두배로 대체출산율 2.1명 유지하고, 세 번째 단계로는 2120년까지 적정출생 행복세배로 최적인구 경제강대국을 목표로 한다.    이를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서 3.1독립선언 민족대표33인에 필적할 만한 사회적인 명망가를 K-PEACE 100인 교육홍보대사(구국지사)를 1단계로 33인을 추대하여 2020년을 원년으로 하여 국회의원회관이나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오온캠페인 선포식 및 포럼’을 개최할려고 하였으나 지난 3년간의 코로나19로 인해 계속 연기되는 시련도 겪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0.78명인 초출산국으로서 OECD 38개국 중 골찌이며 UN 198개국 중에서도 최하위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출생아수가 25만명 이하로 곤두박질치고 있으며 2025년에는 인구의 20% 이상이 노인이 차지하는 초고령화시대로 접어들 뿐아니라 가장 급속도로 고령화가 가속되어 향후 10년 이내로 이 또한 세계 1위 국가가 된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노인빈곤율과 자살율 또한 세계 1위라고 하니 세계를 주도해 나갈 천손민족이자 한민족인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울하기만 하다. 지난해 이태원 참사에서 159명의 희생자가 이삼십대라고 하니 미래의 주인공이라 더욱더 슬프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살율 1위가 부끄러울 판인데 하루에 40~50여명이 자살자 중에 이삼십대가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태원 참사보다 더 참담한 현실이 아닌가.   이 보다 더 아픈 현실은 하루에 낙태건 수가 3000~3500명의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은 알고 있는가 말이다.   1년에 태어나는 출생아 수가 25만명 이하인데 사라지는 생명은 100만명이 넘는다는 현실만 봐도 저출산 극복의 현실은 요원하다고 할 수가 있겠다.   단편적인 예도 몇가지 들어보자.   ‘임신 소식 알렸드니 회사는 자진 퇴사 종용’하는 산전 산후 여성의 불리한 처우를 개선하고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쓸 수 있나’라고 물어보니 36%와 43%가 그렇기 않다고 하며 특히 일터의 약자인 비정규직 또는 분안정 노동자들이 휴가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하니 약자를 위한 배려가 없이는 출산율을 높이는 것은 요원할 것이다.   앞으로 특별근로감독을 벌여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관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 당국이나 노동부가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이 없이는 공염불로 끝날 것이다. 하루빨리 출산장려 인구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룰 전문부처가 신설되고 부총리급으로 격상시켜 예산의 사용처를 관리ㆍ감독하는 특임장관이라도 당장 임명해야 할 판이다.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분명 주위를 살펴보면 인구문제 해결을 위한 진단과 처방을 제대로 내릴 명의(名醫)가 분명 있을텐데 말이다. 앞으로 한출협의 창시자로서 한출협과 정부가 협업하여 시너지효과를 거두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올해는 저출산 극복을 위한 출산장려 음악콘서트를 문화·예술 행사를 시작으로 전국 지자체로 확대시켜 적극 홍보를 함은 물론 토크 콘서트를 병행하고 인터넷을 통해서도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여 더 이상 출산장려의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부에서도 3.1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과거와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을 제대로 진단하고 처방하여 미래에 대처할 방향을 제대로 잡아 나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출산ㆍ출생장려 구국운동의 케치프레이즈로 가름하고자 한다. “출생·출생장려는 제2의 구국운동이자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입니다. 이는 꿈이 아닌 새로운 나라살리기의 시작입니다.   다산코리아! 행복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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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7
  • 연재 제3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김현풍 나막사 총재 막걸리, 민족의 혼을 빚다 [글로벌문화신문] 우리들의 삶은 바로 3·1독립운동을 3·1혁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민족정신을 되세길 때입니다. 그리고 그런 민족정신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이 저는 ‘막걸리’라고 생각합니다. 막걸리는 우리 민족 고유의 술이며, 우리 민족의 얼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합일의식은 춤과 제사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절차에서 매개가 되는 것이 막걸리였고 고수레할 때나 나무를 옮겨 심고 잘 자라라고 뿌려주는 것도 막걸리였으며 여러 사람이 모여 화합과 정을 쌓는 매개가 되었던 것도 바로 막걸리였습니다.       즉 막걸리는 우리 전통이자 민족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막사는 막걸리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나라사랑 막걸리사랑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 유산 막걸리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이를 나라사랑으로 발전시키며, 더 많은 분들께우리의 얼과 정신문화를 전하고자 이 책을 펴냅니다. 막걸리 책이야 누구든지 읽고 막걸리도 다 먹어본 줄 압니다. 하지만 막걸리를 왜 먹는지, 막걸리에 왜 민족정신이 담겨 있는지, 막걸리 한 잔이 기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고 나라를 살릴 수 있음을 이해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끝까지 힘써준 김석주 선생과 귀한 사진을 제공해준 조창섭 사진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막걸리 시를 한 편 감상하며, 막걸리에 담긴 우리 민족의 혼과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는 기회가 되셨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그대 막걸리 (만초 김정현) 모처럼  옛친구 만나면무엇으로 화끈한 회포를 푸랴 잔치판 그것 없이 무슨 흥으로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랴 승리의 기쁨에 화합에무엇으로 왁자지끈 웃음꽃을 피우랴 억울한 일을 나약한 이웃에게무엇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주랴 하늘이 지상에 내린 선물 중낯선이도 한 잔 합세다아름다운 인심의 막걸리 선조들의 지혜의 우주가 담겨 있고낭만이 있는 먹거리 세계적인 발효술최고의 작품, 막걸리 토속문화로 이어진조상 대절의 살아 있는 고마움에 잔 부딪히며 술술 여름철 목 갈증에 노동에 출출할 때 값싸고 푸짐한 우리 신토불이 막걸리 세상이 변하고 변해도이 땅 이 나라만인에게 영원히 사랑 받을 막걸리 그대여 연재 제4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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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7
  • 연재 제2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나막사 김현풍 총재   [글로벌문화신문] 1919년 3월 1일, 의암 손병희 선생을 선두로 한 민족 대표인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습니다. 우이동의 천도교 봉황각에서였습니다. 의암 선생께서는 이곳에서 400명이 넘는 식구들에게 인쇄술을 비롯한 모든 것을 교육했고, 이곳이 3·1 독립운동의 발상지가 되었습니다.    봉황각에 가보면 아시겠지만 삼각산에서 가장 잘 보이고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경관이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삼각산이 가진 센 기운 때문에 의암 선생이 그곳에 터를 잡은 것이고 그 정기를 받아 3·1운동이 시작된 것이 아니겠습니니까?       더불어 삼가산 백운봉에 가시면 암각이 있습니다. 학생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 선생이 쓰신 3·1운동 암각문이 그곳에 새겨 있습니다. 이 3·1운동의 비폭력 저항정신은 중국의 5·4혁명을 일어나게 했고, 인도의 간디가 이끄는 비폭력 불복종 저항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혁명 그리고 미주에도 많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이 배운 것이 바로 의암 손병희 선생의 3·1정신이었습니다.   요즘 말하는 한류의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삼각산 봉황각에서 시작된 3·1 운동 정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격이니까요. 한류의 시작이 바로 1919년 3월이었습니다. 당시 손병희 선생은 100년 뒤에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했습니다.       2019년이 3·1운동 100주년, 우리는 그분이 말했던 100년 뒤를 살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에는 에펠탑, 미국 독립 100주년에는 예수상을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3·1운동 100주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나막사에서는 앞으로 100년 뒤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의암 선생님 같은 분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100년 전의 의암 선생을 기리고, 사라져 가는 민족의 혼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다행스럽게도 ‘미래연대’를 만들어 100년 뒤를 예측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두가 있는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2019년 3월 1일은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다함께 그분들의 뜻을 이어받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지금 모든 행사에서는 의암 손병희 선생이 33인의 한 분으로 속해 있을 뿐 지도자로 인식되어 있지 않습니다.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삼각산에서, 그 힘으로 대혁명을 일으킨 지도자 의암 선생, 우리는 그분이 그렸던, 그리고 그분이 지키고 싶어 했던 정신을 잊으면 안됩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가난하게 살고 친일파의 후손은 떵떵거리고 사는 게 우리 세상입니다. 정신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역사는 왜곡되어 있습니다. 나막사는 앞으로 뿌리째 흔들리는  이 나라를, 함께 끌어갈 수 있는 정신문화를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연재 제3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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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연재 제7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제약회사 입사 7년 만에 당초 입사 시 자신과의 약속대로 사표를 던졌다. 젊은 혈기에 더 큰 시장에 도전하고 싶었다. 1988년 당시 노태우정부는 대통령 공약대로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을 밀어붙였는데, 이 건설붐에 편승해 1989년 경남 양산에서 건축자재 제조업에 손을 댔다.   부동산 활황기에 좀 더 큰 시장을 겨냥했고 무엇보다도 평소 존경하던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의 건축업 성공스토리를 본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건축·건설자재 품귀현상이 빚어질 때였다. 시멘트의 경우는 품질은 묻지도 않고 중국에서 마구잡이로 들여올 정도였다. 집을 지으려니 많은 콘크리트가 필요했고 그래서 산을 깎아 자갈을 채취하여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그 당시 동일 업종에 손을 댄 사람치고 돈을 못 번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창업한 지 3년 만에 큰 성공을 하여 연간 매출액도 60억에 달했다. 그러나 건설경기가 하락하자 어음은 늘어나고 더욱이 어음기간도 늘어 운영자금을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중국합작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합작을 위해 두 차례 방문하여 합작의향서를 교환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귀국하는 날 태풍의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현장공장이 매몰된 게 아닌가. 산을 깎아 공장을 지었는데 호우로 인해 절단면이 무너지며 사일로, 중장비창고, 컨베이너 벨트 시설 등을 덮쳐버린 것이었다.   하늘이 무심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서의 사업을 못 하게 미리 막아준 것이라 생각을 하고 아쉬움을 달래면서 하늘에 감사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중국 사업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현실적으로 간신히 이끌어가던 사업도 자재대금에 대한 현금결제가 3개월 어음에서 6개월, 10개월 심지어는 1년으로 늦춰졌다. 1992년 초 급기야 받아 쥐고 있던 어음 53억 원이 부도가 났다. 참담했다.         시작 3년 만에 살던 주택과 현장 생산시설까지 소위 빚잔치로 전부를 넘기면서 부채를 정리했다. 남은 500만 원으로 소형주택의 방 한 칸을 얻어 보증금을 걸고 월세를 주기로 하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부채정리를 하고 손에 남은 것은 단돈 500만 원 정도였으니 문자 그대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것이다. 억장이 무너졌지만 가족들을 이끌고 전세방을 얻었다. 집은 좁고 겨울에는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바깥 날씨가 영하로 떨어질 때는 아이들을 중간에 두고 양쪽에 집사람과 내가 누워 서로의 체온으로 냉기를 이겨 내어야만 했다.   부도소식을 전해 들은 건설회사 여기저기에서 임원으로 합류해 달라는 부탁도 있었지만 이미 무너진 건설경기는 쉽게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더 이상의 미련과 후회는 가지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며 필자는 “송충이가 갈잎을 먹으니 처음에는 너무 맛있었지만 결국 배탈이 났다.”고 뉘우치며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연재 제8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인물
    2022-05-18
  • 박명인 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의 '도식론 1'
          [글로벌문화신문] 일반적으로 도식이란 다이어그램과 같이 복수 항목의 관계나 사물의 커다란 윤곽을 나타내는 소묘를 말하지만, 철학적·미학적 개념으로서의 도식은 대상의 지각과 산출에 의한 정신의 규제적인 원리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어의 경우에 전자를 le schéma(도식), 후자를 le schéme로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개념은 원래 전자를 후자에 적용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복잡한 사상(事象)에 대해서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복수 항목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다이어그램을 쓰는 것은 그 현상을 분석하고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며, 그러한 전체상(全體像)을 얻어서 처음으로 그 현상을 하나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라첼리에(Jean Lachelier, 1639-99)는 도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도표를 그릴 때 상상력 안에서 순수한 경향의 상태에서 찾아지는 규칙’ 미학에서 이 개념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은 레이먼드 바이엘(Raymond Bayer)이 효시다. 그는 ‘도식현상(schmatisme)’으로서 문체ㆍ공통 토포스(topos)ㆍ카논(canon)ㆍ유형 등을 채용하고, 그 특징을 구체적 보편에 의해 독특한 고차원적 감수성이라는 점을 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예술현상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의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체험은 항상 다른 것으로 통하는 보편적 특질을 전개해 간다는 것이다.    도식은 구체적인 개별적 경험을 보편적인 개념으로 다른 개별적인 표현에 매개하는 것이다. 래이먼드 바이엘은 결과로 얻을 수 있었던 표현을 도식적인 것만을 채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도식이 움직이고 있는 장소는 넓다. 인간의 창조는 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소여(所與)로 변형하는 것이다. 도식이란 단적으로 인간적인 창조적 상상력의 형이 아니면 안 된다.   개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보편성이 있는 표현에 통로를 개척하는 예술가의 감수성은 독특한 것이며 보통 지각과 무연(無緣)한 것이 아니다. 그 메커니즘을 생각하는 동시에 칸트를 참조해야 한다. 칸트야말로 도식의 구조를 처음으로 지적하여 이론화한 인물이다. 그는 선험적 감성론이란 감각적 지각이 어떻게 성립하는 것인지를 해명하려고 했다.    이 문제는 고전적인 것으로써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질적인 두 개의 실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다시 말해, 인식하는 것은 정신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물적 대상을 지각하는 경우, 컵이 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대상을 어떤 의미에서 정신화하지 않으면 자기와 동화될 수 없다. 이 동화에는 정신의 능동적 작용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우선, 물적 대상에 한하지 않고 인식인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신이 능동적인 형식으로서의 카테고리(순수오성개념)라는 것을 내세웠다. 그것은 일종의 규제적인 틀이며 대상이 제어될 때 처음으로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양ㆍ질ㆍ관계ㆍ양상의 네 가지에 대해서 각각 세 개의 규정성이 상정(想定)되고 있다. 그러나 카테고리는 순수개념오성이며 감각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 대상을 알게 되는 경우에 직접 이것을 감각소여에 적용할 수는 없다.   거기에서 감각소여와 카테고리를 이어 나가는 제3자, 다시 말해, 지성적인 것과 동시에 감각적인 것으로서 칸트는 선험적도식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시간의 형식 안에서 이 도식의 활동을 인정하고, 네 개의 카테고리의 각각에 대해서 도식을 규정했다(시간의 계열, 내용, 순서, 총괄). 따라서 도식이란 정신이 물적 대상에 제의하는 이른바 정신화하기 위한 능동적 원리이다.   문제는 지각론이 아니라 도식의 개념이다. 칸트에 의하면 순수한 감각적 개념의 근저에 있는 것은 대상의 상(Bild)이 아니라 도식이다. 예를 들면, 삼각형의 경우 각도나 변을 비교하면 수없이 많은 것이 있어서 서로 다른 상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 대한 도식은 개념과 상의 중간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 즉, 단순한 개념(3변을 가지는 다각형)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려 내고 있지만 특정한 각도나 변의 비교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삼각형에 해당된다.   이 의미에서 도식은 감각적 대상과 개념을 매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식없이는 눈앞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 보는 네발 동물을 아마 동물로서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이미 동물의 도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개(犬)라는 같은 종류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은 그 수준에서의 도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이것을 도식이라고 하지 않고 이미지라고 부를 때가 많다. 그러나 감각적인 상이 아니라 상당히 개념적인 표상으로서의 도식이다.   칸트가 문제로 하는 것은 이러한 개별적인 도식이 아니라 선험적 도식이다. 그것은 각각의 도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그것과 달리 예술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칸트의 도식보다도 개별적인 수준에 있다. 그래도 칸트의 구상은 예술의 경우에서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 대상을 지각하여 이해하는 것이 결코 단순한 수동적인 프로세스(process)에서가 아니라 정신의 능동적인 관여가 전제되어 도식이 거기에서 대상에 적용되는 정신의 규정적인 계기라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지각의 능동적 형식으로서의 도식에 대해 잘 알려진 것으로 곰브리치의 설이다. 그가 말하는 도식은 심리학으로부터 차입된 심리구조(mental set)의 형태라고 생각된다. 이미 파장을 맞는 수신기를 가져서 그들 미술가의 작품에 임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상술(上述)한 바와 같이 기대의 수준을 심리구조라고 칭하고 있다.    ‘심리적 구조란 정확하게 말하면 투사개시의 준비가 갖추어진 상태, 혹은 지각의 주변에 언제나 명멸하고 있는 환상의 색이나 환상 이미지의 촉수를 밀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즉, 지각의 선별작용을 하는 독자적인 태세다. 개인적인 것도, 또한 시대의 규정에 의한 것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작품의 경향으로서의 양식과 같다.   곰브리치의 사상에는 독창적인 것은 없다. 도식의 사고방식을 미술의 장면에 적용한 것에 새로움은 있어도 지각이론이나 도식개념에 혁신을 초래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강점은 무엇 보다도 도식에 관한 풍부한 실례를 채용해 보도록 한다.       고래 판화, 16세기 말 ~17세기 초       MILLEFLEURS: 도식적인 꽃과 동물, 15세기,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두에 그려진 고래(鯨) 판화 2점에는 진짜 고래에는 없는 귀가 그려져 있다. 그것은 화가가 귀를 착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16세기 중간쯤 독일의 신문에 실린 로마의 조망도 성·탄제로 성에는 급경사 지붕의 목조가옥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로마가 성새도시(城塞都市)라고 생각한 화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독일의 성새도시를 모델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는 상당히 황당한 것이지만 언뜻 보면 완전히 사실적이라고 보이는 그림조차 왜곡을 보게 된다.   17세기의 화가 마테우스·메리안이 그린 파리의 노틀담 측면도는 언뜻 보면 충실하게 재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큰 반원형 창문을 가진 좌우 대칭의 높은 건물’이라는 사원관(寺院觀)에 따라 현실의 모습이 개변(改變)된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오른쪽에 치우쳐 있는 대문 좌우 쪽에 잇대어 지은 행랑을 중앙에 두고 있다.   이것들의 예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미술이 개념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회화는 결코 자연적 기호가 아니다. 순수한 사실묘사라고 말하기 쉽지만 실제로 불가능과도 같다. 그것을 위해 타인의 지적을 받아 수정을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나아가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곤란해도 초등도식(initial schema)를 선택하고, 이것을 과정으로 묘사하는데 순응하는 수 밖에 없다.   그 미술가는 시각적 인상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이라든가 개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고래를 그린 화가는 반드시 귀가 있는 동물의 머리를 표상하는 도식을 가지고 있고 로마를 그린 독일 화가도 성새도시의 도식에 있어서 성에는 급경사 지붕이 딸려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또한 노틀담 화가 메리안도 대성당은 좌우 대칭이 아니면 안되었다. 어떤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일반적인 이미지, 즉 도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화가는 그 도식을 출발점으로 만드는 것과 맞추는 것(making and matching)에 의해 작업을 진행시켜 간다. 초등도식(初等圖式)은 관찰하는 것도 불가결하다. 그것이 특히 작품해석에서 채용할 수 있었던 것이 mental set·swap allocation table인 것은 위에서 본대로다.   기대를 갖지 않고 관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며 과학에 있어서 조차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칼·포퍼(Sir Karl Raimund Poppe)가 역설한 것과 같이 모든 관찰은 자연에 대한 질문의 결과이며 시도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칸트가 ‘요소적·원리적인 수준으로 함께 이야기한 것, 지각에는 정신이 능동적인 관여가 전제되어 있는 것, 그리고 이른바 정신에 있는 것 밖에 볼 수 없다,라는 것의 옳음이 보다 유의미한 구체적인 활동에서 확인됐다고 말할 수 있다.     스위스의 지도 제작자인 마테우스 메리안이 1615년에 판화로 만든 파리 지도(메리안 지도).              퐁 뇌프 다리. 다리 뒤쪽 시테섬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곰브리치에 있어서는 지각 혹은 해석의 장면에서 ‘mental set’가 창작의 장면에서는 도식이 각각 별개로 논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도식은 창작의 장면에서 작용하는 규제적인 원리이지만 고래(whale), 성새도시, 카테드랄(cathedral, 대성당)은 모두 표상의 왜곡된 예이며, 창조성이 생각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들의 도식이 기능하는 실태는 과거 경험의 집적(集積)에 의해 형성된 기대 혹은 예측에 의한 지각의 규제라는 성격이 강하다. 그것에 대해 참으로 창조론으로 기능하는 도식을 생각한 것으로서는 베르그송의 ‘역동도식(Le schéma dynamique)’이 있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말하는 역동도식이 무엇인가 말하자면 그 자신이 거론하고 있는 예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상기하려고 할 때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목구멍에서 나오려고 하는 그 느낌에 주목하는 것이 좋다. 이 목구멍에서 나오려고 하는 느낌이 그 이름의 역동도식과 같은 것이다. 베르그송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기나, 설교사가 그 텍스트의 전체를 암기할 때의 메커니즘, 그위에 창조적인 예술가의 발상 등을 ‘지적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기억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상기하는데 노력없이 기계론적인 암기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말이 나오는 것 같은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상기에 손이 간 것이 있다. 역시 긴 문장을 기억할 경우를 예로 든다면 기억술의 서적이 가르치고 있는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다. 문장을 조심스럽게 읽고 그 다음 내적인 조직을 생각하고, 단락 또는 부분으로 나눈다. 거기에서 전체의 도식적인 겨냥을 할 수 있고, 그로부터 이 도식의 내부에 가장 두드러진 표현을 끼워 넣는다.   그리고 상기할 때는 반대로 이 추상적인 골조에 구체적인 말을 복원해 가는 셈이어서 거기에는 이미 어느 정도 창조적인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이 도식적인 도(圖)이며, 그 기억의 요체는 모든 관념, 모든 이미지, 모든 단어를 단순히 한 점에 집약하게 한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 응축된 많은 이미지에 전개할 수 있는 단순한 표상을 가리켜 베르그송은 역동도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개념에 관해서 두 가지가 문제 된다. 우선 이 명명에서 베르그송은 ‘그리스어를 수용해’거절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어의 의미를 담아’라는 의미일 것이다. schéma도 dynamique도 함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단어이며 이 단서는 어느 쪽에도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모양을 의미하는 schéma는 특수한 의미로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한정하고 있는 dynamique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역동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러면 그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문맥에 있어서 베르그송이 ‘기타의 일절이 잔돈(monnaie)에 지나지 않는 기본화폐(piece)라고 하는 비유를 채용하면서 그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어의 dynamis에는 화폐의 가치의 의미가 있다. 이 의미를 거론하면 schéma dynamique란 고가치의 도식이라고 말하게 된다. 또 하나는 철학용어로서 친숙한 세태라는 의미다.   그 가운데에서 단어의 기본적인 어의로서의 계기는 당연히 은폐된 상태로부터 확실히 현현(顯現)해 가는 현실화의 경향에 있고, 이것도 또한 베르그송의 역동도식의 성격으로 타당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현실화하려고 하는 도식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은 어석(語釋)에서는 대립하지만 사상적으로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역동도식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그것 자체가 현실화된 다이어그램이 아니라 세태적인 규제적 원리라면 왜, schéme가 아니고 schéma일까? 이것이 제2의 문제이다. 사실은 베르그송에서는 유사한 개념이 또 하나 있다. 즉, 운동적 도식(le schéme moteur)이다. 이것도 또한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며 말을 들어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운동적 도식에 의한 것이다.   청각적 인상은 단순한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말의 움직임을, 즉 ‘초동적(初動的)인 근육감각(sensations musculaires naissantes)으로서의 듣는 말의 운동적 도식’을 듣는 사람 안에서 산출한다. 다시 말해, 운동적 도식도 현실화를 촉진시키는 원리이며, 역동적 도식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방향이 schéma에서 다른 방향으로 schéme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단지 각각 붙일 수 있었던 형용사의 성질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개념상의 구별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베르그송이 이 두 가지 도식을 어떻게 표상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에 유래하는 것이 틀림없다. 역동적도식 쪽은 전체를 응축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전체가 잠재적으로 그 곳에 있으며 그 의미에서 전체상(다이어그램)을 인정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운동적 도식 쪽은 시간적으로 전개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상이 그 곳에 있으면 빛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것을 현실화해 가는 힘이라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예술창조를 생각하면 이 두 가지 도식을 공간적ㆍ시간적이라는 존재 위상의 차이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근본적인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베르그송은 역동도식을 발명이나 예술창조에서 인정하고 있다. ‘소설을 만드는 작가, 극중인물이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극작가, 교향곡을 작곡하는 작곡가, 시인은 처음에는 정신적으로 단순하게 추상적인, 즉 비물체적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음악가나 시인에 있어서는 소리나 이미지에 전개해야 할 새로운 인상(印象)이다.    또한 소설가나 극작가에 있어서는 사건으로 전개해야 할 명제, 살아 있는 인물에게라도 구체화해야 할 개인적 혹은 사회적인 감정이다. 그들은 전체를 나타내는 도식에 조작을 가하고 판명한 제 요소의 이미지에 도달했을 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역동도식이란 보통 작품의 이미지라고 불리는 맹아(萌芽)이다. 그 맹아는 스스로 전개하려는 힘을 내포하고 있는 역동성이 예술가에 대해 현실화를 촉구한다. 예술가에 있어서 이 맹아는 마치 상기할 수 없는 이름과 같이 막연하게 취할 수 없는 것이면서 명확한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도식의 역동성으로 움직임으로 해서 시행착오(making and matching)를 되풀이해서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 때, 이름을 상기하는 것과 같은 경우와 다른 한 점이 있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상기하는 경우, 역동도식의 내실은 그 이름을 상기한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예술창조의 경우, 전개의 프로세스는 엄밀한 의미로 창조이며 단순한 전개나 현실화가 아니다. 다시 말해, 작품의 맹아는 완성된 작품에 고정할 수 없다. 창조의 과정은 당초 역동도식 바로 그것의 변경을 수반해 간다고 생각된다.   한편 베르그송의 개념을 예술철학에 있어서 앙리·구히에(Henri Gouhier, 1989-1994)가 구체적인 플롯(plot, 구성)에 전개해야 할 극적 행동(action)을, 또한 에티엔 수리오(Etienne Souriau)는 극적 상황을 역동도식으로 논한 예가 있다.   베르그송의 역동도식은 그 창조성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Kant)나 곰브리치와 같은 지각의 장면에도 적용되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수용의 기능적 도식이 창조의 원리에 전환되어 가는 사실을 설명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배르그송은 지적노력(知的努力)으로서의 지식해작용(知識解作用, intellection)을 논한다. 글을 읽거나 말을 듣거나 해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수학의 증명을 풀어가는 경우와 같으며, 단지 받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떤 계산을 풀어 갈 때, 스스로 그것을 하고 있지 않으면, 풀어 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문제를 자신이 풀고 있지 않으면 그 문제의 해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읽을 때나 들을 때도 일부분 밖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나머지는 기억에 의해 보완하게 된다. 외국어 단어를 듣고 알지 못하는 것은 이 보완 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각은 기억만으로 점점 좋아질 수 없고, 명확한 형을 취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해작용(解作用)도 또한 잠세적(潛勢的)인 도식에서 지각적 이미지로 옮겨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결론한다. 이러한 고찰을 근거로 최후에 베르그송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조의 노력이 도식으로부터 구체적 이미지로 전개하는 것을 논하고, 수용과 창조를 포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극을 받을 때에 이미 능동적인 관여가 시작되고 그 발전 안에서 창조가 행하여지는 셈이다.   그 사상은 크로체(Benedetto Croce)의 직관=표현설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보다 구체적인 설명의 가능성을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생(生)의 수동적 측면이 능동적 측면으로 전개해 가는 다이너미즘(dynamism)을 상당 정도까지 해명하고 있다.   
    • 컬럼/인물
    2022-05-11
  • 연재 제1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나막사 김현풍 총재     [글로벌문화신문] ‘막걸리, 민족의 혼을 빚다’ 지금 제일 힘들고 고달픈 때입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나막사(나라사랑 막걸리사랑)’라는 이름 아래 모인 모두가 국민에게 기를 불어 넣고 다시 한 번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함께 만들었으면 합니다.   비극의 역사 일제가, 내선일체를 말하며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했던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민족의 얼과 혼, 기를 꺽기 위한 일제의 만행은 지명의 변화로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일종의 창씨개명과 같은 것이지요. ‘홍성’은 본래 ‘홍주’와 ‘결성’ 이었던 두 곳의 글자를 합쳐 기를 꺽은 경우이고, 인왕산(仁王山)도 王 자를 旺 자로 바꾸어 사용하여 마치 일본의(日+王)을 뜻하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의왕시의 ‘왕’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속리산의 천황봉도 본래 천왕봉인데 일제가 천황봉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일본 천황을 가르키는 황皇 자를 쓴 것이었지요. 그 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 일제가 특히 집중했던 곳이 있습니다.   삼각산    많은 분들께서 ‘북한산’이라고 부르는 산입니다. 이 이름은 1915년 일제에 의해 바뀌었던 이름입니다. 본 이름은 ‘삼각산’입니다. 동시에 청와대 뒷산인 ‘백악산’도 ‘북악산’이 되었습니다. 왜 일제는 산의 이름을 굳이 바꾸었을까요? 이 두 산은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맥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경복궁을 비롯한 모든 터잡기의 기본은 풍수에 의한 것이었는데, 백두산의 정기가 조산(祖山)인 삼각산을 타고 내려와 주산(主山)인 백악산을 지나면 경복궁 위치에 다다릅니다. 이렇게 흐르는 민족의 정기를 끊어 놓고자 이름을 바꾼것이지요.   그러니 삼각산과 백악산의 이름을 제대로 되돌려놓지 않으면 나라가 잘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일제가 바꾸어 놓은 북악산에 사용했던 ‘북’ 자는 북망산천(사람이 죽어 묻히는 곳)의 ‘북’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가 꺽여 계속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저는 2005년 강북구청장 재임시절 문화재청으로부터 삼각산과 백악산을 명승 제10호로 지정 받아 놨습니다. 그리고 산림청으로부터도 자정을 받아놨습니다. 그런데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뭘가요?   지명을 이렇게 고착화 시켜 놓은 것은 식민사관의 친일 사학자들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는 친일 사학자의 후손과 제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습니다. 날로 번성 하고 있고요.       그들이 지명을 바로 잡게 되면, 스스로 친일을 했다는 반증이 되므로 북한산, 북악산의 명칭이 일제 잔재가 아니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류 사학계가 이런 실정이니 재야 사학자들의 외침은 묻힐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요.   북한 노래 가사 중에 ‘모란봉에서 삼각산까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전에 개성공단에 남한 사람이 가서 ‘북한 산 잘 보인다’고 했더니 북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북한산은 북한에 있는 산이고 그 산은 삼각산입니다.” 망신스러운 일입니다.   오히려 이런 면에서 북한은 철저하게 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혀 손도 못 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3.1운동의 항일정신을 잊고, 중요한 일을 해결하지 못한 부끄러운 후손이 바로 우리입니다.   연재 제2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인물
    2022-05-08
  • 연재 제 6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굴지의 제약회사에서 톱 세일즈맨이 되다   열심히 1년을 재수하여 대구에 있는 대구고등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후일 알았지만 깡촌의 시골중학교에서의 학업실력과 대구의 일류 중학교 같은 학년과의 학업실력은 엄청난 차이가 났다.   대구에 유학하면서 타 고교의 학생과 사귀게 되었는데 고교 2학년 때 하루는 그 친구가 영어 시험지를 좀 봐 달라고 했다. 그 친구의 학교는 그 당시 등록금만 내면 합격하는 만년 미달의 3류 고등학교였는데 영어시험지가 적어도 필자의 눈에는 중학교 3학년 정도의 문제였으니, 창피한 소리이지만 옛날의 칠곡의 깡촌 중학교에서 ‘잘해 봤자’였던 실력이었던 것이다.     1982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몇 군데 응시한 대기업 입사시험에서도 수차례 고배를 마셨다. 우여곡절 끝에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에 면접을 보게 됐는데 늘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기에 거의 포기한 심정에서 할 말이라도 좀 하자고 마음을 비웠다.    최종 면접에서 회장 내외분과 사장이 임석한 가운데 회장님이 ‘술을 잘 하느냐’ 고 물어 왔다. “막걸리는 배불러서, 소주는 취해서, 양주는 돈이 없어 못 마십니다.” 라고 했더니 껄껄 웃으셨는데 결과는 합격이었다.   필자는 우선 앞으로의 계획으로1. 7년 안에 ‘톱 세일즈맨’이 된 뒤 퇴사2. 짬나는 시간을 이용해 석사학위 취득3. 영어·일어 학습 뒤 해외영업 진출 등 3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 필자는 입사 지원 시 마케팅부서로 내근직을 지원했다. 2년여를 마케팅 부서에서 PM직을 수행하다가 생각을 바꿔 영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영업사원으로서 상기의 목표 달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무엇보다 최고의 세일즈맨이 되겠다는 현실적 목표가 필자에게 더 많은 추진력을 보태 주었다.   예를 들어 세일즈를 하면서 영업회의 시 월간목표를 발표할 때 남들은 대개 200이라고 할 때 필자는 보통 800이라 말하여 회의실의 사람들이 수군거렸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다음 달 결산회의 때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져 있었다.   보통 다른 영업사원들이 200의 목표를 세워놓고 180을 하여 90%의 실적달성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800의 목표를 세워 70%인 560의 실적을 올렸으니 소위 달성률은 낮았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3배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코웃음 치던 영업부에서도 이런 실적이 몇 번 계속되자 모두들 필자의 영업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필자는 맨 먼저 시내의 약국을 방문하여 시장조사를 철저히 하여 모든 실제적 수치를 가지고 영업에 임하였다.    실적도 덩달아 올랐다. 5년 만에 회장보다도 표면적 월급은 더 많이 받았다. 세금도 더 많이 내는 톱 세일즈맨으로 사보에 2년 연속으로 게재되기도 했다.   한 가지 기억나는 일이 있다. PM시절, 우리 회사에서 필자가 만든 소화제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자연 필자의 업무도 많아졌다. 더 많은 실적을 위해 지방출장이 잦았는데 그 당시 새마을 열차를 타고 가곤 했다.    서울을 좀 벗어난 소도시의 철로변 전봇대에 소화제 광고가 몇 십km를 가더라도 연달아 붙어있어 아주 흐뭇했던 기억이 있다. 소화효능이 좋아 이미 국민소화제가 되어 있었던 바로 그 대웅제약의 베아제이다.   연재 제7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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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7
  • 김현풍 나막사 총재(의학박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책" 연재
    [글로벌문화신문] 나라사랑 막걸리사랑(나막사) 책은 2017년 9월 23일에 발간 되었다. 신간서적은 아니지만 우연한 기회에 책을 읽어 보고 내용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이 좋은 반면에 많은 독자들이 나막사 책을 모르고 있는것 같아  이 책을 다시 한 번 홍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저자와의 협의하에 신문에 연재를 하기로 하고 추후 내용을 첨삭하여 개정판을 출간 하기로 했다. 저자인 김현풍 나막사 총재는 현재 80의 고령의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미아동 미아사거리에서 치과의원을 운영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현풍  나막사 총재 김현풍 총재의 경력은 화려하다. 본업인 치과의원을 운영하면서 국가관도 투철하여 도봉문화원장, 강북문화원장과 민선 3, 4기 강북구청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많은 지역민들을 만나며 막걸리 한 잔을 벗삼아 서민들의 어렵고 힘든 고통과 애환을 현장에서 경청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 민족 고유의 술이자 서민적인 "막걸리"에 대해서 남다른 애정을 가질 수 박에 없었다.   이 나막사책은 "우리민족 고유의 술인 '막걸리'가 무엇인지, 그 안에 함축된 민족의 정신과 애환, 막걸리가 우리 몸과 건강에 어떻게 좋은지를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막걸리의 비밀 등을 알려주고 있어 막걸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나막사는 우리의 얼과 정신이 담긴, '민족의 술' 막걸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국가의 전통주인 '국주(國酒)'로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 지구촌의 대표적인 주류문화를 보면 독일의 맥주, 프랑스의 와인, 일본의 사케 등이 있듯이 우리 민족 고유의 막걸리를 '문화'와 함께 성장하는 세계적인 국주(國酒)로 만들기 위해 그 정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다. 나막사에서는 확고한 목표를 설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우리 막걸리에 문화를 입혀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나라 사랑의 디딤돌로  삼을 것이며, 문화가 담겨있지 않은 제품 위주의 세계화를 지양하고 막걸리를 한국의 문화유산으로 인식할수 있도록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또한 세계인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막걸리에 대한 문화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고, 막걸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사화적 관심을 촉구 할 수 있도록 캠페인을 전개하게 될 것이다. 특히 올바른 음주문화를 정립하여 한국의 전통적 풍류를 즐기고, 막걸리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막걸리와 더불어 한국의 맛을 찾아서 전통의 맛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 하고 있다. 나막사모임은 2019년 1월 24일에 인사동 자희향이란 막걸리 전문점에서 첫 모임을 시작으로 3개월 주기로 치협동호회 모임으로 출발했다.    2020년 코로나19사태로 인해 소규모 정기모임만 가졌으나 앞으로 각 분과별 각계 각층의 인물들과 함께하는 단체로 성장 할 것을 기대하며, 이 나라사랑 막걸리사랑(나막사)에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면서 "글로벌 문화신문"에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 제 1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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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7
  • 한국미학연구소장 박명인 컬럼, '예술과 자연환경'
        박명인 컬럼 (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 하이데거(Heidegger)는 ‘근대의 학문은 특정한 대상 영역에 기초를 두고 개별적 학문으로 분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M·Heidegger, a,a, O.〉 이것은 일체 근본으로서의 인간(근대적 주관이 물리학에서는 질점(質點)의 운동, 화학에서는 원자간의 상호작용 등)에 따라 개별적 학문영역을 투기(投企)하고, 그 학문영역에 있어서 각각의 개별적 학문이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 경우에 물질이 세분화되는 만큼 학문의 인식은 전문화하고 정밀하게 된다. 따라서 정밀한 인식을 추구하는 근대의 학문연구는 점차 자율적인 개별학문으로 분화하게 된다.   예술도 또한 근대에서는 칸트가 예술영역을 인간의 마음의 활동(판단력 및 쾌·불쾌의 감정)에 대응시켜 규정한 특정 대상 영역(미적 영역)을 기초로 하는 정신적 당위(當爲)로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대상 영역에서 예술의 자율성이 보증되어 그 영역이 시각적·청각적·촉각적 등의 영역으로 개별화되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투시도법은 외적 자연에 대한 인간의 시각적 관계를 화면에 묘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합리적으로 일치된 화면구성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외적 자연 대상의 시각적 표현활동으로서의 회화적 자율성 원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근대예술의 역사발전 과정에 있어서 이 투시도법이 회화에 자율성을 보증함으로써 도리어 존립성을 잃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자율성을 획득한 근대회화가 회화로서의 자율성을 추구할 때 현실적 자연공간 묘사의 수학적·합리적인 구성원리로서 투시도법보다 회화의 한층 본질적인 요소로서의 화면구성이 회화표현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동시에 투시도법은 필연적으로 후퇴하게 되어 자율적인 추상회화가 외적 자연묘사를 회피하게 되어 완전히 그 의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시도법을 본질적인 구성원리로 하는 풍경화는 그것 자체 풍경화의 종언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 이 사태를 명료하게 나타내는 사례에 대해서 회화의 본질을 추구한 현대회화의 선구자 세잔(Paul Cezanne)과 모네(Claude Monet)의 후기 작품에 대해서 각각 하나씩 증언을 이끌어 내 보기로 한다.                                              수련연못(Water Lily Pond), 100.4*201, 1919, 끌로드 모네(Claude Monet)   (1) 세잔의 풍경화는 일반적으로 현실풍경으로서는 공간이 좁고 작으며, 앞쪽 경치를 축소하여 안쪽으로 향하는 선의 수도(收斂度)의 소멸 등에 의해 과학적 투시도법의 공간구성 상태가 약하다.   약해지게 만들고 있는 한층 보편적·기초적인 요인은 색반(色斑), 터치에 있어서 대조의 정도가 평온해진 화상의 소구조(小構造) 형성 방법에 있어서 소구조에 의한 투시도법의 상태가 약해지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폐기되어 추상회화로 한 걸음 다가선다.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회화에 있어서 화면구성에 관해 이 소구조만큼 강렬하게 과학적 투시도법을 놀라게 한 것은 없다.   (2) 오랜 유럽의 클로드·로랭(Claude Lorranin)의 장대한 풍경화와 모네나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후기 작품 사이에는 알려지지 않은 심연이 입을 열게 한다.   예를 들면 모네의 1884년의 풍경화 《레몬 나무와 들판》은 색반의 연속체를 위해서 이 색반은 사물과 거의 같은 작품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래도 아직 눈과 화상(畵像)과의 거리가 지평선의 좌표에 의해 보증되고 있어서 여전히 풍경화라고 부를 수 있다. 수련(1918-25년)》에서는 이미 공간이 견고한 골조를 보증하고 있어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조자의 좌표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해서 자연은 원시적인 자연력이 상호 작용하는 모든 부분(물·빛·식물·천공)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영역이 된다.  관조자는 자연을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조형적 배치의 일부가 된다. 이것에 의해 이전 풍경화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바꾸어 지고 있다.   여기서 풍경화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고찰에 의하면 자연공간의 투시도법적 형성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관조자는 ‘자연과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있다’고 할 때 투시도법적인 풍경의 형상은 이미 소멸되고 있다.   그러나 관조자가 자연 안에 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떤 자연일까? 그것을 ‘능력 생산적 자연’이라고 부르고 현대에 있어서의 자연의 화상(畵像)을 ‘능력 생산적 자연의 등가물’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주관에 의한 과학기술적ㆍ산업사회적 당위가 우리들의 생존환경에 초래한 자연환경의 오염과 파괴에 직면할 때 예술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하여 그러한 소박한 견해에 만족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물론 인간은 능력 생산적 자연의 일부이지만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그 자연을 내부에서 침해하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의 예술과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할 경우에 이 사태를 무시할 수는 없다.   단지 자연경관의 보전과 도시환경의 디자인에 예술과 자연과의 적정한 관계만으로는 근대적 주관의 합리적인 논리적 대상의 인식이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단지 능력 생산적 자연의 등가물로서 자연의 생명이나 에너지를 직관하게 할뿐만 아니라 현대에 있어서의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바로 그것을 감성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어떤 예술작품일까?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흘러내리는 아스팔트(Asphalt_Rundown), 1969                      리차드 롱(Richard Long), 걷는것에 의해 만들어진 한개의 선(A Line Made by Working), 1967    인간과 자연과의 부정적인 관계와 긍정적인 관계를 각각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대지미술로 저명한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1938-1973)의 《흘러내리는아스콘》와 리차드 롱(Richard Long, 1945-)의 《걷는 것에 의해 만들어진 한 개의 선》을 예로 들 수 있다. 전자는 도회의 한구석에 방치된 자갈이나 진흙의 퇴적물 위로부터 덤프트럭에 적재된 아스콘(asphalt concrete)을 흘려 떨어뜨리는 작품이다.   그 검은 점착성 물질은 부란(腐爛)한 비탈진 사면에 쏟아 부어 천천히 흘러내리며 침식되어가는 작품이다. 마치 엔트로피(entropy) 증대의 양상을 보이듯이 점차로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정지하게 된다.   산업용재로서의 아스팔트는 석유정제의 잔재로 입수되지만 천연의 지층에서도 찾아내 진다. 스미슨 자신은 작품을 통해서 산업자원의 낭비나 생태계의 보호 등에 대하여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현대 아스팔트의 하이웨이가 엔트로피의 증대를 향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함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R. Hobbs, Roert Smithson ; sculpture,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81)   후자는 ‘들판을 사람들이 오가는 동안에 평평한 풀밭이 햇볕을 받아 하나의 선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그것은 대지와 풀과 햇볕과 인간으로부터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그 이외의 재료는 필요 없고 대지를 침해할 일도 없다. 그러나 다른 시간, 다른 기상 조건, 다른 정신상태에서 걸으면 그때마다 대지 위에 다른 풍경을 연출하게 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고정된 객체로서 세계의 부가물이 아니다. 걷고 있는 동안 만들어지고 있는 그 작품도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을 가지고 있지만 영원불변한 형은 아니다. ‘보행자의 발자국은 대지의 표면을 가로질러 가지만, 대지가 그 보행을 받아들이며 형체를 옮겨 가고 있는 것이다. 대지는 예술작품의 길동무가 되고 예술작품이 세계를 향수할 때에는 대지도 또한 예술작품과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R. Hobbs, Robert Smythson; New York; Cornell Unoversity Press, 1954.) 자연 환경. 그것은 단순한 능력 생산적이며 단순한 소산적 자연도 아니고 대상화된 풍경으로서의 자연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다른 생물과 함께 그 안에서 출생하여 거기에 의존하며 그 안에 살고, 그 안에서 죽어 가는 곳, 인간이 그것을 풍요하게 하거나 황폐하게 하면서 어떠한 형태로 그것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남겨 가는 곳이다.    이 환경이 인간에 의해 오염되어 파괴된 상태로, 혹은 인간과의 친화적 상태로서 스스로 그 일부가 되어서 눈으로 보이도록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스미슨이나 롱에 의해 실천하고 있는 환경예술이다. 이러한 환경예술을 종언하고 있는 근대풍경화를 현대예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를 개시하는 현대예술을생기하면서 예술의 본질을 사고해야 할 미학도 환경미학으로서 기술과 같이 단순한 경관 보전이나 도시환경 디자인의 미학이 아닌 근대과학기술의 지배 하에 있는 현대환경에 있어서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근원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컬럼/인물
    2022-04-12
  • 연재 제5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글로벌문화신문] 이 당시에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 중에서 일부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친구는 실업고교에 장학생으로 가고 집안이 부유한 친구들은 일류 인문계 고교에 가는 것으로 대개 진로를 결정하고 있었다.    이때 필자는 상업계 고등학교로 진로를 정하고부터 걱정은커녕 그런 곳은 눈 감고도 들어갈 수 있다는 자만심에 소위 껄렁한 친구들과 휩쓸려 다니면서 여자애들을 만나고 노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렇게 신나게 보냈던 시간들이 시험을 치루기 이틀 전까지 계속되었으니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시험을 치르면서도 지금까지 놀던 말초적인 행위의 짜릿함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 뿐 제대로 문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마음을 추슬러 봐도 정신이 이미 마음을 떠난 듯 혼란스러웠다. 시험 결과는 당연히 반들반들한 미끄럼틀에서 신나게 미끌어지듯 시원하게 불합격이었다. 결과를 받아 들고는 마약에 취한 사람처럼 단지 몽롱할 뿐이었다. 주위의 다른 친구들의 사정을 알아보니 실업고에 장학생으로 간 친구들은 100% 합격이었다. 그러나 일류 인문계 고등학교에 응시한 친구들은 모두 불합격이었다. 그때 필자 마음속엔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란 말이 있듯이 묘하게도 친구들의 불합격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말이 위안이지 본인이 고교진학에 일차 시험에 실패했으니 창피해서 누구에게도 얼굴을 내밀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연이어 2차 시험을 위한 원서접수를 했으나 조금도 반성 없이 지금까지의 방종하게 놀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아무 준비도 못했으니 2차 시험 결과도 처참한 불합격이었다.       다시 소문을 들어보니 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공부 잘한다는 친구들 모두가 필자처럼 2차에서 불합격하였다. 사실 깡촌과 대도시 학생들의 학력 차이였건만 이번에도 역시 친구들의 불합격이 필자에게는 구세주가 된 것처럼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친구들도 필자처럼 생각했는지 모르겠으나 왠지 창피한 마음이 들어 쑥스러웠다. 이후 경제적으로 부유한 부모님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친구들은 재도전을 위해 우수학원에 적(籍)을 두고 재수의 길을 준비했다. 그러나 필자는 1, 2차 모두 낙방을 했으니 패잔병처럼 풀이 죽어 귀향길에 올랐다.   집에 돌아와 한참 동안은 문밖으로 고개 한 번 내밀지 못하고 방구석을 굴러다녔다. 하루는 우연히 우체부 아저씨가 동장님 댁으로 배달하는 신문을 중간에서 필자가 펼쳐 보게 되었는데 이게 웬일이야, 고등학교 추가응시 모집공고가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가. 필자는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기분이었다.   바로 어머님께 책을 구매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돈을 얻어서 응시를 하게 되었는데 필자와 입장이 같은 응시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비상한 각오로 최선을 다했으나 실력은 실력, 3차까지 낙방을 하게 되었다.   별 수 없이 고교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독서에 빠져들게 되었다. 제법 많은 양의 책을 읽었고 이때 읽은 책 속 위인들의 생애를 보고 다시 용기를 얻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공하는 사람은 항상 준비하는 사람이다.” “남들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하고, 혁신해야 한다.” 등의 명귀를 새기며 이때부터 긍정적인 생각과 끈질긴 자신감으로 어려움을 돌파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이리라. 그리하여 모든 계획을 세울 때나 앞이 캄캄하여 보이지 않을 때 가슴에 새기는 격언이 있으니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보고 가장 넓게 본다.” 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이다.   연재 제6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인물
    202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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