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연재/인물Home >  컬럼/연재/인물
-
연재 11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싯크릿"
박희준 이사장 아이고 사장님, 우린 뭐 먹고 살라꼬예? [글로벌문화신문] 이렇듯 회사운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점차 안정되어 갈 무렵, 회사의 이미지 제고를 위하여 심벌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그전부터 벌써 본사제품으로 출산장려 이벤트를 시행하여 둘째 아이면 50% 할인, 셋째 아이면 100% 무료로 상품을 배송해 주던 때라 당연히 모성이나 아이 쪽으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 모성을 상징하는 말에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함함한다’라는 것이 떠올랐다. 캐릭터로 고슴도치를 결정하고 스스로 어설프나마 고슴도치 어미와 새끼를 조합, 디자인하여 전문회사에 의뢰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귀여운 맘비 케릭터가 탄생했다. 이 캐릭터 제작에 당시 4,000만 원이라는 큰돈이 들었으나 필자가 지금 봐도 아주 귀엽고 깔끔하여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이 고슴도치 모녀는 우리 회사의 심벌로서 회사의 현관문 앞에 붙여져 오고 가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또 배웅하고 있다. 이 고슴도치 캐릭터가 완성된 후에 보다 적극적인 홍보방법을 찾았다. 먼저 광고를 통한 출산장려운동을 펼치면서 공익과 사익의 가치를 공유하고자 TV 공중파 광고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광고비가 높아서 일단 잠시 보류하고 다른 방법을 찾던 중에 중기청에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방송광고공사를 통해 광고 지원정책을 펼친다는 내용을 듣고 신청하여 바로 선정이 되었다. 2008년부터 3년 가까이 KBS2, MBC, SBS 공중파를 통해서 ‘다산코리아, 행복코리아, 프라젠트라가 응원합니다’로 해서 광고를 했다. 그 와중에 IBK기업은행 행장이 우연히 TV에서 우리 출산장려 광고를 보고 연락이 오고 얼마 안 있어서 기업은행과 당사가 제휴협약서를 체결하게 되었다. 은행 측에서 프라젠트라 임산부 튼살크림과 베이비 제품을 약 2억 원어치 구입해서 임산부 대상의 우대금리 적금상품을 파는 이벤트에 경품으로 내걸어 신청자 6,000명에게 무료로 제공했다고 한다. 당사는 감사의 뜻으로 자막에다가 ‘IBK기업은행과 주식회사 씨에이팜이 출산장려운동에 함께 동참하고 있다’라고 띄워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광고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사건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회사 임직원들이 출산장려운동도 좋지만 셋째아이 출산에 무료로 제품을 보내주게 되면 막대한 제품비용과 배송비를 부담하게 되는데 ‘우리는 뭐 먹고 살라꼬예’ 하며 왜 정부의 공익사업에 우리가 참여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불만 섞인 항의를 쏟아 낸 것이다. 하지만 좀 있어 기업은행의 구매 내용을 보고서는 다들 찬성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두 번째로는 IBK기업은행 측에서 자막홍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면서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송해를 모델로 한 은행상품광고가 대박이 났다는 후일담이 나오기도 한 것이었다. 연재 제12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이상만 성균관 전례위원회 연구위원 컬럼, 사도(師道)가 살아야 도덕(道德)이 일어난다
이상만(성균관 전례위원회 연구위원) [글로벌문화신문] 지난 달 어느 젊은 여교사가 학생지도에 힘쓰다가 학부모 대화와 교실 안 실제 상황 사이의 부조화에서 번민하던 끝에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여 생을 마감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급기야 전국교사 일동 주관으로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3만여 명의 교사가 뜨거운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섰다. 새내기 교사의 고통과 죽음을 평소에 그 누구보다 피부로 느껴왔기에 교실의 붕괴와 함께 교권의 추락을 세상에 알리려는 고뇌의 몸부림이다. 이는 일시적 시위가 아니다. 오랜 세월 누적된 교육계의 총체적 비리(非理) 현상을 동료 교사들이 직접 나서서 교육 혁신의 불가피성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참으로 큰일이다. 이대로 방관하다가는 교사를 더 죽게 만드는 공범자가 된다. 교육 당국은 지금의 드러난 현상적인 문제점을 철저히 원인 분석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교육 백년대계를 다시 세워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지난 백 년의 역사를 잠시 되돌아보고, 교육 혁신의 본질 파악에 초점을 맞추어 주요 참고사항을 언급한다. 교사는 예로부터 천직(天職)이었다. 50년 전만 해도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못했다. 그만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뭣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데 알게 모르게 교편(敎鞭)을 잡아 도우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라도 자식 교육만큼은 마을이나 이웃 마을의 선생을 찾아서 맡겼다. 서당의 훈장은 마을마다 있어서 그 연령대에 맞는 교재를 선정해서 지도하였다. 15세가 되면 향교나 서원에서 학업에 열중하다가 20세 전후에는 중앙의 성균관 사마시(司馬試)에 응하여 진사(進士)나 생원(生員)이 되어 본격적으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학습 과정을 밟다가 임금이 친히 성균관 문묘(文廟)에 성현(聖賢)을 찾아뵙고, 명륜당에서 베푼 알성시(謁聖試)나 대과(大科)를 보아 관료로 진출하여 조정의 신료로서 업무를 맡는다. 그리고 나라의 기둥과 대들보로 맡은 바 책무를 수행하면서 일생을 바쳤다. 이런 선비정신으로 900여 회 이상의 외침에도 버텨내어 은근과 끈기로 조선왕조 500년을 이끌어 왔다. 여기서 임금과 스승과 부모의 하늘 같은 은혜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금쪽같은 말씀이 생겼고, 가정과 사회와 나라에 임하면서 부모에 효도하고, 스승에 예를 갖추고, 나라에 충성하는 효(孝)와 예(禮)와 충(忠)이라는 고귀한 정신문화의 유산을 집안 대대로 전통으로 이어 왔다. 이때의 기본 교재(敎材)는 자연의 이치와 현상 세계를 집약하여 전해주는 추구(推句), 역사와 문화의 시원과 발전과정을 담아 청소년을 일깨우는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啓蒙),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小學) 등이 있고, 동양의 역사와 문화를 사자성어로 압축한 천자문(千字文)과 세상의 윤리 도덕을 고루 모은 명심보감(明心寶鑑), 동방의 천자(天子) 요순(堯舜)과 성현(聖賢)인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담은 사서오경(四書五經) 등이다. 한마디로 자연의 이치와 인성교육의 기본 핵심을 쉽게 풀어주어 사람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지도하는 선생이나 학생은 늘 진리(眞理)를 가까이 접하며 도(道)의 경지로 나아가 지행합일(知行合一) 하는 곧은 선비정신과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하여 전문성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백성을 친절하게 이끌고, 경로효친(敬老孝親)의 자세로 안팎을 두루 편안케 하며 교학상장(敎學相長) 하는 참교육의 모습을 견지하였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권력을 남용한 일부 탐관오리도 있었고,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었거나 세도정치에 몰두한 정객들도 있었다. 결국, 19세기 말 20세기 초엽,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에 온 백성은 무력을 앞세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는 뼈저린 국치(國恥)를 당했다. 이때도 전국의 훈장이 제자를 이끌고 과감히 항일(抗日) 의병(義兵)의 선봉에 서서 국내와 만주, 상해, 중경 등 외지에서도 국권 회복에 전념하였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 천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였다. 이후 서양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패권을 다투다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3년 후 휴전협정 후 폐허 속에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였다. 대통령 측근의 부정부패가 원인이 되어 1960년 민주 학생혁명이 일어났고, 1961년 군사정부가 들어서서 경제개발에 심혈을 기울였고 한글 전용시대를 열었다. 서구문물을 제도화하여 영어학습을 기본으로 시켰고, 과학기술교육에 진력하였다. 지속해서 정부 주도의 산업화에 치중함으로써 큰 성과를 내었으나 부작용으로 땅에 떨어져 가는 인륜 도덕을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70년대를 기점으로 서구화 물결 속에서 물질적 가치추구와 개인주의 성향이 심해지자 한국적 민주주의 논란이 대두하며 사라져가는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美風良俗)과 전통문화를 재인식하자는 민족주체성 확립에 관심을 끌게 하였다. 이때 고구려 소수림왕 372년에 건립한 태학(太學)의 오랜 전통을 계승하는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서도 내외의 바람과 성원에 힘입어 최초로 여성유도회(회장 조애영)가 창립하였고, 한국청년유도회(회장 최창규)가 이어 창립하여 쇠퇴하던 유교 문화와 유도부흥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이른바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라 하여 인재를 길러 널리 배출하고, 풍속을 순화하여 고르게 한다는 성균관(成均館) 본래의 교육 정신을 앞세웠다. 전국 1천만 유림이 나서서 도덕성 회복운동을 전개하여 황금만능주의 가치관의 폐해를 막고, 인륜 도덕이 살아나는 정신과 물질이 조화를 이루는 새 시대의 가치관 정립에 온 힘을 모아 사회정화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다. 현재도 전국 주요 향교 명륜당에서 방학 기간에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한자, 서예, 생활예절, 전통놀이, 사자소학 등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시도별로 미풍양속 순화를 위한 도덕성회복운동 대회를 개최하고, 명륜대학을 개설하여 관내의 남녀 어른들이 참여하여 노후를 건강하고 보람있게 보내는 삶의 지혜를 체득하도록 힘쓰고 있다. 이러한 성균관, 향교, 서원의 전통문화 현창의 꾸준한 노력의 결실이 나타났다. 최근 성균관, 향교, 서원 진흥법이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통과하였다. 이는 성균관이 일제 강점기에 민족정신 말살 정책으로 집중적으로 탄압받아온 이래 근 백 년 만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합법화 한 것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유구한 성균관, 향교, 서원의 문화 전통을 되살려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일대 반전(反轉)을 이룬 쾌거이다. 이제는 민사부일체(民師父一體)다 이미 2014년 12월에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장 정의화)에서 인성교육진흥법이 국회의원 만장일치로 통과된 바가 있고, 각급 학교와 사회단체에서 인성교육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효(孝)와 예(禮)와 민주시민의 올바른 의식을 장려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문제점이 여기저기서 노출하고 있어서 그 실효성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 중요한 논거의 일단을 지적한다면 법적인 근거는 마련되었으나 교육의 주체인 교사가 대부분 서구식 교육을 전문적으로 수료한 입장이고, 교육정책 입안자나 행정 요원도 같은 시기에 교육과정을 마친 신분이므로 현실적인 문제점은 세밀하게 분석 파악은 하였으나 교육 혁신의 대안 연구나 실제적 체험의 미비로 한계점이 나타났다. 이점을 보완하려면 전통 인성교육의 핵심인 동방의 유학(儒學)과 함께 윤리 도덕교육 과정 및 연수 기간에 적극 동참하여 실제적 체험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즉 ‘근본을 세우면 도덕이 살아난다.’는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이라는 가르침과 ‘옛것을 보듬어 새것을 알아가게 함이 스승답다.’는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와 ‘세 사람이 가면 반듯이 나의 스승이 있다.’라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의 말씀이 <논어>에 있듯이 만세사표(萬世師表)인 공자의 가르침을 존숭하는 성균관, 향교, 서원 등에서 성현의 가르침을 몸소 체득하는 수련 과정을 거치는 기본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전문 교사들도 방학을 이용하여 동양적 전통교육의 참뜻을 직접 익혀서 동서(東西) 학문과 기능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능력개발과 지혜를 습득하여 무엇이 진정 학생지도에 필요한지, 본말(本末) 관계를 숙지하여 학생수업에 적용한다면 새 시대 교사로서 인격과 자질을 재평가받을 수도 있다. 이에 대비하여 성균관, 향교, 서원은 전국 교사를 대상으로 재교육 프로젝트를 성안하여 본래의 교육 기능을 살려서 새 인성교육의 장을 제도적으로 마련하여 널리 학습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꿈많은 여교사가 왜, 그토록 안타까운 결단의 삶을 선택하였을까? 그동안 같은 길을 간 교사가 100여 명에 이른다니 교육 당국은 무엇을 했는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가, 학부모를 탓해야 소용이 없다. 오늘의 학부모는 6.25 전쟁 후 경제재건의 격동기에 허리 졸라매고 잘살아보자고 헌신한 부모가 낳은 세대이다. 상식적으로 좋은 교육환경을 찾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은 알아도, 교육부재로 몸소 신중한 가정교육을 보인 맹모단기(孟母斷機)는 잘 모를 수가 있다. 문교 행정의 조변석개 식으로 아침에 변경하고 저녁에 바꾸는 입시 위주의 교육정책으로 이미 교육불신을 체험하였고, 그에 따라 본의 아니게 치맛바람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학부모 세대이다. 젊은 여선생은 죽어서도 말하고 있다. 한 꿈많은 여교사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을 추모하는 3만 아니 5만 10만의 교사가 하나같이 검정 옷을 입고 진짜로 죽기 살기로 사생취의(捨生取義) 정신을 발휘하여 나라의 참교육 혁신에 나서고 있다. 다음으로 이 나라 교육행정의 책임을 맡은 관료들이 공무원 신분으로서 마땅히 심사숙고하여 교육계의 원로와 뿌리 깊은 교육의 본당으로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이 엄연히 존재하는 성균관(成均館)의 자문을 구하면 일이 쉽게 풀릴 수 있다. 이미 땅에 떨어진 사도(師道)를 되살리기 위하여 교사의 목소리를 국민의 함성으로 받아들여 민주시대에 알맞은 국가백년대계의 큰 그림과 방안을 마련, 제시하면 교육이 다시 살아난다. 이제는 집사부일체를 넘어서 민사부일체(民師父一體)가 답이다. 백성과 나라를 구하려 백의종군(白衣從軍)한 성웅 이순신의 호국 정신이 말한다. 필사즉생(必死卽生)!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지니,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말라!
-
연재 제10편 박희준 이사장의 "성공싯크릿"
박희준 이사장 필자가 사업설명회, 학회 홍보 등을 끝낸 다음 날 투자예정자들은 각자의 지역으로 내려가기 위해 고속터미널에 모였는데 필자의 열정과 이력을 알고 난 뒤 ‘3유(有) CEO’로 불렀다고 한다. 제약회사 재직시절 ‘부지런함’과 ‘신용’이 최고였고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면 하는 사람’ 이라는 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다가 당시 국내 1위 소화제 베아제의 PM 경력을 알고서 제품의 품질까지도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 10명으로부터 300만 원에서 2천만 원까지 모두 5천800만 원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이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일단 10평의 사무실을 얻고 집사람과 창업에는 성공한 것이었다. 회사의 명칭은 (주)씨에이팜으로 정하였는데 임상(Clinic), 대체(Alternative), 의약품(Pharmaceuticals)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이는 한방과 양방의 처방에 융합기술을 접목해서 의약품, 화장품과 건강식품의 개발을 추진한다는 기업가 정신을 구현한 것이다. 그 후 인터넷 홈페이지를 구축하면서 병원과 약국 그리고 유아용품 판매점에 제품을 비치했다. 더 나아가 홍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육아 잡지사에 6개월 뒤 돈을 벌어서 갚아 나가겠다며 대표를 설득했고 희한하게도 이례적으로 외상으로 광고까지 시작하게 됐다. 책 표지 맨주먹으로 창업을 했으니 준비할 일이 좀 많았겠는가, 우선 홈페이지부터 만들어 임산부들에게 알려야 했으니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임산부의 의견에 댓글을 다느라 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였다. 참으로 힘이 들었으나 점차 주문이 늘어나는 재미에 빠져 피로를 느낄 틈이 없었다. 영업은 필자가 맡았으나 상품배송이나 운반 기타 업무는 몽땅 집사람 몫이었으니 말이 좋아 부사장이지 잡역부도 그런 잡역부가 따로 없었다. 사무실은 조그만 빌딩의 4층에 위치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 공장에서 올라오는 그 무거운 상품박스를 4층까지 여린 몸으로 올리고 포장해서 다시 내려보내야 했으니 그 힘이 오죽 들었을까, 하여튼 그 여파로 집사람은 허리통증을 달고 살았고 지금도 척추협착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것을 생각하면 늘 죄를 지은 듯 미안하다. 연재 제11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연재 제9편 박희준 이사장의 "성공싯크릿"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그래, 일단 판을 벌리고 보자 누구나 다 아는 중국의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유비, 관우, 장비가 망해가는 후한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도원결의하고 유비의 고향인 누상촌을 중심으로 의거군병을 모았다. 하여 모인 사람은 300여 명의 농투성이들로 당연히 군사라고는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어쨌든 모병장을 보고 모인 군사이니 당연히 군용자금, 식량, 군복, 창검들의 무기, 기치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유비라고 해야 돗자리 짜서 팔던 가내수공 소상공인(?)이고 장비 역시 산돼지 잡아 시중에 팔던 도축자영업자(?)이니 말할 필요가 없고 관우 역시 생업은 불확실하나 초당에서 병법서만 읽던 자였으니 돈이 있을 턱이 없었겠다. 이나저나 격문을 보고 사람들은 꾸역꾸역 모여드는데 이 세 형제들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보초를 서던 병졸이 뛰어 들어와 군영 앞으로 일단의 상인들이 말 수백 필과 상당해 보이는 양의 피륙과 재물들을 싣고 지나간다는 보고를 올리었다. 이 보고를 들은 장비는 당장 이 마필과 재물들을 탈취하여 군수품으로 쓰자고 하였으나 현덕은 일단 상인들을 만나서 알아나 보자고 하였다. 이때는 후한이 멸망하기 직전으로 전국에서 황건적이 발호하던 시대였다. 현덕은 상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들이 ‘한실부흥을 위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구하고자 군사를 일으켰는데 군대를 운용할 군비가 없어서 곤란하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상단의 우두머리인 장세평과 쏘상이 말하기를 오히려 삼형제를 잘 만났다고 하며 ‘이 어지러운 시절에 자기들도 이렇듯 유랑하다가는 언제 도적들에게 이 마필과 돈을 빼앗길지 모르는데 차라리 의병들에게 줌이 오히려 든든하고 속이 편하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기고 모든 마필과 피륙 등을 넘기고 떠나갔다. 그렇게 그 돈과 마필로 군복과 창검기치를 나름 정비하여 일약 의용군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필자의 현실 또한 이들 삼국지의 삼형제처럼 재창업의 뜻은 세웠으나 당시 일 전 한 푼 없는 상황이었다. 저출산문제가 심각하니 필자 여생의 마지막 봉사로 출산장려운동을 펼쳐야겠다고 인생 목표를 정했으나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그러나 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는 두려움보다는 도전하는 즐거움이 더 컸다. 우선 먼저 전직 회사의 대표에게 프라젠트라 제품의 판매를 제안했지만, ‘마케팅도 어렵고 수익률이 낮을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국내 최초로 튼살크림을 개발했으나 누구 한 사람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마케팅이 문제였다. 자금도, 사무실도, 직원도, 고객도 없던 문자 그대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험한 여정이었다. 당연히 ‘튼살’이란 용어도 직접 만들어 처음으로 사용한지라 아는 고객도 없었다. 돈이 없으니 자본을 어디선가 구해야 했다. 일단은 일을 저질러 보자고 다짐하면서 사업자등록부터 신청하게 되었다. 그렇게 자본금 없이 2001년 7월 회사를 설립했다. 사업설명회를 통해 투자를 받기로 결심하고 전국적으로 대리점 개설을 위해 사업설명회를 열어서 제품을 알리고, 사업 가능성을 설득해 투자 유치를 받아내기로 했다. 이전에 근무했던 제약회사 동료를 비롯해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품 홍보를 위해 부스 사용료 200만 원과 숙박·교통비 등을 위해 총 300만 원이 필요한데, 관심 있는 분들은 30만 원을 내고 사업설명회에 참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전국에서 10여 명이 돈을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지인에게서 사무실을 무료로 빌려 설명회가 끝난 뒤 한 후배는 “제품은 괜찮은 것 같은데 사무실, 자본금, 시장 등 3무(無) CEO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다음 날 모 대학병원에서 열리는 산부인과학회 회의장 모서리에 나름 아담한 부스를 마련하여 홍보작전에 돌입하였다. 필자는 자신이 있었고 그 후 후배의 안타까움을 무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반전이 일어났다. 연재 제10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연재 제8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박희준 이사장 암수술 두 번 정도는 까딱 마이신이지 “사장님, 우린 뭐 먹고 살라꼬예?” “뭐 먹긴, 언제는 굶고 살았나? 신용을 먹고 살아야지. 대중을 상대함에 신(信)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거지. 이 신(信)이 바로 우리에게는 하늘의 신(神)이며 또한 인간사의 의(義)야, 중국 월나라 서시와 당나라 양귀비의 경국지색(傾國之色)도 채 20년을 가지 못하나 믿음은 천년을 가는 거야, 신으로써 덕을 베풀면 덕향만리지.” 평생을 의를 행하며 신뢰를 쌓아 왔고 긍정의 철학으로 탑을 쌓았다. 웬만한 일은 ‘까딱 마이신’. 아찔한 일이었으나 두 번 정도의 암수술은 까딱 마이신이지, 이 정도에 쓰러지진 않아, 이제 또다시 시작이야, 이 험난한 길 30년을 묵묵히 같이 와준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다가오는 금혼식에는 정말 멋있는 파티를 열어 줘야지. 309번의 실패 뒤의 310번째의 성공을 선배의 건강기능 식품회사를 다니며 필자만의 회사를 창업하는 방법을 이리저리 모색하던 중에 고객이었던 한 대학병원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진료실 앞에서 우연히 새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는데 임신부 2명이 대화 도중 “언니, 배만 트지 않는다면 아기를 하나 더 낳고 싶은데 말이야.”라고 말하지 않는가. 배가 터서 아이를 더 이상 가지지 못한다면 산부인과는 환자 수도 계속 줄어들고 당연히 출산율도 떨어지고 말텐데? 그럼 ‘트지 않게만 해 준다면 누구라도 아기를 더 낳을 마음이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 아이템을 찾으면 출산장려운동으로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때가 아마 1995년경이었으니 당시 이미 우리나라는 초저출산의 늪에 깊이 빠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2여 년간 건강기능 식품회사를 운영하는 선배 회사에서 중역으로 근무하면서 ‘튼살 제품’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배 회사의 건강기능식품 판매와 나의 제품 개발 등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아이템의 창조에 대한 열망으로 가슴속에서는 도전의 열정이 샘솟듯 올라왔다. 그러나 막상 여기저기 조사를 해보니 배를 트지 않게 하거나 튼살을 원상회복시킬 수 있는 약품이나 화장품이 전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는 의사들은 임산부의 배가 트는 원인을 유전이라고만 했다. 하지만 임산부의 모친은 배가 트더라도 자식은 트지 않는 경우와 그 반대의 실례도 있었다. 그래서 왜 살이 트는지를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 상품개발의 첫 걸음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피부과 의사들에게도 조언을 구해봤으나 어느 누구 속 시원히 그 원인을 말해주는 전문가가 없었다. 단지 유전적인 성향으로 그리된 것이라는 말만 들었다. 도서관에서 전문서적을 보며 씨름도 했으나 원인을 규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우연하게도 체내에 콜라겐이 풍부하면 피부가 부드러워진다는 점에 착안하였고, 연구를 거듭하던 중에 튼살의 발생 원인을 찾아내었다. 바로 호르몬의 역할로 피하지방층에서 콜라겐이 부족해지고 체내의 태아가 커짐에 따라, 피부가 팽창하다가 탄성의 임계점을 넘게 되면 터지게 되고, 쉽게 말해 균열이 생기는 현상, 즉 튼다는 것을 발견했다. 연재 제9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연재 제7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박희준 이사장 - 갈잎은 No,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 [글로벌문화신문] 하는 수 없이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재충전하여 퇴사 10년 만에 신생 제약회사의 영업부장으로 둥지를 틀었다. 다시 세일즈의 길로 복귀한 것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10배의 매출 성장을 달성하면 퇴직해서 창업한다는 조건으로 약속을 받고 입사했다. 나머지 인생은 사회와 국가를 위해 적지만 봉사를 하며 살기로 결심했고 또 도와주신 분들의 부채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재창업을 하여 성공을 하지 않고서는 별 도리가 없기도 했다. 입사한 제약회사에서의 직책은 병원 담당 부장이었고 영업직원들을 관리하면서 직접 영업도 뛰었다. 낮에는 대학병원 직원부터 원장까지 두루 만났고 야간 방문을 하기도 일쑤였다. 학교법인 병원 측에는 연간 매출액의 10~20%까지 장학금으로 내겠다는 조건도 걸었다. 카피 의약품의 입점이 어려운 상황이라 재단 이사장과 직접 소통을 시도했다. 수차례 문전박대를 받기도 했지만 비서에게는 막무가내로 접근하여 3전 4기 만에야 면담을 하기도 했다. 또 원무과의 직원을 통해 원장 사모님의 생신일을 알아 미리 케익을 준비하고 직접 댁을 방문하여 인사드리는 등 먼저 인간적으로 호감을 쌓는 방식으로 좋은 성과를 얻어 내기도 했다. 이런 철저한 승부근성으로 신생회사는 내가 들어간 지 1년여 만에 10배 이상의 매출을 달성하는 쾌거를 올렸다. 하루는 이를 본 회장이 필자를 불러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한 뒤 보너스로 3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돈 대신 부서 직원들이 품위 유지비를 올리면 무조건 결재해 줄 것과 창업 시에 무이자로 10배를 빌리는 것을 약속하고 방을 나왔다. 2년 6개월 만에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필자는 사직하고 또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 와중에 잠깐 제약업계 선배의 간곡한 부탁으로 부득이 1여 년 동안 건강기능식품이 주 품목인 그 회사에서 중역을 맡게 되었다. 연재 제8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
연재 11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싯크릿"
- 박희준 이사장 아이고 사장님, 우린 뭐 먹고 살라꼬예? [글로벌문화신문] 이렇듯 회사운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점차 안정되어 갈 무렵, 회사의 이미지 제고를 위하여 심벌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그전부터 벌써 본사제품으로 출산장려 이벤트를 시행하여 둘째 아이면 50% 할인, 셋째 아이면 100% 무료로 상품을 배송해 주던 때라 당연히 모성이나 아이 쪽으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 모성을 상징하는 말에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함함한다’라는 것이 떠올랐다. 캐릭터로 고슴도치를 결정하고 스스로 어설프나마 고슴도치 어미와 새끼를 조합, 디자인하여 전문회사에 의뢰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귀여운 맘비 케릭터가 탄생했다. 이 캐릭터 제작에 당시 4,000만 원이라는 큰돈이 들었으나 필자가 지금 봐도 아주 귀엽고 깔끔하여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이 고슴도치 모녀는 우리 회사의 심벌로서 회사의 현관문 앞에 붙여져 오고 가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또 배웅하고 있다. 이 고슴도치 캐릭터가 완성된 후에 보다 적극적인 홍보방법을 찾았다. 먼저 광고를 통한 출산장려운동을 펼치면서 공익과 사익의 가치를 공유하고자 TV 공중파 광고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광고비가 높아서 일단 잠시 보류하고 다른 방법을 찾던 중에 중기청에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방송광고공사를 통해 광고 지원정책을 펼친다는 내용을 듣고 신청하여 바로 선정이 되었다. 2008년부터 3년 가까이 KBS2, MBC, SBS 공중파를 통해서 ‘다산코리아, 행복코리아, 프라젠트라가 응원합니다’로 해서 광고를 했다. 그 와중에 IBK기업은행 행장이 우연히 TV에서 우리 출산장려 광고를 보고 연락이 오고 얼마 안 있어서 기업은행과 당사가 제휴협약서를 체결하게 되었다. 은행 측에서 프라젠트라 임산부 튼살크림과 베이비 제품을 약 2억 원어치 구입해서 임산부 대상의 우대금리 적금상품을 파는 이벤트에 경품으로 내걸어 신청자 6,000명에게 무료로 제공했다고 한다. 당사는 감사의 뜻으로 자막에다가 ‘IBK기업은행과 주식회사 씨에이팜이 출산장려운동에 함께 동참하고 있다’라고 띄워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광고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사건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회사 임직원들이 출산장려운동도 좋지만 셋째아이 출산에 무료로 제품을 보내주게 되면 막대한 제품비용과 배송비를 부담하게 되는데 ‘우리는 뭐 먹고 살라꼬예’ 하며 왜 정부의 공익사업에 우리가 참여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불만 섞인 항의를 쏟아 낸 것이다. 하지만 좀 있어 기업은행의 구매 내용을 보고서는 다들 찬성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두 번째로는 IBK기업은행 측에서 자막홍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면서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송해를 모델로 한 은행상품광고가 대박이 났다는 후일담이 나오기도 한 것이었다. 연재 제12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 컬럼/연재/인물
-
연재 11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싯크릿"
-
-
이상만 성균관 전례위원회 연구위원 컬럼, 사도(師道)가 살아야 도덕(道德)이 일어난다
- 이상만(성균관 전례위원회 연구위원) [글로벌문화신문] 지난 달 어느 젊은 여교사가 학생지도에 힘쓰다가 학부모 대화와 교실 안 실제 상황 사이의 부조화에서 번민하던 끝에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여 생을 마감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급기야 전국교사 일동 주관으로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3만여 명의 교사가 뜨거운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섰다. 새내기 교사의 고통과 죽음을 평소에 그 누구보다 피부로 느껴왔기에 교실의 붕괴와 함께 교권의 추락을 세상에 알리려는 고뇌의 몸부림이다. 이는 일시적 시위가 아니다. 오랜 세월 누적된 교육계의 총체적 비리(非理) 현상을 동료 교사들이 직접 나서서 교육 혁신의 불가피성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참으로 큰일이다. 이대로 방관하다가는 교사를 더 죽게 만드는 공범자가 된다. 교육 당국은 지금의 드러난 현상적인 문제점을 철저히 원인 분석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교육 백년대계를 다시 세워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지난 백 년의 역사를 잠시 되돌아보고, 교육 혁신의 본질 파악에 초점을 맞추어 주요 참고사항을 언급한다. 교사는 예로부터 천직(天職)이었다. 50년 전만 해도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못했다. 그만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뭣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데 알게 모르게 교편(敎鞭)을 잡아 도우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라도 자식 교육만큼은 마을이나 이웃 마을의 선생을 찾아서 맡겼다. 서당의 훈장은 마을마다 있어서 그 연령대에 맞는 교재를 선정해서 지도하였다. 15세가 되면 향교나 서원에서 학업에 열중하다가 20세 전후에는 중앙의 성균관 사마시(司馬試)에 응하여 진사(進士)나 생원(生員)이 되어 본격적으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학습 과정을 밟다가 임금이 친히 성균관 문묘(文廟)에 성현(聖賢)을 찾아뵙고, 명륜당에서 베푼 알성시(謁聖試)나 대과(大科)를 보아 관료로 진출하여 조정의 신료로서 업무를 맡는다. 그리고 나라의 기둥과 대들보로 맡은 바 책무를 수행하면서 일생을 바쳤다. 이런 선비정신으로 900여 회 이상의 외침에도 버텨내어 은근과 끈기로 조선왕조 500년을 이끌어 왔다. 여기서 임금과 스승과 부모의 하늘 같은 은혜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금쪽같은 말씀이 생겼고, 가정과 사회와 나라에 임하면서 부모에 효도하고, 스승에 예를 갖추고, 나라에 충성하는 효(孝)와 예(禮)와 충(忠)이라는 고귀한 정신문화의 유산을 집안 대대로 전통으로 이어 왔다. 이때의 기본 교재(敎材)는 자연의 이치와 현상 세계를 집약하여 전해주는 추구(推句), 역사와 문화의 시원과 발전과정을 담아 청소년을 일깨우는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啓蒙),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小學) 등이 있고, 동양의 역사와 문화를 사자성어로 압축한 천자문(千字文)과 세상의 윤리 도덕을 고루 모은 명심보감(明心寶鑑), 동방의 천자(天子) 요순(堯舜)과 성현(聖賢)인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담은 사서오경(四書五經) 등이다. 한마디로 자연의 이치와 인성교육의 기본 핵심을 쉽게 풀어주어 사람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지도하는 선생이나 학생은 늘 진리(眞理)를 가까이 접하며 도(道)의 경지로 나아가 지행합일(知行合一) 하는 곧은 선비정신과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하여 전문성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백성을 친절하게 이끌고, 경로효친(敬老孝親)의 자세로 안팎을 두루 편안케 하며 교학상장(敎學相長) 하는 참교육의 모습을 견지하였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권력을 남용한 일부 탐관오리도 있었고,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었거나 세도정치에 몰두한 정객들도 있었다. 결국, 19세기 말 20세기 초엽,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에 온 백성은 무력을 앞세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는 뼈저린 국치(國恥)를 당했다. 이때도 전국의 훈장이 제자를 이끌고 과감히 항일(抗日) 의병(義兵)의 선봉에 서서 국내와 만주, 상해, 중경 등 외지에서도 국권 회복에 전념하였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 천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였다. 이후 서양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패권을 다투다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3년 후 휴전협정 후 폐허 속에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였다. 대통령 측근의 부정부패가 원인이 되어 1960년 민주 학생혁명이 일어났고, 1961년 군사정부가 들어서서 경제개발에 심혈을 기울였고 한글 전용시대를 열었다. 서구문물을 제도화하여 영어학습을 기본으로 시켰고, 과학기술교육에 진력하였다. 지속해서 정부 주도의 산업화에 치중함으로써 큰 성과를 내었으나 부작용으로 땅에 떨어져 가는 인륜 도덕을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70년대를 기점으로 서구화 물결 속에서 물질적 가치추구와 개인주의 성향이 심해지자 한국적 민주주의 논란이 대두하며 사라져가는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美風良俗)과 전통문화를 재인식하자는 민족주체성 확립에 관심을 끌게 하였다. 이때 고구려 소수림왕 372년에 건립한 태학(太學)의 오랜 전통을 계승하는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서도 내외의 바람과 성원에 힘입어 최초로 여성유도회(회장 조애영)가 창립하였고, 한국청년유도회(회장 최창규)가 이어 창립하여 쇠퇴하던 유교 문화와 유도부흥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이른바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라 하여 인재를 길러 널리 배출하고, 풍속을 순화하여 고르게 한다는 성균관(成均館) 본래의 교육 정신을 앞세웠다. 전국 1천만 유림이 나서서 도덕성 회복운동을 전개하여 황금만능주의 가치관의 폐해를 막고, 인륜 도덕이 살아나는 정신과 물질이 조화를 이루는 새 시대의 가치관 정립에 온 힘을 모아 사회정화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다. 현재도 전국 주요 향교 명륜당에서 방학 기간에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한자, 서예, 생활예절, 전통놀이, 사자소학 등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시도별로 미풍양속 순화를 위한 도덕성회복운동 대회를 개최하고, 명륜대학을 개설하여 관내의 남녀 어른들이 참여하여 노후를 건강하고 보람있게 보내는 삶의 지혜를 체득하도록 힘쓰고 있다. 이러한 성균관, 향교, 서원의 전통문화 현창의 꾸준한 노력의 결실이 나타났다. 최근 성균관, 향교, 서원 진흥법이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통과하였다. 이는 성균관이 일제 강점기에 민족정신 말살 정책으로 집중적으로 탄압받아온 이래 근 백 년 만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합법화 한 것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유구한 성균관, 향교, 서원의 문화 전통을 되살려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일대 반전(反轉)을 이룬 쾌거이다. 이제는 민사부일체(民師父一體)다 이미 2014년 12월에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장 정의화)에서 인성교육진흥법이 국회의원 만장일치로 통과된 바가 있고, 각급 학교와 사회단체에서 인성교육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효(孝)와 예(禮)와 민주시민의 올바른 의식을 장려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문제점이 여기저기서 노출하고 있어서 그 실효성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 중요한 논거의 일단을 지적한다면 법적인 근거는 마련되었으나 교육의 주체인 교사가 대부분 서구식 교육을 전문적으로 수료한 입장이고, 교육정책 입안자나 행정 요원도 같은 시기에 교육과정을 마친 신분이므로 현실적인 문제점은 세밀하게 분석 파악은 하였으나 교육 혁신의 대안 연구나 실제적 체험의 미비로 한계점이 나타났다. 이점을 보완하려면 전통 인성교육의 핵심인 동방의 유학(儒學)과 함께 윤리 도덕교육 과정 및 연수 기간에 적극 동참하여 실제적 체험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즉 ‘근본을 세우면 도덕이 살아난다.’는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이라는 가르침과 ‘옛것을 보듬어 새것을 알아가게 함이 스승답다.’는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와 ‘세 사람이 가면 반듯이 나의 스승이 있다.’라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의 말씀이 <논어>에 있듯이 만세사표(萬世師表)인 공자의 가르침을 존숭하는 성균관, 향교, 서원 등에서 성현의 가르침을 몸소 체득하는 수련 과정을 거치는 기본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전문 교사들도 방학을 이용하여 동양적 전통교육의 참뜻을 직접 익혀서 동서(東西) 학문과 기능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능력개발과 지혜를 습득하여 무엇이 진정 학생지도에 필요한지, 본말(本末) 관계를 숙지하여 학생수업에 적용한다면 새 시대 교사로서 인격과 자질을 재평가받을 수도 있다. 이에 대비하여 성균관, 향교, 서원은 전국 교사를 대상으로 재교육 프로젝트를 성안하여 본래의 교육 기능을 살려서 새 인성교육의 장을 제도적으로 마련하여 널리 학습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꿈많은 여교사가 왜, 그토록 안타까운 결단의 삶을 선택하였을까? 그동안 같은 길을 간 교사가 100여 명에 이른다니 교육 당국은 무엇을 했는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가, 학부모를 탓해야 소용이 없다. 오늘의 학부모는 6.25 전쟁 후 경제재건의 격동기에 허리 졸라매고 잘살아보자고 헌신한 부모가 낳은 세대이다. 상식적으로 좋은 교육환경을 찾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은 알아도, 교육부재로 몸소 신중한 가정교육을 보인 맹모단기(孟母斷機)는 잘 모를 수가 있다. 문교 행정의 조변석개 식으로 아침에 변경하고 저녁에 바꾸는 입시 위주의 교육정책으로 이미 교육불신을 체험하였고, 그에 따라 본의 아니게 치맛바람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학부모 세대이다. 젊은 여선생은 죽어서도 말하고 있다. 한 꿈많은 여교사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을 추모하는 3만 아니 5만 10만의 교사가 하나같이 검정 옷을 입고 진짜로 죽기 살기로 사생취의(捨生取義) 정신을 발휘하여 나라의 참교육 혁신에 나서고 있다. 다음으로 이 나라 교육행정의 책임을 맡은 관료들이 공무원 신분으로서 마땅히 심사숙고하여 교육계의 원로와 뿌리 깊은 교육의 본당으로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이 엄연히 존재하는 성균관(成均館)의 자문을 구하면 일이 쉽게 풀릴 수 있다. 이미 땅에 떨어진 사도(師道)를 되살리기 위하여 교사의 목소리를 국민의 함성으로 받아들여 민주시대에 알맞은 국가백년대계의 큰 그림과 방안을 마련, 제시하면 교육이 다시 살아난다. 이제는 집사부일체를 넘어서 민사부일체(民師父一體)가 답이다. 백성과 나라를 구하려 백의종군(白衣從軍)한 성웅 이순신의 호국 정신이 말한다. 필사즉생(必死卽生)!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지니,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말라!
-
- 컬럼/연재/인물
-
이상만 성균관 전례위원회 연구위원 컬럼, 사도(師道)가 살아야 도덕(道德)이 일어난다
-
-
연재 제10편 박희준 이사장의 "성공싯크릿"
- 박희준 이사장 필자가 사업설명회, 학회 홍보 등을 끝낸 다음 날 투자예정자들은 각자의 지역으로 내려가기 위해 고속터미널에 모였는데 필자의 열정과 이력을 알고 난 뒤 ‘3유(有) CEO’로 불렀다고 한다. 제약회사 재직시절 ‘부지런함’과 ‘신용’이 최고였고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면 하는 사람’ 이라는 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다가 당시 국내 1위 소화제 베아제의 PM 경력을 알고서 제품의 품질까지도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 10명으로부터 300만 원에서 2천만 원까지 모두 5천800만 원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이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일단 10평의 사무실을 얻고 집사람과 창업에는 성공한 것이었다. 회사의 명칭은 (주)씨에이팜으로 정하였는데 임상(Clinic), 대체(Alternative), 의약품(Pharmaceuticals)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이는 한방과 양방의 처방에 융합기술을 접목해서 의약품, 화장품과 건강식품의 개발을 추진한다는 기업가 정신을 구현한 것이다. 그 후 인터넷 홈페이지를 구축하면서 병원과 약국 그리고 유아용품 판매점에 제품을 비치했다. 더 나아가 홍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육아 잡지사에 6개월 뒤 돈을 벌어서 갚아 나가겠다며 대표를 설득했고 희한하게도 이례적으로 외상으로 광고까지 시작하게 됐다. 책 표지 맨주먹으로 창업을 했으니 준비할 일이 좀 많았겠는가, 우선 홈페이지부터 만들어 임산부들에게 알려야 했으니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임산부의 의견에 댓글을 다느라 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였다. 참으로 힘이 들었으나 점차 주문이 늘어나는 재미에 빠져 피로를 느낄 틈이 없었다. 영업은 필자가 맡았으나 상품배송이나 운반 기타 업무는 몽땅 집사람 몫이었으니 말이 좋아 부사장이지 잡역부도 그런 잡역부가 따로 없었다. 사무실은 조그만 빌딩의 4층에 위치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 공장에서 올라오는 그 무거운 상품박스를 4층까지 여린 몸으로 올리고 포장해서 다시 내려보내야 했으니 그 힘이 오죽 들었을까, 하여튼 그 여파로 집사람은 허리통증을 달고 살았고 지금도 척추협착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것을 생각하면 늘 죄를 지은 듯 미안하다. 연재 제11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 컬럼/연재/인물
-
연재 제10편 박희준 이사장의 "성공싯크릿"
-
-
연재 제9편 박희준 이사장의 "성공싯크릿"
-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그래, 일단 판을 벌리고 보자 누구나 다 아는 중국의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유비, 관우, 장비가 망해가는 후한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도원결의하고 유비의 고향인 누상촌을 중심으로 의거군병을 모았다. 하여 모인 사람은 300여 명의 농투성이들로 당연히 군사라고는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어쨌든 모병장을 보고 모인 군사이니 당연히 군용자금, 식량, 군복, 창검들의 무기, 기치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유비라고 해야 돗자리 짜서 팔던 가내수공 소상공인(?)이고 장비 역시 산돼지 잡아 시중에 팔던 도축자영업자(?)이니 말할 필요가 없고 관우 역시 생업은 불확실하나 초당에서 병법서만 읽던 자였으니 돈이 있을 턱이 없었겠다. 이나저나 격문을 보고 사람들은 꾸역꾸역 모여드는데 이 세 형제들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보초를 서던 병졸이 뛰어 들어와 군영 앞으로 일단의 상인들이 말 수백 필과 상당해 보이는 양의 피륙과 재물들을 싣고 지나간다는 보고를 올리었다. 이 보고를 들은 장비는 당장 이 마필과 재물들을 탈취하여 군수품으로 쓰자고 하였으나 현덕은 일단 상인들을 만나서 알아나 보자고 하였다. 이때는 후한이 멸망하기 직전으로 전국에서 황건적이 발호하던 시대였다. 현덕은 상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들이 ‘한실부흥을 위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구하고자 군사를 일으켰는데 군대를 운용할 군비가 없어서 곤란하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상단의 우두머리인 장세평과 쏘상이 말하기를 오히려 삼형제를 잘 만났다고 하며 ‘이 어지러운 시절에 자기들도 이렇듯 유랑하다가는 언제 도적들에게 이 마필과 돈을 빼앗길지 모르는데 차라리 의병들에게 줌이 오히려 든든하고 속이 편하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기고 모든 마필과 피륙 등을 넘기고 떠나갔다. 그렇게 그 돈과 마필로 군복과 창검기치를 나름 정비하여 일약 의용군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필자의 현실 또한 이들 삼국지의 삼형제처럼 재창업의 뜻은 세웠으나 당시 일 전 한 푼 없는 상황이었다. 저출산문제가 심각하니 필자 여생의 마지막 봉사로 출산장려운동을 펼쳐야겠다고 인생 목표를 정했으나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그러나 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는 두려움보다는 도전하는 즐거움이 더 컸다. 우선 먼저 전직 회사의 대표에게 프라젠트라 제품의 판매를 제안했지만, ‘마케팅도 어렵고 수익률이 낮을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국내 최초로 튼살크림을 개발했으나 누구 한 사람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마케팅이 문제였다. 자금도, 사무실도, 직원도, 고객도 없던 문자 그대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험한 여정이었다. 당연히 ‘튼살’이란 용어도 직접 만들어 처음으로 사용한지라 아는 고객도 없었다. 돈이 없으니 자본을 어디선가 구해야 했다. 일단은 일을 저질러 보자고 다짐하면서 사업자등록부터 신청하게 되었다. 그렇게 자본금 없이 2001년 7월 회사를 설립했다. 사업설명회를 통해 투자를 받기로 결심하고 전국적으로 대리점 개설을 위해 사업설명회를 열어서 제품을 알리고, 사업 가능성을 설득해 투자 유치를 받아내기로 했다. 이전에 근무했던 제약회사 동료를 비롯해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품 홍보를 위해 부스 사용료 200만 원과 숙박·교통비 등을 위해 총 300만 원이 필요한데, 관심 있는 분들은 30만 원을 내고 사업설명회에 참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전국에서 10여 명이 돈을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지인에게서 사무실을 무료로 빌려 설명회가 끝난 뒤 한 후배는 “제품은 괜찮은 것 같은데 사무실, 자본금, 시장 등 3무(無) CEO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다음 날 모 대학병원에서 열리는 산부인과학회 회의장 모서리에 나름 아담한 부스를 마련하여 홍보작전에 돌입하였다. 필자는 자신이 있었고 그 후 후배의 안타까움을 무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반전이 일어났다. 연재 제10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 컬럼/연재/인물
-
연재 제9편 박희준 이사장의 "성공싯크릿"
-
-
연재 제8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 박희준 이사장 암수술 두 번 정도는 까딱 마이신이지 “사장님, 우린 뭐 먹고 살라꼬예?” “뭐 먹긴, 언제는 굶고 살았나? 신용을 먹고 살아야지. 대중을 상대함에 신(信)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거지. 이 신(信)이 바로 우리에게는 하늘의 신(神)이며 또한 인간사의 의(義)야, 중국 월나라 서시와 당나라 양귀비의 경국지색(傾國之色)도 채 20년을 가지 못하나 믿음은 천년을 가는 거야, 신으로써 덕을 베풀면 덕향만리지.” 평생을 의를 행하며 신뢰를 쌓아 왔고 긍정의 철학으로 탑을 쌓았다. 웬만한 일은 ‘까딱 마이신’. 아찔한 일이었으나 두 번 정도의 암수술은 까딱 마이신이지, 이 정도에 쓰러지진 않아, 이제 또다시 시작이야, 이 험난한 길 30년을 묵묵히 같이 와준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다가오는 금혼식에는 정말 멋있는 파티를 열어 줘야지. 309번의 실패 뒤의 310번째의 성공을 선배의 건강기능 식품회사를 다니며 필자만의 회사를 창업하는 방법을 이리저리 모색하던 중에 고객이었던 한 대학병원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진료실 앞에서 우연히 새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는데 임신부 2명이 대화 도중 “언니, 배만 트지 않는다면 아기를 하나 더 낳고 싶은데 말이야.”라고 말하지 않는가. 배가 터서 아이를 더 이상 가지지 못한다면 산부인과는 환자 수도 계속 줄어들고 당연히 출산율도 떨어지고 말텐데? 그럼 ‘트지 않게만 해 준다면 누구라도 아기를 더 낳을 마음이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 아이템을 찾으면 출산장려운동으로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때가 아마 1995년경이었으니 당시 이미 우리나라는 초저출산의 늪에 깊이 빠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2여 년간 건강기능 식품회사를 운영하는 선배 회사에서 중역으로 근무하면서 ‘튼살 제품’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배 회사의 건강기능식품 판매와 나의 제품 개발 등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아이템의 창조에 대한 열망으로 가슴속에서는 도전의 열정이 샘솟듯 올라왔다. 그러나 막상 여기저기 조사를 해보니 배를 트지 않게 하거나 튼살을 원상회복시킬 수 있는 약품이나 화장품이 전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는 의사들은 임산부의 배가 트는 원인을 유전이라고만 했다. 하지만 임산부의 모친은 배가 트더라도 자식은 트지 않는 경우와 그 반대의 실례도 있었다. 그래서 왜 살이 트는지를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 상품개발의 첫 걸음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피부과 의사들에게도 조언을 구해봤으나 어느 누구 속 시원히 그 원인을 말해주는 전문가가 없었다. 단지 유전적인 성향으로 그리된 것이라는 말만 들었다. 도서관에서 전문서적을 보며 씨름도 했으나 원인을 규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우연하게도 체내에 콜라겐이 풍부하면 피부가 부드러워진다는 점에 착안하였고, 연구를 거듭하던 중에 튼살의 발생 원인을 찾아내었다. 바로 호르몬의 역할로 피하지방층에서 콜라겐이 부족해지고 체내의 태아가 커짐에 따라, 피부가 팽창하다가 탄성의 임계점을 넘게 되면 터지게 되고, 쉽게 말해 균열이 생기는 현상, 즉 튼다는 것을 발견했다. 연재 제9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 컬럼/연재/인물
-
연재 제8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
-
연재 제7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 박희준 이사장 - 갈잎은 No,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 [글로벌문화신문] 하는 수 없이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재충전하여 퇴사 10년 만에 신생 제약회사의 영업부장으로 둥지를 틀었다. 다시 세일즈의 길로 복귀한 것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10배의 매출 성장을 달성하면 퇴직해서 창업한다는 조건으로 약속을 받고 입사했다. 나머지 인생은 사회와 국가를 위해 적지만 봉사를 하며 살기로 결심했고 또 도와주신 분들의 부채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재창업을 하여 성공을 하지 않고서는 별 도리가 없기도 했다. 입사한 제약회사에서의 직책은 병원 담당 부장이었고 영업직원들을 관리하면서 직접 영업도 뛰었다. 낮에는 대학병원 직원부터 원장까지 두루 만났고 야간 방문을 하기도 일쑤였다. 학교법인 병원 측에는 연간 매출액의 10~20%까지 장학금으로 내겠다는 조건도 걸었다. 카피 의약품의 입점이 어려운 상황이라 재단 이사장과 직접 소통을 시도했다. 수차례 문전박대를 받기도 했지만 비서에게는 막무가내로 접근하여 3전 4기 만에야 면담을 하기도 했다. 또 원무과의 직원을 통해 원장 사모님의 생신일을 알아 미리 케익을 준비하고 직접 댁을 방문하여 인사드리는 등 먼저 인간적으로 호감을 쌓는 방식으로 좋은 성과를 얻어 내기도 했다. 이런 철저한 승부근성으로 신생회사는 내가 들어간 지 1년여 만에 10배 이상의 매출을 달성하는 쾌거를 올렸다. 하루는 이를 본 회장이 필자를 불러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한 뒤 보너스로 3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돈 대신 부서 직원들이 품위 유지비를 올리면 무조건 결재해 줄 것과 창업 시에 무이자로 10배를 빌리는 것을 약속하고 방을 나왔다. 2년 6개월 만에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필자는 사직하고 또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 와중에 잠깐 제약업계 선배의 간곡한 부탁으로 부득이 1여 년 동안 건강기능식품이 주 품목인 그 회사에서 중역을 맡게 되었다. 연재 제8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 컬럼/연재/인물
-
연재 제7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실시간 컬럼/연재/인물 기사
-
-
연재 11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싯크릿"
- 박희준 이사장 아이고 사장님, 우린 뭐 먹고 살라꼬예? [글로벌문화신문] 이렇듯 회사운영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점차 안정되어 갈 무렵, 회사의 이미지 제고를 위하여 심벌을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그전부터 벌써 본사제품으로 출산장려 이벤트를 시행하여 둘째 아이면 50% 할인, 셋째 아이면 100% 무료로 상품을 배송해 주던 때라 당연히 모성이나 아이 쪽으로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날 모성을 상징하는 말에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함함한다’라는 것이 떠올랐다. 캐릭터로 고슴도치를 결정하고 스스로 어설프나마 고슴도치 어미와 새끼를 조합, 디자인하여 전문회사에 의뢰했다. 그리하여 지금의 귀여운 맘비 케릭터가 탄생했다. 이 캐릭터 제작에 당시 4,000만 원이라는 큰돈이 들었으나 필자가 지금 봐도 아주 귀엽고 깔끔하여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만족스럽다. 이 고슴도치 모녀는 우리 회사의 심벌로서 회사의 현관문 앞에 붙여져 오고 가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또 배웅하고 있다. 이 고슴도치 캐릭터가 완성된 후에 보다 적극적인 홍보방법을 찾았다. 먼저 광고를 통한 출산장려운동을 펼치면서 공익과 사익의 가치를 공유하고자 TV 공중파 광고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광고비가 높아서 일단 잠시 보류하고 다른 방법을 찾던 중에 중기청에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방송광고공사를 통해 광고 지원정책을 펼친다는 내용을 듣고 신청하여 바로 선정이 되었다. 2008년부터 3년 가까이 KBS2, MBC, SBS 공중파를 통해서 ‘다산코리아, 행복코리아, 프라젠트라가 응원합니다’로 해서 광고를 했다. 그 와중에 IBK기업은행 행장이 우연히 TV에서 우리 출산장려 광고를 보고 연락이 오고 얼마 안 있어서 기업은행과 당사가 제휴협약서를 체결하게 되었다. 은행 측에서 프라젠트라 임산부 튼살크림과 베이비 제품을 약 2억 원어치 구입해서 임산부 대상의 우대금리 적금상품을 파는 이벤트에 경품으로 내걸어 신청자 6,000명에게 무료로 제공했다고 한다. 당사는 감사의 뜻으로 자막에다가 ‘IBK기업은행과 주식회사 씨에이팜이 출산장려운동에 함께 동참하고 있다’라고 띄워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광고 이야기가 나왔으니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사건이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회사 임직원들이 출산장려운동도 좋지만 셋째아이 출산에 무료로 제품을 보내주게 되면 막대한 제품비용과 배송비를 부담하게 되는데 ‘우리는 뭐 먹고 살라꼬예’ 하며 왜 정부의 공익사업에 우리가 참여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불만 섞인 항의를 쏟아 낸 것이다. 하지만 좀 있어 기업은행의 구매 내용을 보고서는 다들 찬성하는 분위기로 돌아섰다. 두 번째로는 IBK기업은행 측에서 자막홍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면서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송해를 모델로 한 은행상품광고가 대박이 났다는 후일담이 나오기도 한 것이었다. 연재 제12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 컬럼/연재/인물
-
연재 11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싯크릿"
-
-
이상만 성균관 전례위원회 연구위원 컬럼, 사도(師道)가 살아야 도덕(道德)이 일어난다
- 이상만(성균관 전례위원회 연구위원) [글로벌문화신문] 지난 달 어느 젊은 여교사가 학생지도에 힘쓰다가 학부모 대화와 교실 안 실제 상황 사이의 부조화에서 번민하던 끝에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여 생을 마감하는 불행한 일이 벌어졌다. 급기야 전국교사 일동 주관으로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3만여 명의 교사가 뜨거운 불볕더위에도 불구하고 거리로 나섰다. 새내기 교사의 고통과 죽음을 평소에 그 누구보다 피부로 느껴왔기에 교실의 붕괴와 함께 교권의 추락을 세상에 알리려는 고뇌의 몸부림이다. 이는 일시적 시위가 아니다. 오랜 세월 누적된 교육계의 총체적 비리(非理) 현상을 동료 교사들이 직접 나서서 교육 혁신의 불가피성을 행동으로 보인 것이다. 참으로 큰일이다. 이대로 방관하다가는 교사를 더 죽게 만드는 공범자가 된다. 교육 당국은 지금의 드러난 현상적인 문제점을 철저히 원인 분석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교육 백년대계를 다시 세워야 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지난 백 년의 역사를 잠시 되돌아보고, 교육 혁신의 본질 파악에 초점을 맞추어 주요 참고사항을 언급한다. 교사는 예로부터 천직(天職)이었다. 50년 전만 해도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못했다. 그만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뭣도 모르는 어린 시절부터 성숙한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데 알게 모르게 교편(敎鞭)을 잡아 도우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라도 자식 교육만큼은 마을이나 이웃 마을의 선생을 찾아서 맡겼다. 서당의 훈장은 마을마다 있어서 그 연령대에 맞는 교재를 선정해서 지도하였다. 15세가 되면 향교나 서원에서 학업에 열중하다가 20세 전후에는 중앙의 성균관 사마시(司馬試)에 응하여 진사(進士)나 생원(生員)이 되어 본격적으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 학습 과정을 밟다가 임금이 친히 성균관 문묘(文廟)에 성현(聖賢)을 찾아뵙고, 명륜당에서 베푼 알성시(謁聖試)나 대과(大科)를 보아 관료로 진출하여 조정의 신료로서 업무를 맡는다. 그리고 나라의 기둥과 대들보로 맡은 바 책무를 수행하면서 일생을 바쳤다. 이런 선비정신으로 900여 회 이상의 외침에도 버텨내어 은근과 끈기로 조선왕조 500년을 이끌어 왔다. 여기서 임금과 스승과 부모의 하늘 같은 은혜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금쪽같은 말씀이 생겼고, 가정과 사회와 나라에 임하면서 부모에 효도하고, 스승에 예를 갖추고, 나라에 충성하는 효(孝)와 예(禮)와 충(忠)이라는 고귀한 정신문화의 유산을 집안 대대로 전통으로 이어 왔다. 이때의 기본 교재(敎材)는 자연의 이치와 현상 세계를 집약하여 전해주는 추구(推句), 역사와 문화의 시원과 발전과정을 담아 청소년을 일깨우는 동몽선습(童蒙先習), 계몽(啓蒙),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小學) 등이 있고, 동양의 역사와 문화를 사자성어로 압축한 천자문(千字文)과 세상의 윤리 도덕을 고루 모은 명심보감(明心寶鑑), 동방의 천자(天子) 요순(堯舜)과 성현(聖賢)인 공맹(孔孟)의 가르침을 담은 사서오경(四書五經) 등이다. 한마디로 자연의 이치와 인성교육의 기본 핵심을 쉽게 풀어주어 사람다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지도하는 선생이나 학생은 늘 진리(眞理)를 가까이 접하며 도(道)의 경지로 나아가 지행합일(知行合一) 하는 곧은 선비정신과 군자불기(君子不器)라 하여 전문성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면서 백성을 친절하게 이끌고, 경로효친(敬老孝親)의 자세로 안팎을 두루 편안케 하며 교학상장(敎學相長) 하는 참교육의 모습을 견지하였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권력을 남용한 일부 탐관오리도 있었고, 당파싸움에 혈안이 되었거나 세도정치에 몰두한 정객들도 있었다. 결국, 19세기 말 20세기 초엽, 서세동점(西勢東漸) 시기에 온 백성은 무력을 앞세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는 뼈저린 국치(國恥)를 당했다. 이때도 전국의 훈장이 제자를 이끌고 과감히 항일(抗日) 의병(義兵)의 선봉에 서서 국내와 만주, 상해, 중경 등 외지에서도 국권 회복에 전념하였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 천왕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광복의 기쁨을 맞이하였다. 이후 서양문물이 급속도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서로 패권을 다투다가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3년 후 휴전협정 후 폐허 속에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였다. 대통령 측근의 부정부패가 원인이 되어 1960년 민주 학생혁명이 일어났고, 1961년 군사정부가 들어서서 경제개발에 심혈을 기울였고 한글 전용시대를 열었다. 서구문물을 제도화하여 영어학습을 기본으로 시켰고, 과학기술교육에 진력하였다. 지속해서 정부 주도의 산업화에 치중함으로써 큰 성과를 내었으나 부작용으로 땅에 떨어져 가는 인륜 도덕을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70년대를 기점으로 서구화 물결 속에서 물질적 가치추구와 개인주의 성향이 심해지자 한국적 민주주의 논란이 대두하며 사라져가는 우리 고유의 미풍양속(美風良俗)과 전통문화를 재인식하자는 민족주체성 확립에 관심을 끌게 하였다. 이때 고구려 소수림왕 372년에 건립한 태학(太學)의 오랜 전통을 계승하는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서도 내외의 바람과 성원에 힘입어 최초로 여성유도회(회장 조애영)가 창립하였고, 한국청년유도회(회장 최창규)가 이어 창립하여 쇠퇴하던 유교 문화와 유도부흥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이른바 성인재지미취(成人材之未就), 균풍속지부제(均風俗之不齊)라 하여 인재를 길러 널리 배출하고, 풍속을 순화하여 고르게 한다는 성균관(成均館) 본래의 교육 정신을 앞세웠다. 전국 1천만 유림이 나서서 도덕성 회복운동을 전개하여 황금만능주의 가치관의 폐해를 막고, 인륜 도덕이 살아나는 정신과 물질이 조화를 이루는 새 시대의 가치관 정립에 온 힘을 모아 사회정화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다. 현재도 전국 주요 향교 명륜당에서 방학 기간에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한자, 서예, 생활예절, 전통놀이, 사자소학 등 인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시도별로 미풍양속 순화를 위한 도덕성회복운동 대회를 개최하고, 명륜대학을 개설하여 관내의 남녀 어른들이 참여하여 노후를 건강하고 보람있게 보내는 삶의 지혜를 체득하도록 힘쓰고 있다. 이러한 성균관, 향교, 서원의 전통문화 현창의 꾸준한 노력의 결실이 나타났다. 최근 성균관, 향교, 서원 진흥법이 국회에서 압도적으로 통과하였다. 이는 성균관이 일제 강점기에 민족정신 말살 정책으로 집중적으로 탄압받아온 이래 근 백 년 만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합법화 한 것이다.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유구한 성균관, 향교, 서원의 문화 전통을 되살려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일대 반전(反轉)을 이룬 쾌거이다. 이제는 민사부일체(民師父一體)다 이미 2014년 12월에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장 정의화)에서 인성교육진흥법이 국회의원 만장일치로 통과된 바가 있고, 각급 학교와 사회단체에서 인성교육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효(孝)와 예(禮)와 민주시민의 올바른 의식을 장려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문제점이 여기저기서 노출하고 있어서 그 실효성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그 중요한 논거의 일단을 지적한다면 법적인 근거는 마련되었으나 교육의 주체인 교사가 대부분 서구식 교육을 전문적으로 수료한 입장이고, 교육정책 입안자나 행정 요원도 같은 시기에 교육과정을 마친 신분이므로 현실적인 문제점은 세밀하게 분석 파악은 하였으나 교육 혁신의 대안 연구나 실제적 체험의 미비로 한계점이 나타났다. 이점을 보완하려면 전통 인성교육의 핵심인 동방의 유학(儒學)과 함께 윤리 도덕교육 과정 및 연수 기간에 적극 동참하여 실제적 체험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즉 ‘근본을 세우면 도덕이 살아난다.’는 본립이도생(本立而道生)이라는 가르침과 ‘옛것을 보듬어 새것을 알아가게 함이 스승답다.’는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와 ‘세 사람이 가면 반듯이 나의 스승이 있다.’라는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의 말씀이 <논어>에 있듯이 만세사표(萬世師表)인 공자의 가르침을 존숭하는 성균관, 향교, 서원 등에서 성현의 가르침을 몸소 체득하는 수련 과정을 거치는 기본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전문 교사들도 방학을 이용하여 동양적 전통교육의 참뜻을 직접 익혀서 동서(東西) 학문과 기능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능력개발과 지혜를 습득하여 무엇이 진정 학생지도에 필요한지, 본말(本末) 관계를 숙지하여 학생수업에 적용한다면 새 시대 교사로서 인격과 자질을 재평가받을 수도 있다. 이에 대비하여 성균관, 향교, 서원은 전국 교사를 대상으로 재교육 프로젝트를 성안하여 본래의 교육 기능을 살려서 새 인성교육의 장을 제도적으로 마련하여 널리 학습의 기회를 제공해야 할 것이다. 꿈많은 여교사가 왜, 그토록 안타까운 결단의 삶을 선택하였을까? 그동안 같은 길을 간 교사가 100여 명에 이른다니 교육 당국은 무엇을 했는가,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가, 학부모를 탓해야 소용이 없다. 오늘의 학부모는 6.25 전쟁 후 경제재건의 격동기에 허리 졸라매고 잘살아보자고 헌신한 부모가 낳은 세대이다. 상식적으로 좋은 교육환경을 찾는 맹모삼천(孟母三遷)은 알아도, 교육부재로 몸소 신중한 가정교육을 보인 맹모단기(孟母斷機)는 잘 모를 수가 있다. 문교 행정의 조변석개 식으로 아침에 변경하고 저녁에 바꾸는 입시 위주의 교육정책으로 이미 교육불신을 체험하였고, 그에 따라 본의 아니게 치맛바람을 직간접으로 경험한 학부모 세대이다. 젊은 여선생은 죽어서도 말하고 있다. 한 꿈많은 여교사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정신을 추모하는 3만 아니 5만 10만의 교사가 하나같이 검정 옷을 입고 진짜로 죽기 살기로 사생취의(捨生取義) 정신을 발휘하여 나라의 참교육 혁신에 나서고 있다. 다음으로 이 나라 교육행정의 책임을 맡은 관료들이 공무원 신분으로서 마땅히 심사숙고하여 교육계의 원로와 뿌리 깊은 교육의 본당으로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이 엄연히 존재하는 성균관(成均館)의 자문을 구하면 일이 쉽게 풀릴 수 있다. 이미 땅에 떨어진 사도(師道)를 되살리기 위하여 교사의 목소리를 국민의 함성으로 받아들여 민주시대에 알맞은 국가백년대계의 큰 그림과 방안을 마련, 제시하면 교육이 다시 살아난다. 이제는 집사부일체를 넘어서 민사부일체(民師父一體)가 답이다. 백성과 나라를 구하려 백의종군(白衣從軍)한 성웅 이순신의 호국 정신이 말한다. 필사즉생(必死卽生)!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지니,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말라!
-
- 컬럼/연재/인물
-
이상만 성균관 전례위원회 연구위원 컬럼, 사도(師道)가 살아야 도덕(道德)이 일어난다
-
-
연재 제10편 박희준 이사장의 "성공싯크릿"
- 박희준 이사장 필자가 사업설명회, 학회 홍보 등을 끝낸 다음 날 투자예정자들은 각자의 지역으로 내려가기 위해 고속터미널에 모였는데 필자의 열정과 이력을 알고 난 뒤 ‘3유(有) CEO’로 불렀다고 한다. 제약회사 재직시절 ‘부지런함’과 ‘신용’이 최고였고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면 하는 사람’ 이라는 데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다가 당시 국내 1위 소화제 베아제의 PM 경력을 알고서 제품의 품질까지도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 10명으로부터 300만 원에서 2천만 원까지 모두 5천800만 원의 투자 유치에 성공했다. 이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일단 10평의 사무실을 얻고 집사람과 창업에는 성공한 것이었다. 회사의 명칭은 (주)씨에이팜으로 정하였는데 임상(Clinic), 대체(Alternative), 의약품(Pharmaceuticals)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이는 한방과 양방의 처방에 융합기술을 접목해서 의약품, 화장품과 건강식품의 개발을 추진한다는 기업가 정신을 구현한 것이다. 그 후 인터넷 홈페이지를 구축하면서 병원과 약국 그리고 유아용품 판매점에 제품을 비치했다. 더 나아가 홍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육아 잡지사에 6개월 뒤 돈을 벌어서 갚아 나가겠다며 대표를 설득했고 희한하게도 이례적으로 외상으로 광고까지 시작하게 됐다. 책 표지 맨주먹으로 창업을 했으니 준비할 일이 좀 많았겠는가, 우선 홈페이지부터 만들어 임산부들에게 알려야 했으니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매달려 임산부의 의견에 댓글을 다느라 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였다. 참으로 힘이 들었으나 점차 주문이 늘어나는 재미에 빠져 피로를 느낄 틈이 없었다. 영업은 필자가 맡았으나 상품배송이나 운반 기타 업무는 몽땅 집사람 몫이었으니 말이 좋아 부사장이지 잡역부도 그런 잡역부가 따로 없었다. 사무실은 조그만 빌딩의 4층에 위치했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어 공장에서 올라오는 그 무거운 상품박스를 4층까지 여린 몸으로 올리고 포장해서 다시 내려보내야 했으니 그 힘이 오죽 들었을까, 하여튼 그 여파로 집사람은 허리통증을 달고 살았고 지금도 척추협착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것을 생각하면 늘 죄를 지은 듯 미안하다. 연재 제11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 컬럼/연재/인물
-
연재 제10편 박희준 이사장의 "성공싯크릿"
-
-
연재 제9편 박희준 이사장의 "성공싯크릿"
-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그래, 일단 판을 벌리고 보자 누구나 다 아는 중국의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유비, 관우, 장비가 망해가는 후한을 다시 부흥시키기 위해 도원결의하고 유비의 고향인 누상촌을 중심으로 의거군병을 모았다. 하여 모인 사람은 300여 명의 농투성이들로 당연히 군사라고는 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어쨌든 모병장을 보고 모인 군사이니 당연히 군용자금, 식량, 군복, 창검들의 무기, 기치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유비라고 해야 돗자리 짜서 팔던 가내수공 소상공인(?)이고 장비 역시 산돼지 잡아 시중에 팔던 도축자영업자(?)이니 말할 필요가 없고 관우 역시 생업은 불확실하나 초당에서 병법서만 읽던 자였으니 돈이 있을 턱이 없었겠다. 이나저나 격문을 보고 사람들은 꾸역꾸역 모여드는데 이 세 형제들의 고민은 날로 깊어갔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보초를 서던 병졸이 뛰어 들어와 군영 앞으로 일단의 상인들이 말 수백 필과 상당해 보이는 양의 피륙과 재물들을 싣고 지나간다는 보고를 올리었다. 이 보고를 들은 장비는 당장 이 마필과 재물들을 탈취하여 군수품으로 쓰자고 하였으나 현덕은 일단 상인들을 만나서 알아나 보자고 하였다. 이때는 후한이 멸망하기 직전으로 전국에서 황건적이 발호하던 시대였다. 현덕은 상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들이 ‘한실부흥을 위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구하고자 군사를 일으켰는데 군대를 운용할 군비가 없어서 곤란하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상단의 우두머리인 장세평과 쏘상이 말하기를 오히려 삼형제를 잘 만났다고 하며 ‘이 어지러운 시절에 자기들도 이렇듯 유랑하다가는 언제 도적들에게 이 마필과 돈을 빼앗길지 모르는데 차라리 의병들에게 줌이 오히려 든든하고 속이 편하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기고 모든 마필과 피륙 등을 넘기고 떠나갔다. 그렇게 그 돈과 마필로 군복과 창검기치를 나름 정비하여 일약 의용군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디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필자의 현실 또한 이들 삼국지의 삼형제처럼 재창업의 뜻은 세웠으나 당시 일 전 한 푼 없는 상황이었다. 저출산문제가 심각하니 필자 여생의 마지막 봉사로 출산장려운동을 펼쳐야겠다고 인생 목표를 정했으나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그러나 늘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평생을 살아온 나에게는 두려움보다는 도전하는 즐거움이 더 컸다. 우선 먼저 전직 회사의 대표에게 프라젠트라 제품의 판매를 제안했지만, ‘마케팅도 어렵고 수익률이 낮을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국내 최초로 튼살크림을 개발했으나 누구 한 사람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마케팅이 문제였다. 자금도, 사무실도, 직원도, 고객도 없던 문자 그대로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험한 여정이었다. 당연히 ‘튼살’이란 용어도 직접 만들어 처음으로 사용한지라 아는 고객도 없었다. 돈이 없으니 자본을 어디선가 구해야 했다. 일단은 일을 저질러 보자고 다짐하면서 사업자등록부터 신청하게 되었다. 그렇게 자본금 없이 2001년 7월 회사를 설립했다. 사업설명회를 통해 투자를 받기로 결심하고 전국적으로 대리점 개설을 위해 사업설명회를 열어서 제품을 알리고, 사업 가능성을 설득해 투자 유치를 받아내기로 했다. 이전에 근무했던 제약회사 동료를 비롯해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품 홍보를 위해 부스 사용료 200만 원과 숙박·교통비 등을 위해 총 300만 원이 필요한데, 관심 있는 분들은 30만 원을 내고 사업설명회에 참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전국에서 10여 명이 돈을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지인에게서 사무실을 무료로 빌려 설명회가 끝난 뒤 한 후배는 “제품은 괜찮은 것 같은데 사무실, 자본금, 시장 등 3무(無) CEO가 어떻게 하겠느냐”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필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다음 날 모 대학병원에서 열리는 산부인과학회 회의장 모서리에 나름 아담한 부스를 마련하여 홍보작전에 돌입하였다. 필자는 자신이 있었고 그 후 후배의 안타까움을 무시하기라도 하는 듯이 반전이 일어났다. 연재 제10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 컬럼/연재/인물
-
연재 제9편 박희준 이사장의 "성공싯크릿"
-
-
연재 제8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 박희준 이사장 암수술 두 번 정도는 까딱 마이신이지 “사장님, 우린 뭐 먹고 살라꼬예?” “뭐 먹긴, 언제는 굶고 살았나? 신용을 먹고 살아야지. 대중을 상대함에 신(信)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는 거지. 이 신(信)이 바로 우리에게는 하늘의 신(神)이며 또한 인간사의 의(義)야, 중국 월나라 서시와 당나라 양귀비의 경국지색(傾國之色)도 채 20년을 가지 못하나 믿음은 천년을 가는 거야, 신으로써 덕을 베풀면 덕향만리지.” 평생을 의를 행하며 신뢰를 쌓아 왔고 긍정의 철학으로 탑을 쌓았다. 웬만한 일은 ‘까딱 마이신’. 아찔한 일이었으나 두 번 정도의 암수술은 까딱 마이신이지, 이 정도에 쓰러지진 않아, 이제 또다시 시작이야, 이 험난한 길 30년을 묵묵히 같이 와준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다가오는 금혼식에는 정말 멋있는 파티를 열어 줘야지. 309번의 실패 뒤의 310번째의 성공을 선배의 건강기능 식품회사를 다니며 필자만의 회사를 창업하는 방법을 이리저리 모색하던 중에 고객이었던 한 대학병원 산부인과 의사를 만나러 가게 되었다. 진료실 앞에서 우연히 새 사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는데 임신부 2명이 대화 도중 “언니, 배만 트지 않는다면 아기를 하나 더 낳고 싶은데 말이야.”라고 말하지 않는가. 배가 터서 아이를 더 이상 가지지 못한다면 산부인과는 환자 수도 계속 줄어들고 당연히 출산율도 떨어지고 말텐데? 그럼 ‘트지 않게만 해 준다면 누구라도 아기를 더 낳을 마음이 생기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 아이템을 찾으면 출산장려운동으로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수 있겠다 싶었다. 이때가 아마 1995년경이었으니 당시 이미 우리나라는 초저출산의 늪에 깊이 빠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2여 년간 건강기능 식품회사를 운영하는 선배 회사에서 중역으로 근무하면서 ‘튼살 제품’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선배 회사의 건강기능식품 판매와 나의 제품 개발 등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아이템의 창조에 대한 열망으로 가슴속에서는 도전의 열정이 샘솟듯 올라왔다. 그러나 막상 여기저기 조사를 해보니 배를 트지 않게 하거나 튼살을 원상회복시킬 수 있는 약품이나 화장품이 전혀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는 의사들은 임산부의 배가 트는 원인을 유전이라고만 했다. 하지만 임산부의 모친은 배가 트더라도 자식은 트지 않는 경우와 그 반대의 실례도 있었다. 그래서 왜 살이 트는지를 제대로 규명하는 것이 상품개발의 첫 걸음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피부과 의사들에게도 조언을 구해봤으나 어느 누구 속 시원히 그 원인을 말해주는 전문가가 없었다. 단지 유전적인 성향으로 그리된 것이라는 말만 들었다. 도서관에서 전문서적을 보며 씨름도 했으나 원인을 규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우연하게도 체내에 콜라겐이 풍부하면 피부가 부드러워진다는 점에 착안하였고, 연구를 거듭하던 중에 튼살의 발생 원인을 찾아내었다. 바로 호르몬의 역할로 피하지방층에서 콜라겐이 부족해지고 체내의 태아가 커짐에 따라, 피부가 팽창하다가 탄성의 임계점을 넘게 되면 터지게 되고, 쉽게 말해 균열이 생기는 현상, 즉 튼다는 것을 발견했다. 연재 제9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연재에 관심 있는 분들은 연락 주십시오. 친절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담당자 이메일 : kpoongs1691@naver.com
-
- 컬럼/연재/인물
-
연재 제8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
-
연재 제7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 박희준 이사장 - 갈잎은 No,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 [글로벌문화신문] 하는 수 없이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재충전하여 퇴사 10년 만에 신생 제약회사의 영업부장으로 둥지를 틀었다. 다시 세일즈의 길로 복귀한 것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10배의 매출 성장을 달성하면 퇴직해서 창업한다는 조건으로 약속을 받고 입사했다. 나머지 인생은 사회와 국가를 위해 적지만 봉사를 하며 살기로 결심했고 또 도와주신 분들의 부채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재창업을 하여 성공을 하지 않고서는 별 도리가 없기도 했다. 입사한 제약회사에서의 직책은 병원 담당 부장이었고 영업직원들을 관리하면서 직접 영업도 뛰었다. 낮에는 대학병원 직원부터 원장까지 두루 만났고 야간 방문을 하기도 일쑤였다. 학교법인 병원 측에는 연간 매출액의 10~20%까지 장학금으로 내겠다는 조건도 걸었다. 카피 의약품의 입점이 어려운 상황이라 재단 이사장과 직접 소통을 시도했다. 수차례 문전박대를 받기도 했지만 비서에게는 막무가내로 접근하여 3전 4기 만에야 면담을 하기도 했다. 또 원무과의 직원을 통해 원장 사모님의 생신일을 알아 미리 케익을 준비하고 직접 댁을 방문하여 인사드리는 등 먼저 인간적으로 호감을 쌓는 방식으로 좋은 성과를 얻어 내기도 했다. 이런 철저한 승부근성으로 신생회사는 내가 들어간 지 1년여 만에 10배 이상의 매출을 달성하는 쾌거를 올렸다. 하루는 이를 본 회장이 필자를 불러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한 뒤 보너스로 3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돈 대신 부서 직원들이 품위 유지비를 올리면 무조건 결재해 줄 것과 창업 시에 무이자로 10배를 빌리는 것을 약속하고 방을 나왔다. 2년 6개월 만에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필자는 사직하고 또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그 와중에 잠깐 제약업계 선배의 간곡한 부탁으로 부득이 1여 년 동안 건강기능식품이 주 품목인 그 회사에서 중역을 맡게 되었다. 연재 제8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 컬럼/연재/인물
-
연재 제7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
-
[박희준 특별칼럼] 3.1절에 출산장려로 제2의 구국운동을 이끌다
- 한국출산장려협회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3.1절! 제2의 구국운동을 이끌다 누구나 3.1절이라면 유관순 열사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운동가를 생각한다. 왜 그럴까, 당연코 의문이 생기는 질문이지 않는가? 이는 나라를 잃어본 아픈 역사와 서러움을 가진 국가요 민족이요 후손이지 않을까 싶다. 유관순 열사가 목숨을 걸고 일제에 항거하면서 던진 만세 삼창이 없었다면,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낭독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할 뿐이다. 국내 최초로 출산장려를 위해 4반세기(25년) 전인 1997년도 10월 10일에 법인 및 정책발의를 위해 ‘인구미래연구소’내에 ‘한국출산정책협의회’를 발족하고 협회의 ▶미션(사명)을 자연주의, 생명존중, 박애봉사로 하고 ▶비전(정신)을 홍익인간, 유비무환, 무실역행으로, ▶핵심가치는 출산·출생장려는 제2의 구국운동이다. 로 정했다. 초기단계에는 “출산장려는 제2의 구국운동이다”라는 케치프레이즈를 만들어 저출산이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고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아직까지 산아제한의 굴레 속에 갇히어서 어느 누구도 앞장서서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에 안타깝기만 했다. 개인이 미래의 인구문제를 걱정해 본 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 해결될 기미는 전혀 없을 때 였으니 괜히 돈키호테식의 영웅심리가 아닌가 싶을 뿐이었다. 국회의원회관을 찾아 국회의원들을 만나서 산아제한은 이제 그만두고, 하루빨리 출산장려를 위해서 방향을 바꿔 나갈 법안을 만들어 발의해 줄 것을 호소하기도 수차례 반복해 봤으나 단지 마중물 또는 불쏘시게 역할로 만족할 뿐이고 더 이상의 기대는 할 수 없었던 암담한 현실 뿐이었다. 출산장려를 해야겠다는 계기가 된 것은 어느 대학병원 산부인과를 찾은 임산부가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언니, 배만 트지 않는다면 아이를 더 낳고 싶은데 말이야”라는 소리가 귓전을 울리지 않았다면 어찌 한발짝이라도 나아갈 수가 있었나 싶다. 이게 제약회사에서 소화제를 개발한 경험이 있었기에 바로 "배가 트지 않는 제품을 개발한다면 출산장려에도 조금의 도움은 되지 않을까?" 해서 국내 최초로 살이 트지 않는 임산부 튼살 전문크림인 ‘프라젠트라’를 개발한 것이 출산장려를 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이를 사업화하여 수익금의 일부를 출산장려를 위한 봉사활동에 크게 기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혼모를 위한 사회단체인 대한사회복지회, 동방사회복지회, 홀트아동복지 그리고 도담하우스 등을 방문하여 임산부 튼살크림을 기부하여 격려하기도 했다. 이를 공식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협회를 설립하고 출범식을 갖는 것이라 생각하고 2010년 9월 16일에 한국프레스센터에서 300여명의 내빈들을 초청하여 정식으로 한국출산보육장려협회가 발족이 되었다. 한국출산보육장려협회의 발족을 위해서 사전에 출산장려로 인구문제 해결의 역사적인 3개 명승지를 찾아 구국의 신념으로 간절한 기도을 올렸다. 첫 번째로 백두산 천지에서 환인 하느님께 협회의 출산 성공 발원 기도를 했다. 두 번째로 중국 태산 옥황정에서 옥황상제님께 견우직녀(선남선녀)의 오작교에서 자주 만남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기도들 드렸다. 세 번째로 출범식 1주일 전에는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옆에 제단을 차려 놓고 한민족의 시조이신 단군왕검께 협회가 성공하여 대한민국의 후손들에게 행복한 대한민국을 물려줄 수 있도록 발원기도를 올렸다. 그간에 실시한 이벤트로는 맘비스쿨, 자녀 많이 낳기 기원국토순레, 자선음악회, 여성마라톤, 춘천마라톤, 다둥이 마라톤대회, 난임의 날, 임산부의 날 후원, 출산장려구국운동 포럼, 임산부포럼, 빨간코데이 개최, 유모차는 가고싶다 참가 등 후원과 참가를 통해 출산장려 홍보를 하기도 했으며 MOU도 여러 단체와 협약식을 가지기도 했으며 18대 대통령후보자 초청 출산장려정책 발표회를 가지기도 했다. 한국출산장려협회 박희준 이사장 한출협의 출산장려 사업과 관련하여 ‘다산코리아 행복코리아를 꿈꾸며’, ‘가족’의 저서는 공저로 출간을 했으며, 필자의 저서인 ‘출산장려 성공시크릿’을 228개 지자체 단체장과 20대 정부의 대통령을 비롯하여 60여 기관장 그리고 30여개의 일간지에다가 보내어 벤치마킹하여 정책을 수립하도록 배려를 했다. 20여년 간의 출산장려운동으로 그간에 국무총리상, 보건복지부장관상, 산업자원부장관상,여성가족부장관상, 중소기업장관상, 서울특별시장상을 비롯하여 2018년에 ‘유네스코 올해의 인물상’과 2019년에는 조선일보 주최 ‘행복한 세상만들기 출산장려부분 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이루었다. 2019년에는 청와대 초청으로 출산장려를 위한 사회적공헌기업으로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부부동반 오찬행사에 초청되기도 했다. 중소기업 대표이자 한국출산장려협회(이하 한출협) 이사장 자격으로 유일하게 초청된 것이 그나마 행운이자 큰 보람이기도 했다. 순수봉사단체로 협회를 시작했다가 그간의 무리한 봉사활동으로 인해 20여 년간 구국동지 였던 초대 사무총장이 지난해 타계를 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두 번의 암수술을 받기도 했는데 아직 하늘의 부름이 없는 걸 보면 출산장려 구국운동을 잘 마무리하라고 오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남은 여생을 정부와 협업을 통해 반드시 인구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면 제1의 구국운동은 무엇일까? 단연코 3.1독립운동이라고 말한다. 당시로는 독립운동이 나라를 살리는 구국운동이었을 테니 말이다. 당시로는 일제강점기에 빼앗긴 주권을 되찾는 것이라 본다. 민족대표 33인의 중심인물이었던 손병희(독립선언식 주도)를 비롯하여 김마리아(일본에 숨겨온 독립선언문 전파), 김원벽(독립운동의 선봉), 이승훈(독립선언서 서명 추진), 한용운(3.1운동 계획, 독립선언서 낭독)을 포함한 3.1운동의 중심을 포함한 33인이 결성이 되면서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주권회복에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펼쳤든게 바로 구국운동이 아니었든가. 나라가 풍전등화이자 백척간두와 같은 누란지위에 놓일 때는 민간에서 의병들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분연히 일어나서 나라를 살려 내는 것이 역사적으로 반증을 하고 있다고 본다. 한출협도 이와 같은 반열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구상에서 최초로 사라질 국가 1호가 대한민국이라고 인구학자들이 예측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의 상황은 ‘인구절벽 대한민국’, ‘늙어가는 대한민국’, ‘돈맹위기 대한민국’이라 하지 않는가. 그래서 한출협도 3단계를 통해서 출산장려 구국운동을 펼치고자 한다. 첫 번째 단계로는 2050년까지 한자녀 사랑으로 초저출산시대를 극복하고, 두 번째 단계로는 2070년까지 두자녀 기쁨두배로 대체출산율 2.1명 유지하고, 세 번째 단계로는 2120년까지 적정출생 행복세배로 최적인구 경제강대국을 목표로 한다. 이를 실행으로 옮기기 위해서 3.1독립선언 민족대표33인에 필적할 만한 사회적인 명망가를 K-PEACE 100인 교육홍보대사(구국지사)를 1단계로 33인을 추대하여 2020년을 원년으로 하여 국회의원회관이나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오온캠페인 선포식 및 포럼’을 개최할려고 하였으나 지난 3년간의 코로나19로 인해 계속 연기되는 시련도 겪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0.78명인 초출산국으로서 OECD 38개국 중 골찌이며 UN 198개국 중에서도 최하위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며, 출생아수가 25만명 이하로 곤두박질치고 있으며 2025년에는 인구의 20% 이상이 노인이 차지하는 초고령화시대로 접어들 뿐아니라 가장 급속도로 고령화가 가속되어 향후 10년 이내로 이 또한 세계 1위 국가가 된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노인빈곤율과 자살율 또한 세계 1위라고 하니 세계를 주도해 나갈 천손민족이자 한민족인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울하기만 하다. 지난해 이태원 참사에서 159명의 희생자가 이삼십대라고 하니 미래의 주인공이라 더욱더 슬프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살율 1위가 부끄러울 판인데 하루에 40~50여명이 자살자 중에 이삼십대가 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태원 참사보다 더 참담한 현실이 아닌가. 이 보다 더 아픈 현실은 하루에 낙태건 수가 3000~3500명의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은 알고 있는가 말이다. 1년에 태어나는 출생아 수가 25만명 이하인데 사라지는 생명은 100만명이 넘는다는 현실만 봐도 저출산 극복의 현실은 요원하다고 할 수가 있겠다. 단편적인 예도 몇가지 들어보자. ‘임신 소식 알렸드니 회사는 자진 퇴사 종용’하는 산전 산후 여성의 불리한 처우를 개선하고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자유롭게 쓸 수 있나’라고 물어보니 36%와 43%가 그렇기 않다고 하며 특히 일터의 약자인 비정규직 또는 분안정 노동자들이 휴가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고 하니 약자를 위한 배려가 없이는 출산율을 높이는 것은 요원할 것이다. 앞으로 특별근로감독을 벌여서라도 이런 일이 없도록 철저하게 관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 당국이나 노동부가 근본적인 변화와 혁신이 없이는 공염불로 끝날 것이다. 하루빨리 출산장려 인구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룰 전문부처가 신설되고 부총리급으로 격상시켜 예산의 사용처를 관리ㆍ감독하는 특임장관이라도 당장 임명해야 할 판이다. 등잔불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분명 주위를 살펴보면 인구문제 해결을 위한 진단과 처방을 제대로 내릴 명의(名醫)가 분명 있을텐데 말이다. 앞으로 한출협의 창시자로서 한출협과 정부가 협업하여 시너지효과를 거두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올해는 저출산 극복을 위한 출산장려 음악콘서트를 문화·예술 행사를 시작으로 전국 지자체로 확대시켜 적극 홍보를 함은 물론 토크 콘서트를 병행하고 인터넷을 통해서도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여 더 이상 출산장려의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부에서도 3.1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과거와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을 제대로 진단하고 처방하여 미래에 대처할 방향을 제대로 잡아 나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출산ㆍ출생장려 구국운동의 케치프레이즈로 가름하고자 한다. “출생·출생장려는 제2의 구국운동이자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입니다. 이는 꿈이 아닌 새로운 나라살리기의 시작입니다. 다산코리아! 행복코리아!”
-
- 컬럼/연재/인물
-
[박희준 특별칼럼] 3.1절에 출산장려로 제2의 구국운동을 이끌다
-
-
연재 제3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 김현풍 나막사 총재 막걸리, 민족의 혼을 빚다 [글로벌문화신문] 우리들의 삶은 바로 3·1독립운동을 3·1혁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민족정신을 되세길 때입니다. 그리고 그런 민족정신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이 저는 ‘막걸리’라고 생각합니다. 막걸리는 우리 민족 고유의 술이며, 우리 민족의 얼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합일의식은 춤과 제사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절차에서 매개가 되는 것이 막걸리였고 고수레할 때나 나무를 옮겨 심고 잘 자라라고 뿌려주는 것도 막걸리였으며 여러 사람이 모여 화합과 정을 쌓는 매개가 되었던 것도 바로 막걸리였습니다. 즉 막걸리는 우리 전통이자 민족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막사는 막걸리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나라사랑 막걸리사랑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 유산 막걸리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이를 나라사랑으로 발전시키며, 더 많은 분들께우리의 얼과 정신문화를 전하고자 이 책을 펴냅니다. 막걸리 책이야 누구든지 읽고 막걸리도 다 먹어본 줄 압니다. 하지만 막걸리를 왜 먹는지, 막걸리에 왜 민족정신이 담겨 있는지, 막걸리 한 잔이 기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고 나라를 살릴 수 있음을 이해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끝까지 힘써준 김석주 선생과 귀한 사진을 제공해준 조창섭 사진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막걸리 시를 한 편 감상하며, 막걸리에 담긴 우리 민족의 혼과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는 기회가 되셨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그대 막걸리 (만초 김정현) 모처럼 옛친구 만나면무엇으로 화끈한 회포를 푸랴 잔치판 그것 없이 무슨 흥으로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랴 승리의 기쁨에 화합에무엇으로 왁자지끈 웃음꽃을 피우랴 억울한 일을 나약한 이웃에게무엇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주랴 하늘이 지상에 내린 선물 중낯선이도 한 잔 합세다아름다운 인심의 막걸리 선조들의 지혜의 우주가 담겨 있고낭만이 있는 먹거리 세계적인 발효술최고의 작품, 막걸리 토속문화로 이어진조상 대절의 살아 있는 고마움에 잔 부딪히며 술술 여름철 목 갈증에 노동에 출출할 때 값싸고 푸짐한 우리 신토불이 막걸리 세상이 변하고 변해도이 땅 이 나라만인에게 영원히 사랑 받을 막걸리 그대여 연재 제4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 컬럼/연재/인물
-
연재 제3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
-
연재 제2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 나막사 김현풍 총재 [글로벌문화신문] 1919년 3월 1일, 의암 손병희 선생을 선두로 한 민족 대표인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습니다. 우이동의 천도교 봉황각에서였습니다. 의암 선생께서는 이곳에서 400명이 넘는 식구들에게 인쇄술을 비롯한 모든 것을 교육했고, 이곳이 3·1 독립운동의 발상지가 되었습니다. 봉황각에 가보면 아시겠지만 삼각산에서 가장 잘 보이고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경관이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삼각산이 가진 센 기운 때문에 의암 선생이 그곳에 터를 잡은 것이고 그 정기를 받아 3·1운동이 시작된 것이 아니겠습니니까? 더불어 삼가산 백운봉에 가시면 암각이 있습니다. 학생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 선생이 쓰신 3·1운동 암각문이 그곳에 새겨 있습니다. 이 3·1운동의 비폭력 저항정신은 중국의 5·4혁명을 일어나게 했고, 인도의 간디가 이끄는 비폭력 불복종 저항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혁명 그리고 미주에도 많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이 배운 것이 바로 의암 손병희 선생의 3·1정신이었습니다. 요즘 말하는 한류의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삼각산 봉황각에서 시작된 3·1 운동 정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격이니까요. 한류의 시작이 바로 1919년 3월이었습니다. 당시 손병희 선생은 100년 뒤에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했습니다. 2019년이 3·1운동 100주년, 우리는 그분이 말했던 100년 뒤를 살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에는 에펠탑, 미국 독립 100주년에는 예수상을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3·1운동 100주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나막사에서는 앞으로 100년 뒤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의암 선생님 같은 분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100년 전의 의암 선생을 기리고, 사라져 가는 민족의 혼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다행스럽게도 ‘미래연대’를 만들어 100년 뒤를 예측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두가 있는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2019년 3월 1일은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다함께 그분들의 뜻을 이어받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지금 모든 행사에서는 의암 손병희 선생이 33인의 한 분으로 속해 있을 뿐 지도자로 인식되어 있지 않습니다.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삼각산에서, 그 힘으로 대혁명을 일으킨 지도자 의암 선생, 우리는 그분이 그렸던, 그리고 그분이 지키고 싶어 했던 정신을 잊으면 안됩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가난하게 살고 친일파의 후손은 떵떵거리고 사는 게 우리 세상입니다. 정신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역사는 왜곡되어 있습니다. 나막사는 앞으로 뿌리째 흔들리는 이 나라를, 함께 끌어갈 수 있는 정신문화를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연재 제3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 컬럼/연재/인물
-
연재 제2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
-
연재 제7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제약회사 입사 7년 만에 당초 입사 시 자신과의 약속대로 사표를 던졌다. 젊은 혈기에 더 큰 시장에 도전하고 싶었다. 1988년 당시 노태우정부는 대통령 공약대로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을 밀어붙였는데, 이 건설붐에 편승해 1989년 경남 양산에서 건축자재 제조업에 손을 댔다. 부동산 활황기에 좀 더 큰 시장을 겨냥했고 무엇보다도 평소 존경하던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의 건축업 성공스토리를 본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건축·건설자재 품귀현상이 빚어질 때였다. 시멘트의 경우는 품질은 묻지도 않고 중국에서 마구잡이로 들여올 정도였다. 집을 지으려니 많은 콘크리트가 필요했고 그래서 산을 깎아 자갈을 채취하여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그 당시 동일 업종에 손을 댄 사람치고 돈을 못 번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창업한 지 3년 만에 큰 성공을 하여 연간 매출액도 60억에 달했다. 그러나 건설경기가 하락하자 어음은 늘어나고 더욱이 어음기간도 늘어 운영자금을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중국합작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합작을 위해 두 차례 방문하여 합작의향서를 교환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귀국하는 날 태풍의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현장공장이 매몰된 게 아닌가. 산을 깎아 공장을 지었는데 호우로 인해 절단면이 무너지며 사일로, 중장비창고, 컨베이너 벨트 시설 등을 덮쳐버린 것이었다. 하늘이 무심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서의 사업을 못 하게 미리 막아준 것이라 생각을 하고 아쉬움을 달래면서 하늘에 감사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중국 사업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현실적으로 간신히 이끌어가던 사업도 자재대금에 대한 현금결제가 3개월 어음에서 6개월, 10개월 심지어는 1년으로 늦춰졌다. 1992년 초 급기야 받아 쥐고 있던 어음 53억 원이 부도가 났다. 참담했다. 시작 3년 만에 살던 주택과 현장 생산시설까지 소위 빚잔치로 전부를 넘기면서 부채를 정리했다. 남은 500만 원으로 소형주택의 방 한 칸을 얻어 보증금을 걸고 월세를 주기로 하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부채정리를 하고 손에 남은 것은 단돈 500만 원 정도였으니 문자 그대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것이다. 억장이 무너졌지만 가족들을 이끌고 전세방을 얻었다. 집은 좁고 겨울에는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바깥 날씨가 영하로 떨어질 때는 아이들을 중간에 두고 양쪽에 집사람과 내가 누워 서로의 체온으로 냉기를 이겨 내어야만 했다. 부도소식을 전해 들은 건설회사 여기저기에서 임원으로 합류해 달라는 부탁도 있었지만 이미 무너진 건설경기는 쉽게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더 이상의 미련과 후회는 가지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며 필자는 “송충이가 갈잎을 먹으니 처음에는 너무 맛있었지만 결국 배탈이 났다.”고 뉘우치며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연재 제8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 컬럼/연재/인물
-
연재 제7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