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12-06(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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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11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싯크릿"
                                                                                              박희준 이사장      아이고 사장님, 우린 뭐 먹고 살라꼬예? [글로벌문화신문] 이렇듯 회사운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점차 안정되어 갈 무렵, 회사의 이미지 제고를 위하여 심벌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그전부터 벌써 본사제품으로 출산장려 이벤트를 시행하여 둘째 아이면 50% 할인, 셋째 아이면 100% 무료로 상품을 배송해 주던 때라 당연히 모성이나 아이 쪽으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 모성을 상징하는 말에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함함한다’라는 것이 떠올랐다. 캐릭터로 고슴도치를 결정하고 스스로 어설프나마 고슴도치 어미와 새끼를 조합, 디자인하여 전문회사에 의뢰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귀여운 맘비 케릭터가 탄생했다. 이 캐릭터 제작에 당시 4,000만 원이라는 큰돈이 들었으나 필자가 지금 봐도 아주 귀엽고 깔끔하여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이 고슴도치 모녀는 우리 회사의 심벌로서 회사의 현관문 앞에 붙여져 오고 가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또 배웅하고 있다. 이 고슴도치 캐릭터가 완성된 후에 보다 적극적인 홍보방법을 찾았다. 먼저 광고를 통한 출산장려운동을 펼치면서 공익과 사익의 가치를 공유하고자 TV 공중파 광고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광고비가 높아서 일단 잠시 보류하고 다른 방법을 찾던 중에 중기청에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방송광고공사를 통해 광고 지원정책을 펼친다는 내용을 듣고 신청하여 바로 선정이 되었다.     2008년부터 3년 가까이 KBS2, MBC, SBS 공중파를 통해서 ‘다산코리아, 행복코리아, 프라젠트라가 응원합니다’로 해서 광고를 했다. 그 와중에 IBK기업은행 행장이 우연히 TV에서 우리 출산장려 광고를 보고 연락이 오고 얼마 안 있어서 기업은행과 당사가 제휴협약서를 체결하게 되었다. 은행 측에서 프라젠트라 임산부 튼살크림과 베이비 제품을 약 2억 원어치 구입해서 임산부 대상의 우대금리 적금상품을 파는 이벤트에 경품으로 내걸어 신청자 6,000명에게 무료로 제공했다고 한다.    당사는 감사의 뜻으로 자막에다가 ‘IBK기업은행과 주식회사 씨에이팜이 출산장려운동에 함께 동참하고 있다’라고 띄워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광고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사건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회사 임직원들이 출산장려운동도 좋지만 셋째아이 출산에 무료로 제품을 보내주게 되면 막대한 제품비용과 배송비를 부담하게 되는데 ‘우리는 뭐 먹고 살라꼬예’ 하며 왜 정부의 공익사업에 우리가 참여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불만 섞인 항의를 쏟아 낸 것이다. 하지만 좀 있어 기업은행의 구매 내용을 보고서는 다들 찬성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두 번째로는 IBK기업은행 측에서 자막홍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면서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송해를 모델로 한 은행상품광고가 대박이 났다는 후일담이 나오기도 한 것이었다.   연재 제12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컬럼/연재/인물
    2023-12-03
  • 이상만 성균관 전례위원회 연구위원 컬럼, 사도(師道)가 살아야 도덕(道德)이 일어난다
            이상만(성균관 전례위원회 연구위원)   [글로벌문화신문] 지난 달 어느 젊은 여교사가 학생지도에 힘쓰다가 학부모 대화와 교실 안 실제 상황 사이의 부조화에서 번민하던 끝에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여 생을 마감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급기야 전국교사 일동 주관으로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3만여 명의 교사가 뜨거운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섰다. 새내기 교사의 고통과 죽음을 평소에 그 누구보다 피부로 느껴왔기에 교실의 붕괴와 함께 교권의 추락을 세상에 알리려는 고뇌의 몸부림이다.       이는 일시적 시위가 아니다. 오랜 세월 누적된 교육계의 총체적 비리(非理) 현상을 동료 교사들이 직접 나서서 교육 혁신의 불가피성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참으로 큰일이다. 이대로 방관하다가는 교사를 더 죽게 만드는 공범자가 된다. 교육 당국은 지금의 드러난 현상적인 문제점을 철저히 원인 분석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교육 백년대계를 다시 세워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지난 백 년의 역사를 잠시 되돌아보고, 교육 혁신의 본질 파악에 초점을 맞추어 주요 참고사항을 언급한다. 교사는 예로부터 천직(天職)이었다. 50년 전만 해도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못했다. 그만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뭣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데 알게 모르게 교편(敎鞭)을 잡아 도우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라도 자식 교육만큼은 마을이나 이웃 마을의 선생을 찾아서 맡겼다. 서당의 훈장은 마을마다 있어서 그 연령대에 맞는 교재를 선정해서 지도하였다.  15세가 되면 향교나 서원에서 학업에 열중하다가 20세 전후에는 중앙의 성균관 사마시(司馬試)에 응하여 진사(進士)나 생원(生員)이 되어 본격적으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학습 과정을 밟다가 임금이 친히 성균관 문묘(文廟)에 성현(聖賢)을 찾아뵙고, 명륜당에서 베푼 알성시(謁聖試)나 대과(大科)를 보아 관료로 진출하여 조정의 신료로서 업무를 맡는다. 그리고 나라의 기둥과 대들보로 맡은 바 책무를 수행하면서 일생을 바쳤다. 이런 선비정신으로 900여 회 이상의 외침에도 버텨내어 은근과 끈기로 조선왕조 500년을 이끌어 왔다. 여기서 임금과 스승과 부모의 하늘 같은 은혜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금쪽같은 말씀이 생겼고, 가정과 사회와 나라에 임하면서 부모에 효도하고, 스승에 예를 갖추고, 나라에 충성하는 효(孝)와 예(禮)와 충(忠)이라는 고귀한 정신문화의 유산을 집안 대대로 전통으로 이어 왔다.   이때의 기본 교재(敎材)는 자연의 이치와 현상 세계를 집약하여 전해주는 추구(推句), 역사와 문화의 시원과 발전과정을 담아 청소년을 일깨우는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啓蒙),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小學) 등이 있고, 동양의 역사와 문화를 사자성어로 압축한 천자문(千字文)과 세상의 윤리 도덕을 고루 모은 명심보감(明心寶鑑), 동방의 천자(天子) 요순(堯舜)과 성현(聖賢)인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담은 사서오경(四書五經) 등이다. 한마디로 자연의 이치와 인성교육의 기본 핵심을 쉽게 풀어주어 사람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지도하는 선생이나 학생은 늘 진리(眞理)를 가까이 접하며 도(道)의 경지로 나아가 지행합일(知行合一) 하는 곧은 선비정신과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하여 전문성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백성을 친절하게 이끌고, 경로효친(敬老孝親)의 자세로 안팎을 두루 편안케 하며 교학상장(敎學相長) 하는 참교육의 모습을 견지하였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권력을 남용한 일부 탐관오리도 있었고,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었거나 세도정치에 몰두한 정객들도 있었다. 결국, 19세기 말 20세기 초엽,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에 온 백성은 무력을 앞세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는 뼈저린 국치(國恥)를 당했다.  이때도 전국의 훈장이 제자를 이끌고 과감히 항일(抗日) 의병(義兵)의 선봉에 서서 국내와 만주, 상해, 중경 등 외지에서도 국권 회복에 전념하였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 천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였다. 이후 서양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패권을 다투다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3년 후 휴전협정 후 폐허 속에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였다.    대통령 측근의 부정부패가 원인이 되어 1960년 민주 학생혁명이 일어났고, 1961년 군사정부가 들어서서 경제개발에 심혈을 기울였고 한글 전용시대를 열었다. 서구문물을 제도화하여 영어학습을 기본으로 시켰고, 과학기술교육에 진력하였다. 지속해서 정부 주도의 산업화에 치중함으로써 큰 성과를 내었으나 부작용으로 땅에 떨어져 가는 인륜 도덕을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70년대를 기점으로 서구화 물결 속에서 물질적 가치추구와 개인주의 성향이 심해지자 한국적 민주주의 논란이 대두하며 사라져가는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美風良俗)과 전통문화를 재인식하자는 민족주체성 확립에 관심을 끌게 하였다. 이때 고구려 소수림왕 372년에 건립한 태학(太學)의 오랜 전통을 계승하는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서도 내외의 바람과 성원에 힘입어 최초로 여성유도회(회장 조애영)가 창립하였고, 한국청년유도회(회장 최창규)가 이어 창립하여 쇠퇴하던 유교 문화와 유도부흥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이른바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라 하여 인재를 길러 널리 배출하고, 풍속을 순화하여 고르게 한다는 성균관(成均館) 본래의 교육 정신을 앞세웠다.    전국 1천만 유림이 나서서 도덕성 회복운동을 전개하여 황금만능주의 가치관의 폐해를 막고, 인륜 도덕이 살아나는 정신과 물질이 조화를 이루는 새 시대의 가치관 정립에 온 힘을 모아 사회정화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다. 현재도 전국 주요 향교 명륜당에서 방학 기간에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한자, 서예, 생활예절, 전통놀이, 사자소학 등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시도별로 미풍양속 순화를 위한 도덕성회복운동 대회를 개최하고, 명륜대학을 개설하여 관내의 남녀 어른들이 참여하여 노후를 건강하고 보람있게 보내는 삶의 지혜를 체득하도록 힘쓰고 있다. 이러한 성균관, 향교, 서원의 전통문화 현창의 꾸준한 노력의 결실이 나타났다.   최근 성균관, 향교, 서원 진흥법이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통과하였다. 이는 성균관이 일제 강점기에 민족정신 말살 정책으로 집중적으로 탄압받아온 이래 근 백 년 만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합법화 한 것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유구한 성균관, 향교, 서원의 문화 전통을 되살려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일대 반전(反轉)을 이룬 쾌거이다.       이제는 민사부일체(民師父一體)다    이미 2014년 12월에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장 정의화)에서 인성교육진흥법이 국회의원 만장일치로 통과된 바가 있고, 각급 학교와 사회단체에서 인성교육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효(孝)와 예(禮)와 민주시민의 올바른 의식을 장려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문제점이 여기저기서 노출하고 있어서 그 실효성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 중요한 논거의 일단을 지적한다면 법적인 근거는 마련되었으나 교육의 주체인 교사가 대부분 서구식 교육을 전문적으로 수료한 입장이고, 교육정책 입안자나 행정 요원도 같은 시기에 교육과정을 마친 신분이므로 현실적인 문제점은 세밀하게 분석 파악은 하였으나 교육 혁신의 대안 연구나 실제적 체험의 미비로 한계점이 나타났다.  이점을 보완하려면 전통 인성교육의 핵심인 동방의 유학(儒學)과 함께 윤리 도덕교육 과정 및 연수 기간에 적극 동참하여 실제적 체험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즉 ‘근본을 세우면 도덕이 살아난다.’는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이라는 가르침과 ‘옛것을 보듬어 새것을 알아가게 함이 스승답다.’는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와 ‘세 사람이 가면 반듯이 나의 스승이 있다.’라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의 말씀이 <논어>에 있듯이 만세사표(萬世師表)인 공자의 가르침을 존숭하는 성균관, 향교, 서원 등에서 성현의 가르침을 몸소 체득하는 수련 과정을 거치는 기본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전문 교사들도 방학을 이용하여 동양적 전통교육의 참뜻을 직접 익혀서 동서(東西) 학문과 기능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능력개발과 지혜를 습득하여 무엇이 진정 학생지도에 필요한지, 본말(本末) 관계를 숙지하여 학생수업에 적용한다면 새 시대 교사로서 인격과 자질을 재평가받을 수도 있다. 이에 대비하여 성균관, 향교, 서원은 전국 교사를 대상으로 재교육 프로젝트를 성안하여 본래의 교육 기능을 살려서 새 인성교육의 장을 제도적으로 마련하여 널리 학습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꿈많은 여교사가 왜, 그토록 안타까운 결단의 삶을 선택하였을까? 그동안 같은 길을 간 교사가 100여 명에 이른다니 교육 당국은 무엇을 했는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가, 학부모를 탓해야 소용이 없다. 오늘의 학부모는 6.25 전쟁 후 경제재건의 격동기에 허리 졸라매고 잘살아보자고 헌신한 부모가 낳은 세대이다. 상식적으로 좋은 교육환경을 찾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은 알아도, 교육부재로 몸소 신중한 가정교육을 보인 맹모단기(孟母斷機)는 잘 모를 수가 있다. 문교 행정의 조변석개 식으로 아침에 변경하고 저녁에 바꾸는 입시 위주의 교육정책으로 이미 교육불신을 체험하였고, 그에 따라 본의 아니게 치맛바람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학부모 세대이다. 젊은 여선생은 죽어서도 말하고 있다. 한 꿈많은 여교사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을 추모하는 3만 아니 5만 10만의 교사가 하나같이 검정 옷을 입고 진짜로 죽기 살기로 사생취의(捨生取義) 정신을 발휘하여 나라의 참교육 혁신에 나서고 있다. 다음으로 이 나라 교육행정의 책임을 맡은 관료들이 공무원 신분으로서 마땅히 심사숙고하여 교육계의 원로와 뿌리 깊은 교육의 본당으로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이 엄연히 존재하는 성균관(成均館)의 자문을 구하면 일이 쉽게 풀릴 수 있다.    이미 땅에 떨어진 사도(師道)를 되살리기 위하여 교사의 목소리를 국민의 함성으로 받아들여 민주시대에 알맞은 국가백년대계의 큰 그림과 방안을 마련, 제시하면 교육이 다시 살아난다. 이제는 집사부일체를 넘어서 민사부일체(民師父一體)가 답이다.     백성과 나라를 구하려 백의종군(白衣從軍)한 성웅 이순신의 호국 정신이 말한다.    필사즉생(必死卽生)!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지니,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말라!
    • 컬럼/연재/인물
    2023-11-04
  • 연재 제10편 박희준 이사장의 "성공싯크릿"
          박희준 이사장 필자가 사업설명회, 학회 홍보 등을 끝낸 다음 날 투자예정자들은 각자의 지역으로 내려가기 위해 고속터미널에 모였는데 필자의 열정과 이력을 알고 난 뒤 ‘3유(有) CEO’로 불렀다고 한다. 제약회사 재직시절 ‘부지런함’과 ‘신용’이 최고였고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면 하는 사람’ 이라는 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다가 당시 국내 1위 소화제 베아제의 PM 경력을 알고서 제품의 품질까지도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 10명으로부터 300만 원에서 2천만 원까지 모두 5천800만 원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이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일단 10평의 사무실을 얻고 집사람과 창업에는 성공한 것이었다.   회사의 명칭은 (주)씨에이팜으로 정하였는데 임상(Clinic), 대체(Alternative), 의약품(Pharmaceuticals)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이는 한방과 양방의 처방에 융합기술을 접목해서 의약품, 화장품과 건강식품의 개발을 추진한다는 기업가 정신을 구현한 것이다.   그 후 인터넷 홈페이지를 구축하면서 병원과 약국 그리고 유아용품 판매점에 제품을 비치했다. 더 나아가 홍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육아 잡지사에 6개월 뒤 돈을 벌어서 갚아 나가겠다며 대표를 설득했고 희한하게도 이례적으로 외상으로 광고까지 시작하게 됐다.   책 표지   맨주먹으로 창업을 했으니 준비할 일이 좀 많았겠는가, 우선 홈페이지부터 만들어 임산부들에게 알려야 했으니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임산부의 의견에 댓글을 다느라 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였다. 참으로 힘이 들었으나 점차 주문이 늘어나는 재미에 빠져 피로를 느낄 틈이 없었다. 영업은 필자가 맡았으나 상품배송이나 운반 기타 업무는 몽땅 집사람 몫이었으니 말이 좋아 부사장이지 잡역부도 그런 잡역부가 따로 없었다.   사무실은 조그만 빌딩의 4층에 위치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 공장에서 올라오는 그 무거운 상품박스를 4층까지 여린 몸으로 올리고 포장해서 다시 내려보내야 했으니 그 힘이 오죽 들었을까, 하여튼 그 여파로 집사람은 허리통증을 달고 살았고 지금도 척추협착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것을 생각하면 늘 죄를 지은 듯 미안하다.   연재 제11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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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9
  • 연재 제9편 박희준 이사장의 "성공싯크릿"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그래, 일단 판을 벌리고 보자 누구나 다 아는 중국의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유비, 관우, 장비가 망해가는 후한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도원결의하고 유비의 고향인 누상촌을 중심으로 의거군병을 모았다. 하여 모인 사람은 300여 명의 농투성이들로 당연히 군사라고는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어쨌든 모병장을 보고 모인 군사이니 당연히 군용자금, 식량, 군복, 창검들의 무기, 기치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유비라고 해야 돗자리 짜서 팔던 가내수공 소상공인(?)이고 장비 역시 산돼지 잡아 시중에 팔던 도축자영업자(?)이니 말할 필요가 없고 관우 역시 생업은 불확실하나 초당에서 병법서만 읽던 자였으니 돈이 있을 턱이 없었겠다.   이나저나 격문을 보고 사람들은 꾸역꾸역 모여드는데 이 세 형제들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보초를 서던 병졸이 뛰어 들어와 군영 앞으로 일단의 상인들이 말 수백 필과 상당해 보이는 양의 피륙과 재물들을 싣고 지나간다는 보고를 올리었다. 이 보고를 들은 장비는 당장 이 마필과 재물들을 탈취하여 군수품으로 쓰자고 하였으나 현덕은 일단 상인들을 만나서 알아나 보자고 하였다.       이때는 후한이 멸망하기 직전으로 전국에서 황건적이 발호하던 시대였다. 현덕은 상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들이 ‘한실부흥을 위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구하고자 군사를 일으켰는데 군대를 운용할 군비가 없어서 곤란하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상단의 우두머리인 장세평과 쏘상이 말하기를 오히려 삼형제를 잘 만났다고 하며 ‘이 어지러운 시절에 자기들도 이렇듯 유랑하다가는 언제 도적들에게 이 마필과 돈을 빼앗길지 모르는데 차라리 의병들에게 줌이 오히려 든든하고 속이 편하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기고 모든 마필과 피륙 등을 넘기고 떠나갔다. 그렇게 그 돈과 마필로 군복과 창검기치를 나름 정비하여 일약 의용군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필자의 현실 또한 이들 삼국지의 삼형제처럼 재창업의 뜻은 세웠으나 당시 일 전 한 푼 없는 상황이었다. 저출산문제가 심각하니 필자 여생의 마지막 봉사로 출산장려운동을 펼쳐야겠다고 인생 목표를 정했으나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그러나 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는 두려움보다는 도전하는 즐거움이 더 컸다.   우선 먼저 전직 회사의 대표에게 프라젠트라 제품의 판매를 제안했지만, ‘마케팅도 어렵고 수익률이 낮을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국내 최초로 튼살크림을 개발했으나 누구 한 사람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마케팅이 문제였다. 자금도, 사무실도, 직원도, 고객도 없던 문자 그대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험한 여정이었다. 당연히 ‘튼살’이란 용어도 직접 만들어 처음으로 사용한지라 아는 고객도 없었다.       돈이 없으니 자본을 어디선가 구해야 했다. 일단은 일을 저질러 보자고 다짐하면서 사업자등록부터 신청하게 되었다. 그렇게 자본금 없이 2001년 7월 회사를 설립했다. 사업설명회를 통해 투자를 받기로 결심하고 전국적으로 대리점 개설을 위해 사업설명회를 열어서 제품을 알리고, 사업 가능성을 설득해 투자 유치를 받아내기로 했다. 이전에 근무했던 제약회사 동료를 비롯해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품 홍보를 위해 부스 사용료 200만 원과 숙박·교통비 등을 위해 총 300만 원이 필요한데, 관심 있는 분들은 30만 원을 내고 사업설명회에 참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전국에서 10여 명이 돈을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지인에게서 사무실을 무료로 빌려 설명회가 끝난 뒤 한 후배는 “제품은 괜찮은 것 같은데 사무실, 자본금, 시장 등 3무(無) CEO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다음 날 모 대학병원에서 열리는 산부인과학회 회의장 모서리에 나름 아담한 부스를 마련하여 홍보작전에 돌입하였다. 필자는 자신이 있었고 그 후 후배의 안타까움을 무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반전이 일어났다.   연재 제10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컬럼/연재/인물
    2023-07-19
  • 연재 제8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박희준 이사장    암수술 두 번 정도는 까딱 마이신이지 “사장님, 우린 뭐 먹고 살라꼬예?” “뭐 먹긴, 언제는 굶고 살았나? 신용을 먹고 살아야지. 대중을 상대함에 신(信)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거지. 이 신(信)이 바로 우리에게는 하늘의 신(神)이며 또한 인간사의 의(義)야, 중국 월나라 서시와 당나라 양귀비의 경국지색(傾國之色)도 채 20년을 가지 못하나 믿음은 천년을 가는 거야, 신으로써 덕을 베풀면 덕향만리지.”   평생을 의를 행하며 신뢰를 쌓아 왔고 긍정의 철학으로 탑을 쌓았다. 웬만한 일은 ‘까딱 마이신’. 아찔한 일이었으나 두 번 정도의 암수술은 까딱 마이신이지, 이 정도에 쓰러지진 않아, 이제 또다시 시작이야, 이 험난한 길 30년을 묵묵히 같이 와준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다가오는 금혼식에는 정말 멋있는 파티를 열어 줘야지.     309번의 실패 뒤의 310번째의 성공을 선배의 건강기능 식품회사를 다니며 필자만의 회사를 창업하는 방법을 이리저리 모색하던 중에 고객이었던 한 대학병원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진료실 앞에서 우연히 새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는데 임신부 2명이 대화 도중 “언니, 배만 트지 않는다면 아기를 하나 더 낳고 싶은데 말이야.”라고 말하지 않는가. 배가 터서 아이를 더 이상 가지지 못한다면 산부인과는 환자 수도 계속 줄어들고 당연히 출산율도 떨어지고 말텐데?   그럼 ‘트지 않게만 해 준다면 누구라도 아기를 더 낳을 마음이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 아이템을 찾으면 출산장려운동으로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때가 아마 1995년경이었으니 당시 이미 우리나라는 초저출산의 늪에 깊이 빠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2여 년간 건강기능 식품회사를 운영하는 선배 회사에서 중역으로 근무하면서 ‘튼살 제품’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배 회사의 건강기능식품 판매와 나의 제품 개발 등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아이템의 창조에 대한 열망으로 가슴속에서는 도전의 열정이 샘솟듯 올라왔다.       그러나 막상 여기저기 조사를 해보니 배를 트지 않게 하거나 튼살을 원상회복시킬 수 있는 약품이나 화장품이 전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는 의사들은 임산부의 배가 트는 원인을 유전이라고만 했다. 하지만 임산부의 모친은 배가 트더라도 자식은 트지 않는 경우와 그 반대의 실례도 있었다. 그래서 왜 살이 트는지를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 상품개발의 첫 걸음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피부과 의사들에게도 조언을 구해봤으나 어느 누구 속 시원히 그 원인을 말해주는 전문가가 없었다. 단지 유전적인 성향으로 그리된 것이라는 말만 들었다. 도서관에서 전문서적을 보며 씨름도 했으나 원인을 규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우연하게도 체내에 콜라겐이 풍부하면 피부가 부드러워진다는 점에 착안하였고, 연구를 거듭하던 중에 튼살의 발생 원인을 찾아내었다. 바로 호르몬의 역할로 피하지방층에서 콜라겐이 부족해지고 체내의 태아가 커짐에 따라, 피부가 팽창하다가 탄성의 임계점을 넘게 되면 터지게 되고, 쉽게 말해 균열이 생기는 현상, 즉 튼다는 것을 발견했다.   연재 제9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컬럼/연재/인물
    2023-07-09
  • 연재 제7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박희준 이사장   - 갈잎은 No,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 [글로벌문화신문] 하는 수 없이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재충전하여 퇴사 10년 만에 신생 제약회사의 영업부장으로 둥지를 틀었다. 다시 세일즈의 길로 복귀한 것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10배의 매출 성장을 달성하면 퇴직해서 창업한다는 조건으로 약속을 받고 입사했다.   나머지 인생은 사회와 국가를 위해 적지만 봉사를 하며 살기로 결심했고 또 도와주신 분들의 부채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재창업을 하여 성공을 하지 않고서는 별 도리가 없기도 했다.   입사한 제약회사에서의 직책은 병원 담당 부장이었고 영업직원들을 관리하면서 직접 영업도 뛰었다. 낮에는 대학병원 직원부터 원장까지 두루 만났고 야간 방문을 하기도 일쑤였다. 학교법인 병원 측에는 연간 매출액의 10~20%까지 장학금으로 내겠다는 조건도 걸었다.        카피 의약품의 입점이 어려운 상황이라 재단 이사장과 직접 소통을 시도했다. 수차례 문전박대를 받기도 했지만 비서에게는 막무가내로 접근하여 3전 4기 만에야 면담을 하기도 했다.    또 원무과의 직원을 통해 원장 사모님의 생신일을 알아 미리 케익을 준비하고 직접 댁을 방문하여 인사드리는 등 먼저 인간적으로 호감을 쌓는 방식으로 좋은 성과를 얻어 내기도 했다.   이런 철저한 승부근성으로 신생회사는 내가 들어간 지 1년여 만에 10배 이상의 매출을 달성하는 쾌거를 올렸다. 하루는 이를 본 회장이 필자를 불러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한 뒤 보너스로 3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돈 대신 부서 직원들이 품위 유지비를 올리면 무조건 결재해 줄 것과 창업 시에 무이자로 10배를 빌리는 것을 약속하고 방을 나왔다. 2년 6개월 만에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필자는 사직하고 또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 와중에 잠깐 제약업계 선배의 간곡한 부탁으로 부득이 1여 년 동안 건강기능식품이 주 품목인 그 회사에서 중역을 맡게 되었다.   연재 제8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인물
    2023-06-23

실시간 컬럼/연재/인물 기사

  • 박명인 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의 '도식론 1'
          [글로벌문화신문] 일반적으로 도식이란 다이어그램과 같이 복수 항목의 관계나 사물의 커다란 윤곽을 나타내는 소묘를 말하지만, 철학적·미학적 개념으로서의 도식은 대상의 지각과 산출에 의한 정신의 규제적인 원리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어의 경우에 전자를 le schéma(도식), 후자를 le schéme로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개념은 원래 전자를 후자에 적용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복잡한 사상(事象)에 대해서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복수 항목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다이어그램을 쓰는 것은 그 현상을 분석하고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며, 그러한 전체상(全體像)을 얻어서 처음으로 그 현상을 하나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라첼리에(Jean Lachelier, 1639-99)는 도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도표를 그릴 때 상상력 안에서 순수한 경향의 상태에서 찾아지는 규칙’ 미학에서 이 개념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은 레이먼드 바이엘(Raymond Bayer)이 효시다. 그는 ‘도식현상(schmatisme)’으로서 문체ㆍ공통 토포스(topos)ㆍ카논(canon)ㆍ유형 등을 채용하고, 그 특징을 구체적 보편에 의해 독특한 고차원적 감수성이라는 점을 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예술현상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의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체험은 항상 다른 것으로 통하는 보편적 특질을 전개해 간다는 것이다.    도식은 구체적인 개별적 경험을 보편적인 개념으로 다른 개별적인 표현에 매개하는 것이다. 래이먼드 바이엘은 결과로 얻을 수 있었던 표현을 도식적인 것만을 채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도식이 움직이고 있는 장소는 넓다. 인간의 창조는 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소여(所與)로 변형하는 것이다. 도식이란 단적으로 인간적인 창조적 상상력의 형이 아니면 안 된다.   개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보편성이 있는 표현에 통로를 개척하는 예술가의 감수성은 독특한 것이며 보통 지각과 무연(無緣)한 것이 아니다. 그 메커니즘을 생각하는 동시에 칸트를 참조해야 한다. 칸트야말로 도식의 구조를 처음으로 지적하여 이론화한 인물이다. 그는 선험적 감성론이란 감각적 지각이 어떻게 성립하는 것인지를 해명하려고 했다.    이 문제는 고전적인 것으로써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질적인 두 개의 실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다시 말해, 인식하는 것은 정신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물적 대상을 지각하는 경우, 컵이 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대상을 어떤 의미에서 정신화하지 않으면 자기와 동화될 수 없다. 이 동화에는 정신의 능동적 작용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우선, 물적 대상에 한하지 않고 인식인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신이 능동적인 형식으로서의 카테고리(순수오성개념)라는 것을 내세웠다. 그것은 일종의 규제적인 틀이며 대상이 제어될 때 처음으로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양ㆍ질ㆍ관계ㆍ양상의 네 가지에 대해서 각각 세 개의 규정성이 상정(想定)되고 있다. 그러나 카테고리는 순수개념오성이며 감각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 대상을 알게 되는 경우에 직접 이것을 감각소여에 적용할 수는 없다.   거기에서 감각소여와 카테고리를 이어 나가는 제3자, 다시 말해, 지성적인 것과 동시에 감각적인 것으로서 칸트는 선험적도식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시간의 형식 안에서 이 도식의 활동을 인정하고, 네 개의 카테고리의 각각에 대해서 도식을 규정했다(시간의 계열, 내용, 순서, 총괄). 따라서 도식이란 정신이 물적 대상에 제의하는 이른바 정신화하기 위한 능동적 원리이다.   문제는 지각론이 아니라 도식의 개념이다. 칸트에 의하면 순수한 감각적 개념의 근저에 있는 것은 대상의 상(Bild)이 아니라 도식이다. 예를 들면, 삼각형의 경우 각도나 변을 비교하면 수없이 많은 것이 있어서 서로 다른 상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 대한 도식은 개념과 상의 중간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 즉, 단순한 개념(3변을 가지는 다각형)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려 내고 있지만 특정한 각도나 변의 비교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삼각형에 해당된다.   이 의미에서 도식은 감각적 대상과 개념을 매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식없이는 눈앞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 보는 네발 동물을 아마 동물로서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이미 동물의 도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개(犬)라는 같은 종류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은 그 수준에서의 도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이것을 도식이라고 하지 않고 이미지라고 부를 때가 많다. 그러나 감각적인 상이 아니라 상당히 개념적인 표상으로서의 도식이다.   칸트가 문제로 하는 것은 이러한 개별적인 도식이 아니라 선험적 도식이다. 그것은 각각의 도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그것과 달리 예술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칸트의 도식보다도 개별적인 수준에 있다. 그래도 칸트의 구상은 예술의 경우에서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 대상을 지각하여 이해하는 것이 결코 단순한 수동적인 프로세스(process)에서가 아니라 정신의 능동적인 관여가 전제되어 도식이 거기에서 대상에 적용되는 정신의 규정적인 계기라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지각의 능동적 형식으로서의 도식에 대해 잘 알려진 것으로 곰브리치의 설이다. 그가 말하는 도식은 심리학으로부터 차입된 심리구조(mental set)의 형태라고 생각된다. 이미 파장을 맞는 수신기를 가져서 그들 미술가의 작품에 임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상술(上述)한 바와 같이 기대의 수준을 심리구조라고 칭하고 있다.    ‘심리적 구조란 정확하게 말하면 투사개시의 준비가 갖추어진 상태, 혹은 지각의 주변에 언제나 명멸하고 있는 환상의 색이나 환상 이미지의 촉수를 밀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즉, 지각의 선별작용을 하는 독자적인 태세다. 개인적인 것도, 또한 시대의 규정에 의한 것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작품의 경향으로서의 양식과 같다.   곰브리치의 사상에는 독창적인 것은 없다. 도식의 사고방식을 미술의 장면에 적용한 것에 새로움은 있어도 지각이론이나 도식개념에 혁신을 초래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강점은 무엇 보다도 도식에 관한 풍부한 실례를 채용해 보도록 한다.       고래 판화, 16세기 말 ~17세기 초       MILLEFLEURS: 도식적인 꽃과 동물, 15세기,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두에 그려진 고래(鯨) 판화 2점에는 진짜 고래에는 없는 귀가 그려져 있다. 그것은 화가가 귀를 착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16세기 중간쯤 독일의 신문에 실린 로마의 조망도 성·탄제로 성에는 급경사 지붕의 목조가옥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로마가 성새도시(城塞都市)라고 생각한 화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독일의 성새도시를 모델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는 상당히 황당한 것이지만 언뜻 보면 완전히 사실적이라고 보이는 그림조차 왜곡을 보게 된다.   17세기의 화가 마테우스·메리안이 그린 파리의 노틀담 측면도는 언뜻 보면 충실하게 재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큰 반원형 창문을 가진 좌우 대칭의 높은 건물’이라는 사원관(寺院觀)에 따라 현실의 모습이 개변(改變)된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오른쪽에 치우쳐 있는 대문 좌우 쪽에 잇대어 지은 행랑을 중앙에 두고 있다.   이것들의 예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미술이 개념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회화는 결코 자연적 기호가 아니다. 순수한 사실묘사라고 말하기 쉽지만 실제로 불가능과도 같다. 그것을 위해 타인의 지적을 받아 수정을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나아가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곤란해도 초등도식(initial schema)를 선택하고, 이것을 과정으로 묘사하는데 순응하는 수 밖에 없다.   그 미술가는 시각적 인상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이라든가 개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고래를 그린 화가는 반드시 귀가 있는 동물의 머리를 표상하는 도식을 가지고 있고 로마를 그린 독일 화가도 성새도시의 도식에 있어서 성에는 급경사 지붕이 딸려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또한 노틀담 화가 메리안도 대성당은 좌우 대칭이 아니면 안되었다. 어떤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일반적인 이미지, 즉 도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화가는 그 도식을 출발점으로 만드는 것과 맞추는 것(making and matching)에 의해 작업을 진행시켜 간다. 초등도식(初等圖式)은 관찰하는 것도 불가결하다. 그것이 특히 작품해석에서 채용할 수 있었던 것이 mental set·swap allocation table인 것은 위에서 본대로다.   기대를 갖지 않고 관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며 과학에 있어서 조차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칼·포퍼(Sir Karl Raimund Poppe)가 역설한 것과 같이 모든 관찰은 자연에 대한 질문의 결과이며 시도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칸트가 ‘요소적·원리적인 수준으로 함께 이야기한 것, 지각에는 정신이 능동적인 관여가 전제되어 있는 것, 그리고 이른바 정신에 있는 것 밖에 볼 수 없다,라는 것의 옳음이 보다 유의미한 구체적인 활동에서 확인됐다고 말할 수 있다.     스위스의 지도 제작자인 마테우스 메리안이 1615년에 판화로 만든 파리 지도(메리안 지도).              퐁 뇌프 다리. 다리 뒤쪽 시테섬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곰브리치에 있어서는 지각 혹은 해석의 장면에서 ‘mental set’가 창작의 장면에서는 도식이 각각 별개로 논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도식은 창작의 장면에서 작용하는 규제적인 원리이지만 고래(whale), 성새도시, 카테드랄(cathedral, 대성당)은 모두 표상의 왜곡된 예이며, 창조성이 생각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들의 도식이 기능하는 실태는 과거 경험의 집적(集積)에 의해 형성된 기대 혹은 예측에 의한 지각의 규제라는 성격이 강하다. 그것에 대해 참으로 창조론으로 기능하는 도식을 생각한 것으로서는 베르그송의 ‘역동도식(Le schéma dynamique)’이 있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말하는 역동도식이 무엇인가 말하자면 그 자신이 거론하고 있는 예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상기하려고 할 때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목구멍에서 나오려고 하는 그 느낌에 주목하는 것이 좋다. 이 목구멍에서 나오려고 하는 느낌이 그 이름의 역동도식과 같은 것이다. 베르그송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기나, 설교사가 그 텍스트의 전체를 암기할 때의 메커니즘, 그위에 창조적인 예술가의 발상 등을 ‘지적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기억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상기하는데 노력없이 기계론적인 암기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말이 나오는 것 같은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상기에 손이 간 것이 있다. 역시 긴 문장을 기억할 경우를 예로 든다면 기억술의 서적이 가르치고 있는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다. 문장을 조심스럽게 읽고 그 다음 내적인 조직을 생각하고, 단락 또는 부분으로 나눈다. 거기에서 전체의 도식적인 겨냥을 할 수 있고, 그로부터 이 도식의 내부에 가장 두드러진 표현을 끼워 넣는다.   그리고 상기할 때는 반대로 이 추상적인 골조에 구체적인 말을 복원해 가는 셈이어서 거기에는 이미 어느 정도 창조적인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이 도식적인 도(圖)이며, 그 기억의 요체는 모든 관념, 모든 이미지, 모든 단어를 단순히 한 점에 집약하게 한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 응축된 많은 이미지에 전개할 수 있는 단순한 표상을 가리켜 베르그송은 역동도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개념에 관해서 두 가지가 문제 된다. 우선 이 명명에서 베르그송은 ‘그리스어를 수용해’거절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어의 의미를 담아’라는 의미일 것이다. schéma도 dynamique도 함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단어이며 이 단서는 어느 쪽에도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모양을 의미하는 schéma는 특수한 의미로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한정하고 있는 dynamique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역동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러면 그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문맥에 있어서 베르그송이 ‘기타의 일절이 잔돈(monnaie)에 지나지 않는 기본화폐(piece)라고 하는 비유를 채용하면서 그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어의 dynamis에는 화폐의 가치의 의미가 있다. 이 의미를 거론하면 schéma dynamique란 고가치의 도식이라고 말하게 된다. 또 하나는 철학용어로서 친숙한 세태라는 의미다.   그 가운데에서 단어의 기본적인 어의로서의 계기는 당연히 은폐된 상태로부터 확실히 현현(顯現)해 가는 현실화의 경향에 있고, 이것도 또한 베르그송의 역동도식의 성격으로 타당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현실화하려고 하는 도식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은 어석(語釋)에서는 대립하지만 사상적으로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역동도식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그것 자체가 현실화된 다이어그램이 아니라 세태적인 규제적 원리라면 왜, schéme가 아니고 schéma일까? 이것이 제2의 문제이다. 사실은 베르그송에서는 유사한 개념이 또 하나 있다. 즉, 운동적 도식(le schéme moteur)이다. 이것도 또한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며 말을 들어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운동적 도식에 의한 것이다.   청각적 인상은 단순한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말의 움직임을, 즉 ‘초동적(初動的)인 근육감각(sensations musculaires naissantes)으로서의 듣는 말의 운동적 도식’을 듣는 사람 안에서 산출한다. 다시 말해, 운동적 도식도 현실화를 촉진시키는 원리이며, 역동적 도식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방향이 schéma에서 다른 방향으로 schéme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단지 각각 붙일 수 있었던 형용사의 성질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개념상의 구별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베르그송이 이 두 가지 도식을 어떻게 표상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에 유래하는 것이 틀림없다. 역동적도식 쪽은 전체를 응축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전체가 잠재적으로 그 곳에 있으며 그 의미에서 전체상(다이어그램)을 인정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운동적 도식 쪽은 시간적으로 전개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상이 그 곳에 있으면 빛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것을 현실화해 가는 힘이라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예술창조를 생각하면 이 두 가지 도식을 공간적ㆍ시간적이라는 존재 위상의 차이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근본적인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베르그송은 역동도식을 발명이나 예술창조에서 인정하고 있다. ‘소설을 만드는 작가, 극중인물이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극작가, 교향곡을 작곡하는 작곡가, 시인은 처음에는 정신적으로 단순하게 추상적인, 즉 비물체적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음악가나 시인에 있어서는 소리나 이미지에 전개해야 할 새로운 인상(印象)이다.    또한 소설가나 극작가에 있어서는 사건으로 전개해야 할 명제, 살아 있는 인물에게라도 구체화해야 할 개인적 혹은 사회적인 감정이다. 그들은 전체를 나타내는 도식에 조작을 가하고 판명한 제 요소의 이미지에 도달했을 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역동도식이란 보통 작품의 이미지라고 불리는 맹아(萌芽)이다. 그 맹아는 스스로 전개하려는 힘을 내포하고 있는 역동성이 예술가에 대해 현실화를 촉구한다. 예술가에 있어서 이 맹아는 마치 상기할 수 없는 이름과 같이 막연하게 취할 수 없는 것이면서 명확한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도식의 역동성으로 움직임으로 해서 시행착오(making and matching)를 되풀이해서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 때, 이름을 상기하는 것과 같은 경우와 다른 한 점이 있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상기하는 경우, 역동도식의 내실은 그 이름을 상기한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예술창조의 경우, 전개의 프로세스는 엄밀한 의미로 창조이며 단순한 전개나 현실화가 아니다. 다시 말해, 작품의 맹아는 완성된 작품에 고정할 수 없다. 창조의 과정은 당초 역동도식 바로 그것의 변경을 수반해 간다고 생각된다.   한편 베르그송의 개념을 예술철학에 있어서 앙리·구히에(Henri Gouhier, 1989-1994)가 구체적인 플롯(plot, 구성)에 전개해야 할 극적 행동(action)을, 또한 에티엔 수리오(Etienne Souriau)는 극적 상황을 역동도식으로 논한 예가 있다.   베르그송의 역동도식은 그 창조성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Kant)나 곰브리치와 같은 지각의 장면에도 적용되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수용의 기능적 도식이 창조의 원리에 전환되어 가는 사실을 설명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배르그송은 지적노력(知的努力)으로서의 지식해작용(知識解作用, intellection)을 논한다. 글을 읽거나 말을 듣거나 해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수학의 증명을 풀어가는 경우와 같으며, 단지 받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떤 계산을 풀어 갈 때, 스스로 그것을 하고 있지 않으면, 풀어 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문제를 자신이 풀고 있지 않으면 그 문제의 해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읽을 때나 들을 때도 일부분 밖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나머지는 기억에 의해 보완하게 된다. 외국어 단어를 듣고 알지 못하는 것은 이 보완 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각은 기억만으로 점점 좋아질 수 없고, 명확한 형을 취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해작용(解作用)도 또한 잠세적(潛勢的)인 도식에서 지각적 이미지로 옮겨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결론한다. 이러한 고찰을 근거로 최후에 베르그송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조의 노력이 도식으로부터 구체적 이미지로 전개하는 것을 논하고, 수용과 창조를 포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극을 받을 때에 이미 능동적인 관여가 시작되고 그 발전 안에서 창조가 행하여지는 셈이다.   그 사상은 크로체(Benedetto Croce)의 직관=표현설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보다 구체적인 설명의 가능성을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생(生)의 수동적 측면이 능동적 측면으로 전개해 가는 다이너미즘(dynamism)을 상당 정도까지 해명하고 있다.   
    • 컬럼/연재/인물
    2022-05-11
  • 연재 제1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나막사 김현풍 총재     [글로벌문화신문] ‘막걸리, 민족의 혼을 빚다’ 지금 제일 힘들고 고달픈 때입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나막사(나라사랑 막걸리사랑)’라는 이름 아래 모인 모두가 국민에게 기를 불어 넣고 다시 한 번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함께 만들었으면 합니다.   비극의 역사 일제가, 내선일체를 말하며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했던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민족의 얼과 혼, 기를 꺽기 위한 일제의 만행은 지명의 변화로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일종의 창씨개명과 같은 것이지요. ‘홍성’은 본래 ‘홍주’와 ‘결성’ 이었던 두 곳의 글자를 합쳐 기를 꺽은 경우이고, 인왕산(仁王山)도 王 자를 旺 자로 바꾸어 사용하여 마치 일본의(日+王)을 뜻하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의왕시의 ‘왕’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속리산의 천황봉도 본래 천왕봉인데 일제가 천황봉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일본 천황을 가르키는 황皇 자를 쓴 것이었지요. 그 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 일제가 특히 집중했던 곳이 있습니다.   삼각산    많은 분들께서 ‘북한산’이라고 부르는 산입니다. 이 이름은 1915년 일제에 의해 바뀌었던 이름입니다. 본 이름은 ‘삼각산’입니다. 동시에 청와대 뒷산인 ‘백악산’도 ‘북악산’이 되었습니다. 왜 일제는 산의 이름을 굳이 바꾸었을까요? 이 두 산은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맥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경복궁을 비롯한 모든 터잡기의 기본은 풍수에 의한 것이었는데, 백두산의 정기가 조산(祖山)인 삼각산을 타고 내려와 주산(主山)인 백악산을 지나면 경복궁 위치에 다다릅니다. 이렇게 흐르는 민족의 정기를 끊어 놓고자 이름을 바꾼것이지요.   그러니 삼각산과 백악산의 이름을 제대로 되돌려놓지 않으면 나라가 잘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일제가 바꾸어 놓은 북악산에 사용했던 ‘북’ 자는 북망산천(사람이 죽어 묻히는 곳)의 ‘북’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가 꺽여 계속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저는 2005년 강북구청장 재임시절 문화재청으로부터 삼각산과 백악산을 명승 제10호로 지정 받아 놨습니다. 그리고 산림청으로부터도 자정을 받아놨습니다. 그런데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뭘가요?   지명을 이렇게 고착화 시켜 놓은 것은 식민사관의 친일 사학자들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는 친일 사학자의 후손과 제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습니다. 날로 번성 하고 있고요.       그들이 지명을 바로 잡게 되면, 스스로 친일을 했다는 반증이 되므로 북한산, 북악산의 명칭이 일제 잔재가 아니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류 사학계가 이런 실정이니 재야 사학자들의 외침은 묻힐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요.   북한 노래 가사 중에 ‘모란봉에서 삼각산까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전에 개성공단에 남한 사람이 가서 ‘북한 산 잘 보인다’고 했더니 북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북한산은 북한에 있는 산이고 그 산은 삼각산입니다.” 망신스러운 일입니다.   오히려 이런 면에서 북한은 철저하게 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혀 손도 못 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3.1운동의 항일정신을 잊고, 중요한 일을 해결하지 못한 부끄러운 후손이 바로 우리입니다.   연재 제2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인물
    2022-05-08
  • 연재 제 6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굴지의 제약회사에서 톱 세일즈맨이 되다   열심히 1년을 재수하여 대구에 있는 대구고등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후일 알았지만 깡촌의 시골중학교에서의 학업실력과 대구의 일류 중학교 같은 학년과의 학업실력은 엄청난 차이가 났다.   대구에 유학하면서 타 고교의 학생과 사귀게 되었는데 고교 2학년 때 하루는 그 친구가 영어 시험지를 좀 봐 달라고 했다. 그 친구의 학교는 그 당시 등록금만 내면 합격하는 만년 미달의 3류 고등학교였는데 영어시험지가 적어도 필자의 눈에는 중학교 3학년 정도의 문제였으니, 창피한 소리이지만 옛날의 칠곡의 깡촌 중학교에서 ‘잘해 봤자’였던 실력이었던 것이다.     1982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몇 군데 응시한 대기업 입사시험에서도 수차례 고배를 마셨다. 우여곡절 끝에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에 면접을 보게 됐는데 늘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기에 거의 포기한 심정에서 할 말이라도 좀 하자고 마음을 비웠다.    최종 면접에서 회장 내외분과 사장이 임석한 가운데 회장님이 ‘술을 잘 하느냐’ 고 물어 왔다. “막걸리는 배불러서, 소주는 취해서, 양주는 돈이 없어 못 마십니다.” 라고 했더니 껄껄 웃으셨는데 결과는 합격이었다.   필자는 우선 앞으로의 계획으로1. 7년 안에 ‘톱 세일즈맨’이 된 뒤 퇴사2. 짬나는 시간을 이용해 석사학위 취득3. 영어·일어 학습 뒤 해외영업 진출 등 3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 필자는 입사 지원 시 마케팅부서로 내근직을 지원했다. 2년여를 마케팅 부서에서 PM직을 수행하다가 생각을 바꿔 영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영업사원으로서 상기의 목표 달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무엇보다 최고의 세일즈맨이 되겠다는 현실적 목표가 필자에게 더 많은 추진력을 보태 주었다.   예를 들어 세일즈를 하면서 영업회의 시 월간목표를 발표할 때 남들은 대개 200이라고 할 때 필자는 보통 800이라 말하여 회의실의 사람들이 수군거렸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다음 달 결산회의 때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져 있었다.   보통 다른 영업사원들이 200의 목표를 세워놓고 180을 하여 90%의 실적달성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800의 목표를 세워 70%인 560의 실적을 올렸으니 소위 달성률은 낮았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3배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코웃음 치던 영업부에서도 이런 실적이 몇 번 계속되자 모두들 필자의 영업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필자는 맨 먼저 시내의 약국을 방문하여 시장조사를 철저히 하여 모든 실제적 수치를 가지고 영업에 임하였다.    실적도 덩달아 올랐다. 5년 만에 회장보다도 표면적 월급은 더 많이 받았다. 세금도 더 많이 내는 톱 세일즈맨으로 사보에 2년 연속으로 게재되기도 했다.   한 가지 기억나는 일이 있다. PM시절, 우리 회사에서 필자가 만든 소화제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자연 필자의 업무도 많아졌다. 더 많은 실적을 위해 지방출장이 잦았는데 그 당시 새마을 열차를 타고 가곤 했다.    서울을 좀 벗어난 소도시의 철로변 전봇대에 소화제 광고가 몇 십km를 가더라도 연달아 붙어있어 아주 흐뭇했던 기억이 있다. 소화효능이 좋아 이미 국민소화제가 되어 있었던 바로 그 대웅제약의 베아제이다.   연재 제7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인물
    2022-05-07
  • 김현풍 나막사 총재(의학박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책" 연재
    [글로벌문화신문] 나라사랑 막걸리사랑(나막사) 책은 2017년 9월 23일에 발간 되었다. 신간서적은 아니지만 우연한 기회에 책을 읽어 보고 내용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이 좋은 반면에 많은 독자들이 나막사 책을 모르고 있는것 같아  이 책을 다시 한 번 홍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저자와의 협의하에 신문에 연재를 하기로 하고 추후 내용을 첨삭하여 개정판을 출간 하기로 했다. 저자인 김현풍 나막사 총재는 현재 80의 고령의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미아동 미아사거리에서 치과의원을 운영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현풍  나막사 총재 김현풍 총재의 경력은 화려하다. 본업인 치과의원을 운영하면서 국가관도 투철하여 도봉문화원장, 강북문화원장과 민선 3, 4기 강북구청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많은 지역민들을 만나며 막걸리 한 잔을 벗삼아 서민들의 어렵고 힘든 고통과 애환을 현장에서 경청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 민족 고유의 술이자 서민적인 "막걸리"에 대해서 남다른 애정을 가질 수 박에 없었다.   이 나막사책은 "우리민족 고유의 술인 '막걸리'가 무엇인지, 그 안에 함축된 민족의 정신과 애환, 막걸리가 우리 몸과 건강에 어떻게 좋은지를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막걸리의 비밀 등을 알려주고 있어 막걸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나막사는 우리의 얼과 정신이 담긴, '민족의 술' 막걸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국가의 전통주인 '국주(國酒)'로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 지구촌의 대표적인 주류문화를 보면 독일의 맥주, 프랑스의 와인, 일본의 사케 등이 있듯이 우리 민족 고유의 막걸리를 '문화'와 함께 성장하는 세계적인 국주(國酒)로 만들기 위해 그 정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다. 나막사에서는 확고한 목표를 설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우리 막걸리에 문화를 입혀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나라 사랑의 디딤돌로  삼을 것이며, 문화가 담겨있지 않은 제품 위주의 세계화를 지양하고 막걸리를 한국의 문화유산으로 인식할수 있도록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또한 세계인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막걸리에 대한 문화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고, 막걸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사화적 관심을 촉구 할 수 있도록 캠페인을 전개하게 될 것이다. 특히 올바른 음주문화를 정립하여 한국의 전통적 풍류를 즐기고, 막걸리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막걸리와 더불어 한국의 맛을 찾아서 전통의 맛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 하고 있다. 나막사모임은 2019년 1월 24일에 인사동 자희향이란 막걸리 전문점에서 첫 모임을 시작으로 3개월 주기로 치협동호회 모임으로 출발했다.    2020년 코로나19사태로 인해 소규모 정기모임만 가졌으나 앞으로 각 분과별 각계 각층의 인물들과 함께하는 단체로 성장 할 것을 기대하며, 이 나라사랑 막걸리사랑(나막사)에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면서 "글로벌 문화신문"에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 제 1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인물
    2022-04-27
  • 한국미학연구소장 박명인 컬럼, '예술과 자연환경'
        박명인 컬럼 (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 하이데거(Heidegger)는 ‘근대의 학문은 특정한 대상 영역에 기초를 두고 개별적 학문으로 분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M·Heidegger, a,a, O.〉 이것은 일체 근본으로서의 인간(근대적 주관이 물리학에서는 질점(質點)의 운동, 화학에서는 원자간의 상호작용 등)에 따라 개별적 학문영역을 투기(投企)하고, 그 학문영역에 있어서 각각의 개별적 학문이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 경우에 물질이 세분화되는 만큼 학문의 인식은 전문화하고 정밀하게 된다. 따라서 정밀한 인식을 추구하는 근대의 학문연구는 점차 자율적인 개별학문으로 분화하게 된다.   예술도 또한 근대에서는 칸트가 예술영역을 인간의 마음의 활동(판단력 및 쾌·불쾌의 감정)에 대응시켜 규정한 특정 대상 영역(미적 영역)을 기초로 하는 정신적 당위(當爲)로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대상 영역에서 예술의 자율성이 보증되어 그 영역이 시각적·청각적·촉각적 등의 영역으로 개별화되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투시도법은 외적 자연에 대한 인간의 시각적 관계를 화면에 묘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합리적으로 일치된 화면구성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외적 자연 대상의 시각적 표현활동으로서의 회화적 자율성 원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근대예술의 역사발전 과정에 있어서 이 투시도법이 회화에 자율성을 보증함으로써 도리어 존립성을 잃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자율성을 획득한 근대회화가 회화로서의 자율성을 추구할 때 현실적 자연공간 묘사의 수학적·합리적인 구성원리로서 투시도법보다 회화의 한층 본질적인 요소로서의 화면구성이 회화표현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동시에 투시도법은 필연적으로 후퇴하게 되어 자율적인 추상회화가 외적 자연묘사를 회피하게 되어 완전히 그 의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시도법을 본질적인 구성원리로 하는 풍경화는 그것 자체 풍경화의 종언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 이 사태를 명료하게 나타내는 사례에 대해서 회화의 본질을 추구한 현대회화의 선구자 세잔(Paul Cezanne)과 모네(Claude Monet)의 후기 작품에 대해서 각각 하나씩 증언을 이끌어 내 보기로 한다.                                              수련연못(Water Lily Pond), 100.4*201, 1919, 끌로드 모네(Claude Monet)   (1) 세잔의 풍경화는 일반적으로 현실풍경으로서는 공간이 좁고 작으며, 앞쪽 경치를 축소하여 안쪽으로 향하는 선의 수도(收斂度)의 소멸 등에 의해 과학적 투시도법의 공간구성 상태가 약하다.   약해지게 만들고 있는 한층 보편적·기초적인 요인은 색반(色斑), 터치에 있어서 대조의 정도가 평온해진 화상의 소구조(小構造) 형성 방법에 있어서 소구조에 의한 투시도법의 상태가 약해지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폐기되어 추상회화로 한 걸음 다가선다.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회화에 있어서 화면구성에 관해 이 소구조만큼 강렬하게 과학적 투시도법을 놀라게 한 것은 없다.   (2) 오랜 유럽의 클로드·로랭(Claude Lorranin)의 장대한 풍경화와 모네나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후기 작품 사이에는 알려지지 않은 심연이 입을 열게 한다.   예를 들면 모네의 1884년의 풍경화 《레몬 나무와 들판》은 색반의 연속체를 위해서 이 색반은 사물과 거의 같은 작품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래도 아직 눈과 화상(畵像)과의 거리가 지평선의 좌표에 의해 보증되고 있어서 여전히 풍경화라고 부를 수 있다. 수련(1918-25년)》에서는 이미 공간이 견고한 골조를 보증하고 있어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조자의 좌표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해서 자연은 원시적인 자연력이 상호 작용하는 모든 부분(물·빛·식물·천공)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영역이 된다.  관조자는 자연을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조형적 배치의 일부가 된다. 이것에 의해 이전 풍경화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바꾸어 지고 있다.   여기서 풍경화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고찰에 의하면 자연공간의 투시도법적 형성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관조자는 ‘자연과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있다’고 할 때 투시도법적인 풍경의 형상은 이미 소멸되고 있다.   그러나 관조자가 자연 안에 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떤 자연일까? 그것을 ‘능력 생산적 자연’이라고 부르고 현대에 있어서의 자연의 화상(畵像)을 ‘능력 생산적 자연의 등가물’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주관에 의한 과학기술적ㆍ산업사회적 당위가 우리들의 생존환경에 초래한 자연환경의 오염과 파괴에 직면할 때 예술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하여 그러한 소박한 견해에 만족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물론 인간은 능력 생산적 자연의 일부이지만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그 자연을 내부에서 침해하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의 예술과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할 경우에 이 사태를 무시할 수는 없다.   단지 자연경관의 보전과 도시환경의 디자인에 예술과 자연과의 적정한 관계만으로는 근대적 주관의 합리적인 논리적 대상의 인식이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단지 능력 생산적 자연의 등가물로서 자연의 생명이나 에너지를 직관하게 할뿐만 아니라 현대에 있어서의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바로 그것을 감성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어떤 예술작품일까?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흘러내리는 아스팔트(Asphalt_Rundown), 1969                      리차드 롱(Richard Long), 걷는것에 의해 만들어진 한개의 선(A Line Made by Working), 1967    인간과 자연과의 부정적인 관계와 긍정적인 관계를 각각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대지미술로 저명한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1938-1973)의 《흘러내리는아스콘》와 리차드 롱(Richard Long, 1945-)의 《걷는 것에 의해 만들어진 한 개의 선》을 예로 들 수 있다. 전자는 도회의 한구석에 방치된 자갈이나 진흙의 퇴적물 위로부터 덤프트럭에 적재된 아스콘(asphalt concrete)을 흘려 떨어뜨리는 작품이다.   그 검은 점착성 물질은 부란(腐爛)한 비탈진 사면에 쏟아 부어 천천히 흘러내리며 침식되어가는 작품이다. 마치 엔트로피(entropy) 증대의 양상을 보이듯이 점차로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정지하게 된다.   산업용재로서의 아스팔트는 석유정제의 잔재로 입수되지만 천연의 지층에서도 찾아내 진다. 스미슨 자신은 작품을 통해서 산업자원의 낭비나 생태계의 보호 등에 대하여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현대 아스팔트의 하이웨이가 엔트로피의 증대를 향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함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R. Hobbs, Roert Smithson ; sculpture,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81)   후자는 ‘들판을 사람들이 오가는 동안에 평평한 풀밭이 햇볕을 받아 하나의 선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그것은 대지와 풀과 햇볕과 인간으로부터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그 이외의 재료는 필요 없고 대지를 침해할 일도 없다. 그러나 다른 시간, 다른 기상 조건, 다른 정신상태에서 걸으면 그때마다 대지 위에 다른 풍경을 연출하게 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고정된 객체로서 세계의 부가물이 아니다. 걷고 있는 동안 만들어지고 있는 그 작품도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을 가지고 있지만 영원불변한 형은 아니다. ‘보행자의 발자국은 대지의 표면을 가로질러 가지만, 대지가 그 보행을 받아들이며 형체를 옮겨 가고 있는 것이다. 대지는 예술작품의 길동무가 되고 예술작품이 세계를 향수할 때에는 대지도 또한 예술작품과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R. Hobbs, Robert Smythson; New York; Cornell Unoversity Press, 1954.) 자연 환경. 그것은 단순한 능력 생산적이며 단순한 소산적 자연도 아니고 대상화된 풍경으로서의 자연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다른 생물과 함께 그 안에서 출생하여 거기에 의존하며 그 안에 살고, 그 안에서 죽어 가는 곳, 인간이 그것을 풍요하게 하거나 황폐하게 하면서 어떠한 형태로 그것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남겨 가는 곳이다.    이 환경이 인간에 의해 오염되어 파괴된 상태로, 혹은 인간과의 친화적 상태로서 스스로 그 일부가 되어서 눈으로 보이도록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스미슨이나 롱에 의해 실천하고 있는 환경예술이다. 이러한 환경예술을 종언하고 있는 근대풍경화를 현대예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를 개시하는 현대예술을생기하면서 예술의 본질을 사고해야 할 미학도 환경미학으로서 기술과 같이 단순한 경관 보전이나 도시환경 디자인의 미학이 아닌 근대과학기술의 지배 하에 있는 현대환경에 있어서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근원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컬럼/연재/인물
    2022-04-12
  • 연재 제5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글로벌문화신문] 이 당시에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 중에서 일부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친구는 실업고교에 장학생으로 가고 집안이 부유한 친구들은 일류 인문계 고교에 가는 것으로 대개 진로를 결정하고 있었다.    이때 필자는 상업계 고등학교로 진로를 정하고부터 걱정은커녕 그런 곳은 눈 감고도 들어갈 수 있다는 자만심에 소위 껄렁한 친구들과 휩쓸려 다니면서 여자애들을 만나고 노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렇게 신나게 보냈던 시간들이 시험을 치루기 이틀 전까지 계속되었으니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시험을 치르면서도 지금까지 놀던 말초적인 행위의 짜릿함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 뿐 제대로 문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마음을 추슬러 봐도 정신이 이미 마음을 떠난 듯 혼란스러웠다. 시험 결과는 당연히 반들반들한 미끄럼틀에서 신나게 미끌어지듯 시원하게 불합격이었다. 결과를 받아 들고는 마약에 취한 사람처럼 단지 몽롱할 뿐이었다. 주위의 다른 친구들의 사정을 알아보니 실업고에 장학생으로 간 친구들은 100% 합격이었다. 그러나 일류 인문계 고등학교에 응시한 친구들은 모두 불합격이었다. 그때 필자 마음속엔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란 말이 있듯이 묘하게도 친구들의 불합격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말이 위안이지 본인이 고교진학에 일차 시험에 실패했으니 창피해서 누구에게도 얼굴을 내밀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연이어 2차 시험을 위한 원서접수를 했으나 조금도 반성 없이 지금까지의 방종하게 놀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아무 준비도 못했으니 2차 시험 결과도 처참한 불합격이었다.       다시 소문을 들어보니 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공부 잘한다는 친구들 모두가 필자처럼 2차에서 불합격하였다. 사실 깡촌과 대도시 학생들의 학력 차이였건만 이번에도 역시 친구들의 불합격이 필자에게는 구세주가 된 것처럼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친구들도 필자처럼 생각했는지 모르겠으나 왠지 창피한 마음이 들어 쑥스러웠다. 이후 경제적으로 부유한 부모님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친구들은 재도전을 위해 우수학원에 적(籍)을 두고 재수의 길을 준비했다. 그러나 필자는 1, 2차 모두 낙방을 했으니 패잔병처럼 풀이 죽어 귀향길에 올랐다.   집에 돌아와 한참 동안은 문밖으로 고개 한 번 내밀지 못하고 방구석을 굴러다녔다. 하루는 우연히 우체부 아저씨가 동장님 댁으로 배달하는 신문을 중간에서 필자가 펼쳐 보게 되었는데 이게 웬일이야, 고등학교 추가응시 모집공고가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가. 필자는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기분이었다.   바로 어머님께 책을 구매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돈을 얻어서 응시를 하게 되었는데 필자와 입장이 같은 응시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비상한 각오로 최선을 다했으나 실력은 실력, 3차까지 낙방을 하게 되었다.   별 수 없이 고교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독서에 빠져들게 되었다. 제법 많은 양의 책을 읽었고 이때 읽은 책 속 위인들의 생애를 보고 다시 용기를 얻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공하는 사람은 항상 준비하는 사람이다.” “남들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하고, 혁신해야 한다.” 등의 명귀를 새기며 이때부터 긍정적인 생각과 끈질긴 자신감으로 어려움을 돌파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이리라. 그리하여 모든 계획을 세울 때나 앞이 캄캄하여 보이지 않을 때 가슴에 새기는 격언이 있으니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보고 가장 넓게 본다.” 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이다.   연재 제6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인물
    2022-04-04
  • 연재 제4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글로벌문화신문] 큰 바위 얼굴을 보며 큰 꿈을 꾸다   부모님은 학하리로 이사하시면서 할아버지로부터 달랑 5마지기의 땅뙈기를 받아왔으니 소출이 갑자기 줄어들게 되어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재산은 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가을 수확 철이 지나고 나면 과거와 달리 일거리가 거의 없었던 관계로 같은 마을에 사시는 분들과 동네 사랑방에 모여앉아 노름을 하게 되었고 그 빈도가 잦아질수록 그나마 애써 농사지어서 모은 재산이 하나 둘씩 빠져 나가게 되었다. 결국 일 년 농사를 온통 말아먹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런 세월이 흐르면서 모아둔 돈도 바닥이 나고 생활은 겨우 끼니만 거르지 않는 정도였으니 자식들 교육은 당연히 등한시될 수밖에 없었다. 자식은 부모 곁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효도나 잘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특이한 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은 대부분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아 초등학교만 나오는 것이 전부이고 다만 장남인 큰형님만 겨우 중학교를 나올 뿐이었다. 큰아버지의 자식들은 대부분 대학을 나와 윤택한 사회생활을 하는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이러한 가운데 필자도 초등학교를 입학하게 되면서 어린 마음에도 가난의 서러움이 서서히 느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도 저 멀리 낙동강 너머로 보이는 금오산의 능선을 바라보면 사람 얼굴의 라인이 확연히 드러나는데 이마와 코, 턱의 윤곽이 뚜렷했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항상 필자를 지켜보면서 인자한 웃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편안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릴 때 읽은 미국작가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소설 속 큰 바위 얼굴에 대한 희망과 동경심으로 금오산의 얼굴라인이 마치 큰 바위 얼굴처럼 어린 가슴 속에 각인되었다. 그 후 큰 바위 얼굴의 정기를 받아 큰 인물들이 나온다는 전설대로 주위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이 나타나고 있음에 그나마 위안을 받으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초등학교 시절을 올곧게 보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집 논은 장마가 지면 홍수로 인해 낙동강 물이 범람해서 일 년 농사가 결딴이 나곤 했다. 그럴 때면 제대로 쌀밥 한번 못 먹어보는 건 다반사고 춘궁기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겪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늘 호박범벅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아 어머니에게 ‘우리도 밥 좀 먹을 수 없느냐’ 고 많이 보챘던 기억도 있다.    우리 가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필자가 윤달이 든 3월에 태어나 생일이 여러 해 만에 한 번씩 돌아왔기에 더더욱 생일상의 쌀밥 근처에는 가보질 못했다.   중학교에 진학해야 할 때가 다가왔으나 집안형편에 갈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외삼촌께서 손위 처남인 아버지에게 마지막 아들인 데다가 공부도 잘한다고 하니 중학교를 보내주라고 하셔서 아버지는 시골에서 보내겠다고 약속을 하신다.   중학교를 다니면서 혼자서 집 뒤편에 있는 천생산을 자주 오르곤 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과 싸워서 연전연승을 했던 곽제우 홍의장군이 진을 쳤던 산성이 있는 곳이다.   계곡이 제법 깊고 물도 많아 혼자서 조용한 사건을 보내면서 홍의장군의 애국심을 가슴에 새기기도 했다. 이때 역사 속에서 배운 애국이라는 개념이 지금의 출산장려운동을 하는 데 큰 동기부여가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아울러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으나 또 고등학교를 갈 수가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필자가 중학교를 입학할 때는 일류 인문계 고등학교를 거쳐서 서울의 소위 일류 대학교로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실제 필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 중의 하나는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이고 또 하나는 삼류 인문고 장학생으로 가는 것이었다. 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전선으로 바로 가는 것도 탐탁치 않았지만 삼류 인문계 고등학교 장학생으로 가는 것도 자칫 인생의 출발점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정하기 쉽지 않았다.   오래 고민하다가 차라리 실업계를 가서 빨리 취직을 하고 돈을 벌어서 대학을 가는 것으로 진로를 정하였다.   연재 제5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인물
    2022-03-26
  • 연재 제3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글로벌문화신문] 증조할아버지는 유생으로 꽤나 유명했던지 그 당시 나름 양반입네 하는 사람들도 마을 앞길을 지나갈 때면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할 정도였으니 뼈대 있는 선비인 것 같다.    2남 3녀의 장남이셨던 큰할아버지께서는 일제 강점기 시절에 평양의학전문학교(현,평양의과대학)를 나와서 가까운 선산군 해평면에서 병원을 개원하여 의술을 펼치셨다.   그러나 필자의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장남만 중요시하여 교육을 시키는 시절이었기에 차남으로서 학교문턱에도 못 가보셨다고 한다. 37마지기나 되는 많은 농토를 두 사람의 머슴과 함께 농사를 지었으니 그 고됨과 부지런해야 함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꼬장꼬장한 선비의 집안에서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당시에는 부모가 혼처를 구함에 매파가 몇 번 양가집을 왔다 갔다 하며 중매로 맺어 준 배필과 결혼을 하는 것이 전통적인 풍속이었다.   그런데 제일 큰누나였던 모친이 연애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를 아신 할아버지께서는 당연히 노발대발하시어 양반 집안 꼴이 말이 아니라면서 펄쩍 뛰셨다. 더 이상 험한 꼴을 보지 않겠다고 하시며 1년간을 대구로 훌쩍 떠나시어 결혼식에도 참석 안 하셨으나 그 이후 모친이 자식들을 잘 낳아 키우는 것을 보시고 화를 푸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부모님은 5마지기만을 상속(?)받아서 7남매를 이끌고 고향을 떠나 일면식도 없는 이십 리 길 떨어진 무연고 마을인 칠곡군 학하리로 이사를 하신다.   당시 학하리의 집은 필자가 태어나고 몇 년이 지날 무렵부터 마을에서 청와대로 불리었는데 왜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본채가 아마 당시 오지마을의 촌구석에서 보기 힘든 큰 기와집이라 그리했을 것 같다. 사랑채는 머슴이 사용하는 초가집이었는데 비록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아 퇴락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그 자리에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다.     필자의 모친은 그 당시에도 많은 9남매의 자식들을 낳은 탓도 있었겠지만 아버님을 도와 농사와 살림을 하다 보니 제대로 산후조리를 하지 못해서 몸이 많이 약해지면서 농사일은 접으시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셨다. 그때의 어머니들 말씀을 들어보면 아침에 해산하고 쉴 틈도 없이 오후에 새참을 준비하여 들로 논으로 나가서 농사꾼들을 먹였다고 한다.   세대차가 난다 하겠지만 산후조리원에서 도우미들에 둘러싸여서 산후조리를 하는 요즈음 산부들이 들었으면 기절초풍할 소리가 아니겠냐 싶다. 요즈음 말로 라떼~~ 하면서 꼰대소리라고 할 텐데 당시 현실이 그랬다고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이때 우리 엄마들의 가사노동을 생각해 보면 산후조리는 물론 그 엄한 시월드(?)속에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았을 터이다. 우리나라가 아직 세계최빈국이었을 때 어떤 풍물사진에 사오십 대의 여자 농부 셋이서 어깨에 소의 멍에를 지고 앞장서고 농부가 뒤에서 쟁기로 밭을 가는 모습을 찍은 것이 있는데, 이 당시 삶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요즈음도 인구대국이 경제대국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당시도 노동력을 경제력으로 생각했던 시절이었으니 자식들이 많은 게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요새 젊은 부부들이 들으며 대경실색할 소리겠지만 “사람의 먹을 복은 하늘이 낸다”는 인식하에 다산에 대해서 별로 걱정을 하지 않은 시절이기도 했다.   자식농사만이 남는 장사라는 말이 있듯이 그 당시 노동집약적 농경사회로서는 노동력이 담보되는 자식이 많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던가 싶다.   필자는 태어났을 때 4.5kg정도의 덩치로 크게 태어났다 하여 대생(大生)이라 했고 한편으로는 검은 코끼리처럼 크다 해서 대상(大象)으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피부가 좀 검은 탓에 언뜻 보면 흑인 혼혈아처럼 보인다 하여 모친의 불륜을 의심하기도 했다는데, 당시에는 한국전쟁으로 많은 흑인병사들이 전투에 참여했고 정전협정 이후에도 각 지방에 미군부대들이 많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 첫돌에 뒤집기를 하고 두돌이 다 되어서야 겨우 일어섰다 하니 발육도 여타 아이보다는 한참 느린 게 분명했다. 때문에 정상적인 아이로 성장을 할까 걱정도 많이 했다고 한다.   후일담이긴 하지만 얼굴색이 남보다 검었던 관계로 회사를 창업하고 영업상 해외여행이 잦았는데 한번은 외국에서 귀국했을 때였다.   화물을 찾아 출구로 나오는데 공항근무요원이 나에게 다가와 “Hey, this way, please.” 하여 무슨 검사라도 할 것이 있다는 뉘앙스로 다른 통로로 데리고 가려는 듯해서 한참을 웃었던 적이 있었다.   근무요원은 아마 필자를 필리핀등지에서 무슨 고가품 밀수나 마약운반(?)이나 하는 외국인으로 오해해서 그리했을 것이라 추측된다. 연재 제4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인물
    2022-03-21
  • 연재 제2편 박희준 이사장, 깡촌에서 9남매 중 8번째 대생이로 태어나다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그래, 우리는 폭탄이었다. 요새 한 번 더 터져주기를 고대하는 베이비 폭탄의 세대 그것도 1년 차다. 10년 동안 무려 718만이 쏟아졌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는 이 한반도의 좁은 땅덩어리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마치면 황소 고삐 잡고 풀을 먹이려 뒷산에 올랐고 재수 좋으면 큰 칡뿌리를 캐서 입술이 시커멓게 되도록 단물을 빨았지, 집에 내려와서 부엌에 들어가 보면 쌀이라고는 한 톨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보리밥에 고추장 쓱쓱 비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 그릇 뚝딱했지. 그러기를 60년. 이젠 세계 강대국 소리를, 선진국소리를 듣는다. 이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연륜이 되었다. 초저출산으로 오늘의 현실은 녹록치 않다. 10여 년 전 모 여성국회의원은 저출산폐해의 폭발 위력이 핵폭탄에 맞먹는다고 했다. 이왕 터질 핵폭탄이라면 베이비 핵폭탄이라도 터져주길 바라는 이 마음, 출산장려 반대편의 여성들에 의해 멍석말이 난장에 맞아 죽을 생각이 될까.   필자가 태어난 곳은 경북 칠곡군 학하리이다. 지형적으로는 금오산, 유학산, 천생산이 병풍을 두르듯 자리잡고 있는 산골 오지이다. 산줄기가 빼어나며 계곡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은 맑아 비록 농토는 많지 않으나 사람들이 옹기종기 부락을 이루어 평화롭게 살기에 아주 좋은 마을이었다.   지금은 구미국가산업단지 조성으로 인해 산업도로가 잘 뚫려 있지만 당시로는 교통이 아주 불편한 심산유곡이었다. 한국전쟁 때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국가의 존망을 걸고 양측에서 사력을 다해 전투를 벌인 다부동 전투의 격전지이기도 했던 곳이다.   또 칠곡군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국무총리를 세 분이나 배출한 군이기도 하다. 지척에 있는 구미에서는 금오산 정기를 받아서인지 대통령이 두 분이나 나오셨고 또 국가의 주요한 인물들이 많이 태어난 인재의 산실이었다.   실제로 경부선 열차를 타고 구미를 지나가다 보면 신기하게도 햇살을 등진 금오산 능선의 실루엣 모양이 사람의 옆얼굴과 무척 닮아있다. 이 모양을 보고 이 지역에서 큰 인물이 난다고 하는 속설이 생겨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의 포성이 멎은 지 2년, 1955년에 생애 첫 힘찬 울음을 터트리며 9남매 중 8번째로 그것도 4남 5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나 이 세상에 출생신고를 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과 친척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내력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0여 년 전 갑오개혁 때라고 알고 있다. 8대조 조상님들이 정변으로 인해 가문에 미칠 화를 피하기 위해 경북 의성에서 처가가 있는 이곳 칠곡군으로 몰래 가솔들을 이끌고 피신한 것이라고 한다. 연재 제 3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인물
    2022-03-18
  • 연재 제1편 박희준 이사장의 다산 코리아 행복 코리아를 꿈꾸며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연재2  다산 코리아 행복 코리아를 꿈꾸며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저출산·고령화 문제 극복에 뜻을 둔 지 어언 20여 년. 제약회사 (주)씨에이팜을 창립하여 임산부들을 위한 튼살크림을 개발한 후 오늘날까지 둘째 아이면 50%, 셋째 아이면 무료로 제공하면서 출산장려운동에 매진하였으나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드디어 합계출산율 0.84명이라는 세계초유의 거대한 인구절벽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학자들과 연구소에서는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최초, 세계유일의 0.84명이라는 초저출산율로 이대로 가다가는 2500년 언저리에서 지도상에 우리나라가 아주 사라지게 된다고 합니다. 더구나 2020년 코로나라는 괴질 때문에 2021년의 합계출산율은 0.7명대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합니다. 정부와 관련부처에서도 노심초사 정책을 수립하고 있지만 비영리민간단체인 (사)한국출산장려협회에서는 국가비상사태를 맞은 의병처럼 일어나 저출산 인식제고에 한 축을 담당하고자 이 한 권의 졸작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욕심 같으면 남녀노소를 망라하고 전국적 독자층을 구성하여 국민의 필독서를 만들고 싶은 마음 굴뚝같습니다. 그러나 그도 안 되면 우선 나라의 허리이며 미래를 짊어지고 나아갈 청년세대에서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일독해 주시어 정말 인구절벽에 가로막힌 우리나라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마음가짐이 되어야 하는지를 한번 숙고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리고 저의 졸작에 대해 추천의 말씀을 써 주신 김형석 명예교수님, 오웅진 신부님, 법륜 스님, 김호일 대한노인회장, 조영태 서울대 교수님, 이삼식 교수님, 차흥봉 회장님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청년들로부터 또 꼰대소리 하였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라고 생각되나 그래도 우국충정에서 우러난 마음으로 나름 성의를 다해 한번 써 본 것이니 많은 격려 바랍니다.     모쪼록 미래의 기둥인 청년들은 오늘날 현실이 각박하여 살기에 팍팍함에도 부디 용기와 꿈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 곧 이 나라의 든든한 주인이 되어주기를 갈망합니다.   다시 한번 건방진 말 같으나 간곡하게 한 말씀드리면, 사단법인 한국출산장려협회가 뜻을 세웠던 출산보국 백년대계 시행의 원년이었던 지난해 코로나라는 괴질로 협회의 오온캠페인 선포식이 개최되지 못하여 연기된 바 있습니다.    2021년 4월의 7일의 서울시장, 부산시장선거와 내년도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정부와 지자체의 저출산·고령화문제에 대한 정책이 바로 서지 못하면 이 문제는 영원히 회복 불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본 협회에서는 이러한 풍전등화, 누란지위의 중차대한 시기에 국민필독서로서 이 한 권의 책을 가슴에 품고 대국민 홍보에 나서지 않을 수 없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하여 정부와 국민 모두가 대오각성하는 자세로 후손들에게 행복한 대한민국을 물려주기 위하여 진력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적 재앙인 저출산·고령화문제 해결에 대해 국정을 운영하시는 대통령님과 정부각료들도 맨주먹으로 다시 건국한다는 심정으로 돌아가 이 과제를 국정 제 1순위에 두고 정책수립에 매진해 주기를 바라오며 또 이 어려운 난제에 관심을 표할 사람들에게 지침서가 되고 나아가 온 국민의 필독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엮습니다. 아울러 참고도서 저자 및 여러 가지 미디어에서 소신을 한 말씀씩 해주신 석학 여러분들과 이를 정리하여 기고 혹은 방송해 주신 기자님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출판에 앞서 많은 가르침을 주신 조경애 글쓰기협회 코치님과 멘토링을 해 주신 친구 진무현, 이근우, 이수현, 김낙기, 김영한 제군들, 협회 홍보위원장 박익희, 사무총장 이금재, 재무총장 유지백, 대구지회장 최효점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2021년 3월 10일     - 추천사 * 문용린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교육부장관 교육감 심각한 국가적 문제를 평이한 문장으로 풀어간 저자의 솜씨가 놀랍습니다. 한 권의 책을 통하여 국가에 대한 우국충정과 끝없는 열정으로 눈앞에 닥친 인구절벽의 현실을 전 국민에게 전달해 보려는 진심은 분명 통할 것으로 믿습니다. 젊은이들의 저출산·고령화에 대한 심각성을 일깨우는 교양도서로도 가치가 높다 할 것입니다. 사단법인 한국출산장려협회와 저자의 앞날에 꽃길만 펼쳐지기를 기대해 보며 또한 저자의 소망대로 이 책을 많은 국민들이 탐독하시어 국가적 난제해결에 큰 계기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 관심이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연재 제2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인물
    2022-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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