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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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제3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김현풍 나막사 총재 막걸리, 민족의 혼을 빚다 [글로벌문화신문] 우리들의 삶은 바로 3·1독립운동을 3·1혁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민족정신을 되세길 때입니다. 그리고 그런 민족정신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이 저는 ‘막걸리’라고 생각합니다. 막걸리는 우리 민족 고유의 술이며, 우리 민족의 얼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합일의식은 춤과 제사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절차에서 매개가 되는 것이 막걸리였고 고수레할 때나 나무를 옮겨 심고 잘 자라라고 뿌려주는 것도 막걸리였으며 여러 사람이 모여 화합과 정을 쌓는 매개가 되었던 것도 바로 막걸리였습니다.       즉 막걸리는 우리 전통이자 민족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막사는 막걸리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나라사랑 막걸리사랑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 유산 막걸리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이를 나라사랑으로 발전시키며, 더 많은 분들께우리의 얼과 정신문화를 전하고자 이 책을 펴냅니다. 막걸리 책이야 누구든지 읽고 막걸리도 다 먹어본 줄 압니다. 하지만 막걸리를 왜 먹는지, 막걸리에 왜 민족정신이 담겨 있는지, 막걸리 한 잔이 기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고 나라를 살릴 수 있음을 이해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끝까지 힘써준 김석주 선생과 귀한 사진을 제공해준 조창섭 사진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막걸리 시를 한 편 감상하며, 막걸리에 담긴 우리 민족의 혼과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는 기회가 되셨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그대 막걸리 (만초 김정현) 모처럼  옛친구 만나면무엇으로 화끈한 회포를 푸랴 잔치판 그것 없이 무슨 흥으로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랴 승리의 기쁨에 화합에무엇으로 왁자지끈 웃음꽃을 피우랴 억울한 일을 나약한 이웃에게무엇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주랴 하늘이 지상에 내린 선물 중낯선이도 한 잔 합세다아름다운 인심의 막걸리 선조들의 지혜의 우주가 담겨 있고낭만이 있는 먹거리 세계적인 발효술최고의 작품, 막걸리 토속문화로 이어진조상 대절의 살아 있는 고마움에 잔 부딪히며 술술 여름철 목 갈증에 노동에 출출할 때 값싸고 푸짐한 우리 신토불이 막걸리 세상이 변하고 변해도이 땅 이 나라만인에게 영원히 사랑 받을 막걸리 그대여 연재 제4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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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7
  • 연재 제2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나막사 김현풍 총재   [글로벌문화신문] 1919년 3월 1일, 의암 손병희 선생을 선두로 한 민족 대표인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습니다. 우이동의 천도교 봉황각에서였습니다. 의암 선생께서는 이곳에서 400명이 넘는 식구들에게 인쇄술을 비롯한 모든 것을 교육했고, 이곳이 3·1 독립운동의 발상지가 되었습니다.    봉황각에 가보면 아시겠지만 삼각산에서 가장 잘 보이고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경관이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삼각산이 가진 센 기운 때문에 의암 선생이 그곳에 터를 잡은 것이고 그 정기를 받아 3·1운동이 시작된 것이 아니겠습니니까?       더불어 삼가산 백운봉에 가시면 암각이 있습니다. 학생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 선생이 쓰신 3·1운동 암각문이 그곳에 새겨 있습니다. 이 3·1운동의 비폭력 저항정신은 중국의 5·4혁명을 일어나게 했고, 인도의 간디가 이끄는 비폭력 불복종 저항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혁명 그리고 미주에도 많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이 배운 것이 바로 의암 손병희 선생의 3·1정신이었습니다.   요즘 말하는 한류의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삼각산 봉황각에서 시작된 3·1 운동 정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격이니까요. 한류의 시작이 바로 1919년 3월이었습니다. 당시 손병희 선생은 100년 뒤에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했습니다.       2019년이 3·1운동 100주년, 우리는 그분이 말했던 100년 뒤를 살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에는 에펠탑, 미국 독립 100주년에는 예수상을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3·1운동 100주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나막사에서는 앞으로 100년 뒤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의암 선생님 같은 분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100년 전의 의암 선생을 기리고, 사라져 가는 민족의 혼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다행스럽게도 ‘미래연대’를 만들어 100년 뒤를 예측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두가 있는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2019년 3월 1일은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다함께 그분들의 뜻을 이어받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지금 모든 행사에서는 의암 손병희 선생이 33인의 한 분으로 속해 있을 뿐 지도자로 인식되어 있지 않습니다.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삼각산에서, 그 힘으로 대혁명을 일으킨 지도자 의암 선생, 우리는 그분이 그렸던, 그리고 그분이 지키고 싶어 했던 정신을 잊으면 안됩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가난하게 살고 친일파의 후손은 떵떵거리고 사는 게 우리 세상입니다. 정신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역사는 왜곡되어 있습니다. 나막사는 앞으로 뿌리째 흔들리는  이 나라를, 함께 끌어갈 수 있는 정신문화를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연재 제3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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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9
  • 연재 제7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제약회사 입사 7년 만에 당초 입사 시 자신과의 약속대로 사표를 던졌다. 젊은 혈기에 더 큰 시장에 도전하고 싶었다. 1988년 당시 노태우정부는 대통령 공약대로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을 밀어붙였는데, 이 건설붐에 편승해 1989년 경남 양산에서 건축자재 제조업에 손을 댔다.   부동산 활황기에 좀 더 큰 시장을 겨냥했고 무엇보다도 평소 존경하던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의 건축업 성공스토리를 본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건축·건설자재 품귀현상이 빚어질 때였다. 시멘트의 경우는 품질은 묻지도 않고 중국에서 마구잡이로 들여올 정도였다. 집을 지으려니 많은 콘크리트가 필요했고 그래서 산을 깎아 자갈을 채취하여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그 당시 동일 업종에 손을 댄 사람치고 돈을 못 번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창업한 지 3년 만에 큰 성공을 하여 연간 매출액도 60억에 달했다. 그러나 건설경기가 하락하자 어음은 늘어나고 더욱이 어음기간도 늘어 운영자금을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중국합작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합작을 위해 두 차례 방문하여 합작의향서를 교환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귀국하는 날 태풍의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현장공장이 매몰된 게 아닌가. 산을 깎아 공장을 지었는데 호우로 인해 절단면이 무너지며 사일로, 중장비창고, 컨베이너 벨트 시설 등을 덮쳐버린 것이었다.   하늘이 무심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서의 사업을 못 하게 미리 막아준 것이라 생각을 하고 아쉬움을 달래면서 하늘에 감사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중국 사업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현실적으로 간신히 이끌어가던 사업도 자재대금에 대한 현금결제가 3개월 어음에서 6개월, 10개월 심지어는 1년으로 늦춰졌다. 1992년 초 급기야 받아 쥐고 있던 어음 53억 원이 부도가 났다. 참담했다.         시작 3년 만에 살던 주택과 현장 생산시설까지 소위 빚잔치로 전부를 넘기면서 부채를 정리했다. 남은 500만 원으로 소형주택의 방 한 칸을 얻어 보증금을 걸고 월세를 주기로 하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부채정리를 하고 손에 남은 것은 단돈 500만 원 정도였으니 문자 그대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것이다. 억장이 무너졌지만 가족들을 이끌고 전세방을 얻었다. 집은 좁고 겨울에는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바깥 날씨가 영하로 떨어질 때는 아이들을 중간에 두고 양쪽에 집사람과 내가 누워 서로의 체온으로 냉기를 이겨 내어야만 했다.   부도소식을 전해 들은 건설회사 여기저기에서 임원으로 합류해 달라는 부탁도 있었지만 이미 무너진 건설경기는 쉽게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더 이상의 미련과 후회는 가지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며 필자는 “송충이가 갈잎을 먹으니 처음에는 너무 맛있었지만 결국 배탈이 났다.”고 뉘우치며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연재 제8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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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8
  • 박명인 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의 '도식론 1'
          [글로벌문화신문] 일반적으로 도식이란 다이어그램과 같이 복수 항목의 관계나 사물의 커다란 윤곽을 나타내는 소묘를 말하지만, 철학적·미학적 개념으로서의 도식은 대상의 지각과 산출에 의한 정신의 규제적인 원리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어의 경우에 전자를 le schéma(도식), 후자를 le schéme로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개념은 원래 전자를 후자에 적용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복잡한 사상(事象)에 대해서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복수 항목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다이어그램을 쓰는 것은 그 현상을 분석하고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며, 그러한 전체상(全體像)을 얻어서 처음으로 그 현상을 하나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라첼리에(Jean Lachelier, 1639-99)는 도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도표를 그릴 때 상상력 안에서 순수한 경향의 상태에서 찾아지는 규칙’ 미학에서 이 개념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은 레이먼드 바이엘(Raymond Bayer)이 효시다. 그는 ‘도식현상(schmatisme)’으로서 문체ㆍ공통 토포스(topos)ㆍ카논(canon)ㆍ유형 등을 채용하고, 그 특징을 구체적 보편에 의해 독특한 고차원적 감수성이라는 점을 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예술현상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의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체험은 항상 다른 것으로 통하는 보편적 특질을 전개해 간다는 것이다.    도식은 구체적인 개별적 경험을 보편적인 개념으로 다른 개별적인 표현에 매개하는 것이다. 래이먼드 바이엘은 결과로 얻을 수 있었던 표현을 도식적인 것만을 채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도식이 움직이고 있는 장소는 넓다. 인간의 창조는 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소여(所與)로 변형하는 것이다. 도식이란 단적으로 인간적인 창조적 상상력의 형이 아니면 안 된다.   개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보편성이 있는 표현에 통로를 개척하는 예술가의 감수성은 독특한 것이며 보통 지각과 무연(無緣)한 것이 아니다. 그 메커니즘을 생각하는 동시에 칸트를 참조해야 한다. 칸트야말로 도식의 구조를 처음으로 지적하여 이론화한 인물이다. 그는 선험적 감성론이란 감각적 지각이 어떻게 성립하는 것인지를 해명하려고 했다.    이 문제는 고전적인 것으로써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질적인 두 개의 실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다시 말해, 인식하는 것은 정신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물적 대상을 지각하는 경우, 컵이 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대상을 어떤 의미에서 정신화하지 않으면 자기와 동화될 수 없다. 이 동화에는 정신의 능동적 작용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우선, 물적 대상에 한하지 않고 인식인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신이 능동적인 형식으로서의 카테고리(순수오성개념)라는 것을 내세웠다. 그것은 일종의 규제적인 틀이며 대상이 제어될 때 처음으로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양ㆍ질ㆍ관계ㆍ양상의 네 가지에 대해서 각각 세 개의 규정성이 상정(想定)되고 있다. 그러나 카테고리는 순수개념오성이며 감각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 대상을 알게 되는 경우에 직접 이것을 감각소여에 적용할 수는 없다.   거기에서 감각소여와 카테고리를 이어 나가는 제3자, 다시 말해, 지성적인 것과 동시에 감각적인 것으로서 칸트는 선험적도식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시간의 형식 안에서 이 도식의 활동을 인정하고, 네 개의 카테고리의 각각에 대해서 도식을 규정했다(시간의 계열, 내용, 순서, 총괄). 따라서 도식이란 정신이 물적 대상에 제의하는 이른바 정신화하기 위한 능동적 원리이다.   문제는 지각론이 아니라 도식의 개념이다. 칸트에 의하면 순수한 감각적 개념의 근저에 있는 것은 대상의 상(Bild)이 아니라 도식이다. 예를 들면, 삼각형의 경우 각도나 변을 비교하면 수없이 많은 것이 있어서 서로 다른 상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 대한 도식은 개념과 상의 중간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 즉, 단순한 개념(3변을 가지는 다각형)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려 내고 있지만 특정한 각도나 변의 비교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삼각형에 해당된다.   이 의미에서 도식은 감각적 대상과 개념을 매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식없이는 눈앞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 보는 네발 동물을 아마 동물로서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이미 동물의 도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개(犬)라는 같은 종류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은 그 수준에서의 도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이것을 도식이라고 하지 않고 이미지라고 부를 때가 많다. 그러나 감각적인 상이 아니라 상당히 개념적인 표상으로서의 도식이다.   칸트가 문제로 하는 것은 이러한 개별적인 도식이 아니라 선험적 도식이다. 그것은 각각의 도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그것과 달리 예술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칸트의 도식보다도 개별적인 수준에 있다. 그래도 칸트의 구상은 예술의 경우에서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 대상을 지각하여 이해하는 것이 결코 단순한 수동적인 프로세스(process)에서가 아니라 정신의 능동적인 관여가 전제되어 도식이 거기에서 대상에 적용되는 정신의 규정적인 계기라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지각의 능동적 형식으로서의 도식에 대해 잘 알려진 것으로 곰브리치의 설이다. 그가 말하는 도식은 심리학으로부터 차입된 심리구조(mental set)의 형태라고 생각된다. 이미 파장을 맞는 수신기를 가져서 그들 미술가의 작품에 임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상술(上述)한 바와 같이 기대의 수준을 심리구조라고 칭하고 있다.    ‘심리적 구조란 정확하게 말하면 투사개시의 준비가 갖추어진 상태, 혹은 지각의 주변에 언제나 명멸하고 있는 환상의 색이나 환상 이미지의 촉수를 밀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즉, 지각의 선별작용을 하는 독자적인 태세다. 개인적인 것도, 또한 시대의 규정에 의한 것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작품의 경향으로서의 양식과 같다.   곰브리치의 사상에는 독창적인 것은 없다. 도식의 사고방식을 미술의 장면에 적용한 것에 새로움은 있어도 지각이론이나 도식개념에 혁신을 초래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강점은 무엇 보다도 도식에 관한 풍부한 실례를 채용해 보도록 한다.       고래 판화, 16세기 말 ~17세기 초       MILLEFLEURS: 도식적인 꽃과 동물, 15세기,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두에 그려진 고래(鯨) 판화 2점에는 진짜 고래에는 없는 귀가 그려져 있다. 그것은 화가가 귀를 착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16세기 중간쯤 독일의 신문에 실린 로마의 조망도 성·탄제로 성에는 급경사 지붕의 목조가옥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로마가 성새도시(城塞都市)라고 생각한 화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독일의 성새도시를 모델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는 상당히 황당한 것이지만 언뜻 보면 완전히 사실적이라고 보이는 그림조차 왜곡을 보게 된다.   17세기의 화가 마테우스·메리안이 그린 파리의 노틀담 측면도는 언뜻 보면 충실하게 재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큰 반원형 창문을 가진 좌우 대칭의 높은 건물’이라는 사원관(寺院觀)에 따라 현실의 모습이 개변(改變)된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오른쪽에 치우쳐 있는 대문 좌우 쪽에 잇대어 지은 행랑을 중앙에 두고 있다.   이것들의 예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미술이 개념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회화는 결코 자연적 기호가 아니다. 순수한 사실묘사라고 말하기 쉽지만 실제로 불가능과도 같다. 그것을 위해 타인의 지적을 받아 수정을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나아가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곤란해도 초등도식(initial schema)를 선택하고, 이것을 과정으로 묘사하는데 순응하는 수 밖에 없다.   그 미술가는 시각적 인상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이라든가 개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고래를 그린 화가는 반드시 귀가 있는 동물의 머리를 표상하는 도식을 가지고 있고 로마를 그린 독일 화가도 성새도시의 도식에 있어서 성에는 급경사 지붕이 딸려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또한 노틀담 화가 메리안도 대성당은 좌우 대칭이 아니면 안되었다. 어떤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일반적인 이미지, 즉 도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화가는 그 도식을 출발점으로 만드는 것과 맞추는 것(making and matching)에 의해 작업을 진행시켜 간다. 초등도식(初等圖式)은 관찰하는 것도 불가결하다. 그것이 특히 작품해석에서 채용할 수 있었던 것이 mental set·swap allocation table인 것은 위에서 본대로다.   기대를 갖지 않고 관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며 과학에 있어서 조차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칼·포퍼(Sir Karl Raimund Poppe)가 역설한 것과 같이 모든 관찰은 자연에 대한 질문의 결과이며 시도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칸트가 ‘요소적·원리적인 수준으로 함께 이야기한 것, 지각에는 정신이 능동적인 관여가 전제되어 있는 것, 그리고 이른바 정신에 있는 것 밖에 볼 수 없다,라는 것의 옳음이 보다 유의미한 구체적인 활동에서 확인됐다고 말할 수 있다.     스위스의 지도 제작자인 마테우스 메리안이 1615년에 판화로 만든 파리 지도(메리안 지도).              퐁 뇌프 다리. 다리 뒤쪽 시테섬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곰브리치에 있어서는 지각 혹은 해석의 장면에서 ‘mental set’가 창작의 장면에서는 도식이 각각 별개로 논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도식은 창작의 장면에서 작용하는 규제적인 원리이지만 고래(whale), 성새도시, 카테드랄(cathedral, 대성당)은 모두 표상의 왜곡된 예이며, 창조성이 생각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들의 도식이 기능하는 실태는 과거 경험의 집적(集積)에 의해 형성된 기대 혹은 예측에 의한 지각의 규제라는 성격이 강하다. 그것에 대해 참으로 창조론으로 기능하는 도식을 생각한 것으로서는 베르그송의 ‘역동도식(Le schéma dynamique)’이 있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말하는 역동도식이 무엇인가 말하자면 그 자신이 거론하고 있는 예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상기하려고 할 때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목구멍에서 나오려고 하는 그 느낌에 주목하는 것이 좋다. 이 목구멍에서 나오려고 하는 느낌이 그 이름의 역동도식과 같은 것이다. 베르그송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기나, 설교사가 그 텍스트의 전체를 암기할 때의 메커니즘, 그위에 창조적인 예술가의 발상 등을 ‘지적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기억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상기하는데 노력없이 기계론적인 암기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말이 나오는 것 같은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상기에 손이 간 것이 있다. 역시 긴 문장을 기억할 경우를 예로 든다면 기억술의 서적이 가르치고 있는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다. 문장을 조심스럽게 읽고 그 다음 내적인 조직을 생각하고, 단락 또는 부분으로 나눈다. 거기에서 전체의 도식적인 겨냥을 할 수 있고, 그로부터 이 도식의 내부에 가장 두드러진 표현을 끼워 넣는다.   그리고 상기할 때는 반대로 이 추상적인 골조에 구체적인 말을 복원해 가는 셈이어서 거기에는 이미 어느 정도 창조적인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이 도식적인 도(圖)이며, 그 기억의 요체는 모든 관념, 모든 이미지, 모든 단어를 단순히 한 점에 집약하게 한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 응축된 많은 이미지에 전개할 수 있는 단순한 표상을 가리켜 베르그송은 역동도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개념에 관해서 두 가지가 문제 된다. 우선 이 명명에서 베르그송은 ‘그리스어를 수용해’거절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어의 의미를 담아’라는 의미일 것이다. schéma도 dynamique도 함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단어이며 이 단서는 어느 쪽에도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모양을 의미하는 schéma는 특수한 의미로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한정하고 있는 dynamique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역동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러면 그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문맥에 있어서 베르그송이 ‘기타의 일절이 잔돈(monnaie)에 지나지 않는 기본화폐(piece)라고 하는 비유를 채용하면서 그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어의 dynamis에는 화폐의 가치의 의미가 있다. 이 의미를 거론하면 schéma dynamique란 고가치의 도식이라고 말하게 된다. 또 하나는 철학용어로서 친숙한 세태라는 의미다.   그 가운데에서 단어의 기본적인 어의로서의 계기는 당연히 은폐된 상태로부터 확실히 현현(顯現)해 가는 현실화의 경향에 있고, 이것도 또한 베르그송의 역동도식의 성격으로 타당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현실화하려고 하는 도식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은 어석(語釋)에서는 대립하지만 사상적으로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역동도식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그것 자체가 현실화된 다이어그램이 아니라 세태적인 규제적 원리라면 왜, schéme가 아니고 schéma일까? 이것이 제2의 문제이다. 사실은 베르그송에서는 유사한 개념이 또 하나 있다. 즉, 운동적 도식(le schéme moteur)이다. 이것도 또한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며 말을 들어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운동적 도식에 의한 것이다.   청각적 인상은 단순한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말의 움직임을, 즉 ‘초동적(初動的)인 근육감각(sensations musculaires naissantes)으로서의 듣는 말의 운동적 도식’을 듣는 사람 안에서 산출한다. 다시 말해, 운동적 도식도 현실화를 촉진시키는 원리이며, 역동적 도식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방향이 schéma에서 다른 방향으로 schéme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단지 각각 붙일 수 있었던 형용사의 성질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개념상의 구별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베르그송이 이 두 가지 도식을 어떻게 표상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에 유래하는 것이 틀림없다. 역동적도식 쪽은 전체를 응축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전체가 잠재적으로 그 곳에 있으며 그 의미에서 전체상(다이어그램)을 인정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운동적 도식 쪽은 시간적으로 전개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상이 그 곳에 있으면 빛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것을 현실화해 가는 힘이라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예술창조를 생각하면 이 두 가지 도식을 공간적ㆍ시간적이라는 존재 위상의 차이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근본적인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베르그송은 역동도식을 발명이나 예술창조에서 인정하고 있다. ‘소설을 만드는 작가, 극중인물이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극작가, 교향곡을 작곡하는 작곡가, 시인은 처음에는 정신적으로 단순하게 추상적인, 즉 비물체적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음악가나 시인에 있어서는 소리나 이미지에 전개해야 할 새로운 인상(印象)이다.    또한 소설가나 극작가에 있어서는 사건으로 전개해야 할 명제, 살아 있는 인물에게라도 구체화해야 할 개인적 혹은 사회적인 감정이다. 그들은 전체를 나타내는 도식에 조작을 가하고 판명한 제 요소의 이미지에 도달했을 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역동도식이란 보통 작품의 이미지라고 불리는 맹아(萌芽)이다. 그 맹아는 스스로 전개하려는 힘을 내포하고 있는 역동성이 예술가에 대해 현실화를 촉구한다. 예술가에 있어서 이 맹아는 마치 상기할 수 없는 이름과 같이 막연하게 취할 수 없는 것이면서 명확한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도식의 역동성으로 움직임으로 해서 시행착오(making and matching)를 되풀이해서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 때, 이름을 상기하는 것과 같은 경우와 다른 한 점이 있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상기하는 경우, 역동도식의 내실은 그 이름을 상기한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예술창조의 경우, 전개의 프로세스는 엄밀한 의미로 창조이며 단순한 전개나 현실화가 아니다. 다시 말해, 작품의 맹아는 완성된 작품에 고정할 수 없다. 창조의 과정은 당초 역동도식 바로 그것의 변경을 수반해 간다고 생각된다.   한편 베르그송의 개념을 예술철학에 있어서 앙리·구히에(Henri Gouhier, 1989-1994)가 구체적인 플롯(plot, 구성)에 전개해야 할 극적 행동(action)을, 또한 에티엔 수리오(Etienne Souriau)는 극적 상황을 역동도식으로 논한 예가 있다.   베르그송의 역동도식은 그 창조성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Kant)나 곰브리치와 같은 지각의 장면에도 적용되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수용의 기능적 도식이 창조의 원리에 전환되어 가는 사실을 설명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배르그송은 지적노력(知的努力)으로서의 지식해작용(知識解作用, intellection)을 논한다. 글을 읽거나 말을 듣거나 해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수학의 증명을 풀어가는 경우와 같으며, 단지 받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떤 계산을 풀어 갈 때, 스스로 그것을 하고 있지 않으면, 풀어 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문제를 자신이 풀고 있지 않으면 그 문제의 해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읽을 때나 들을 때도 일부분 밖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나머지는 기억에 의해 보완하게 된다. 외국어 단어를 듣고 알지 못하는 것은 이 보완 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각은 기억만으로 점점 좋아질 수 없고, 명확한 형을 취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해작용(解作用)도 또한 잠세적(潛勢的)인 도식에서 지각적 이미지로 옮겨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결론한다. 이러한 고찰을 근거로 최후에 베르그송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조의 노력이 도식으로부터 구체적 이미지로 전개하는 것을 논하고, 수용과 창조를 포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극을 받을 때에 이미 능동적인 관여가 시작되고 그 발전 안에서 창조가 행하여지는 셈이다.   그 사상은 크로체(Benedetto Croce)의 직관=표현설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보다 구체적인 설명의 가능성을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생(生)의 수동적 측면이 능동적 측면으로 전개해 가는 다이너미즘(dynamism)을 상당 정도까지 해명하고 있다.   
    • 컬럼/연재
    2022-05-11
  • 연재 제1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나막사 김현풍 총재     [글로벌문화신문] ‘막걸리, 민족의 혼을 빚다’ 지금 제일 힘들고 고달픈 때입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나막사(나라사랑 막걸리사랑)’라는 이름 아래 모인 모두가 국민에게 기를 불어 넣고 다시 한 번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함께 만들었으면 합니다.   비극의 역사 일제가, 내선일체를 말하며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했던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민족의 얼과 혼, 기를 꺽기 위한 일제의 만행은 지명의 변화로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일종의 창씨개명과 같은 것이지요. ‘홍성’은 본래 ‘홍주’와 ‘결성’ 이었던 두 곳의 글자를 합쳐 기를 꺽은 경우이고, 인왕산(仁王山)도 王 자를 旺 자로 바꾸어 사용하여 마치 일본의(日+王)을 뜻하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의왕시의 ‘왕’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속리산의 천황봉도 본래 천왕봉인데 일제가 천황봉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일본 천황을 가르키는 황皇 자를 쓴 것이었지요. 그 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 일제가 특히 집중했던 곳이 있습니다.   삼각산    많은 분들께서 ‘북한산’이라고 부르는 산입니다. 이 이름은 1915년 일제에 의해 바뀌었던 이름입니다. 본 이름은 ‘삼각산’입니다. 동시에 청와대 뒷산인 ‘백악산’도 ‘북악산’이 되었습니다. 왜 일제는 산의 이름을 굳이 바꾸었을까요? 이 두 산은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맥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경복궁을 비롯한 모든 터잡기의 기본은 풍수에 의한 것이었는데, 백두산의 정기가 조산(祖山)인 삼각산을 타고 내려와 주산(主山)인 백악산을 지나면 경복궁 위치에 다다릅니다. 이렇게 흐르는 민족의 정기를 끊어 놓고자 이름을 바꾼것이지요.   그러니 삼각산과 백악산의 이름을 제대로 되돌려놓지 않으면 나라가 잘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일제가 바꾸어 놓은 북악산에 사용했던 ‘북’ 자는 북망산천(사람이 죽어 묻히는 곳)의 ‘북’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가 꺽여 계속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저는 2005년 강북구청장 재임시절 문화재청으로부터 삼각산과 백악산을 명승 제10호로 지정 받아 놨습니다. 그리고 산림청으로부터도 자정을 받아놨습니다. 그런데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뭘가요?   지명을 이렇게 고착화 시켜 놓은 것은 식민사관의 친일 사학자들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는 친일 사학자의 후손과 제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습니다. 날로 번성 하고 있고요.       그들이 지명을 바로 잡게 되면, 스스로 친일을 했다는 반증이 되므로 북한산, 북악산의 명칭이 일제 잔재가 아니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류 사학계가 이런 실정이니 재야 사학자들의 외침은 묻힐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요.   북한 노래 가사 중에 ‘모란봉에서 삼각산까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전에 개성공단에 남한 사람이 가서 ‘북한 산 잘 보인다’고 했더니 북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북한산은 북한에 있는 산이고 그 산은 삼각산입니다.” 망신스러운 일입니다.   오히려 이런 면에서 북한은 철저하게 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혀 손도 못 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3.1운동의 항일정신을 잊고, 중요한 일을 해결하지 못한 부끄러운 후손이 바로 우리입니다.   연재 제2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
    2022-05-08
  • 연재 제 6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굴지의 제약회사에서 톱 세일즈맨이 되다   열심히 1년을 재수하여 대구에 있는 대구고등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후일 알았지만 깡촌의 시골중학교에서의 학업실력과 대구의 일류 중학교 같은 학년과의 학업실력은 엄청난 차이가 났다.   대구에 유학하면서 타 고교의 학생과 사귀게 되었는데 고교 2학년 때 하루는 그 친구가 영어 시험지를 좀 봐 달라고 했다. 그 친구의 학교는 그 당시 등록금만 내면 합격하는 만년 미달의 3류 고등학교였는데 영어시험지가 적어도 필자의 눈에는 중학교 3학년 정도의 문제였으니, 창피한 소리이지만 옛날의 칠곡의 깡촌 중학교에서 ‘잘해 봤자’였던 실력이었던 것이다.     1982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몇 군데 응시한 대기업 입사시험에서도 수차례 고배를 마셨다. 우여곡절 끝에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에 면접을 보게 됐는데 늘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기에 거의 포기한 심정에서 할 말이라도 좀 하자고 마음을 비웠다.    최종 면접에서 회장 내외분과 사장이 임석한 가운데 회장님이 ‘술을 잘 하느냐’ 고 물어 왔다. “막걸리는 배불러서, 소주는 취해서, 양주는 돈이 없어 못 마십니다.” 라고 했더니 껄껄 웃으셨는데 결과는 합격이었다.   필자는 우선 앞으로의 계획으로1. 7년 안에 ‘톱 세일즈맨’이 된 뒤 퇴사2. 짬나는 시간을 이용해 석사학위 취득3. 영어·일어 학습 뒤 해외영업 진출 등 3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 필자는 입사 지원 시 마케팅부서로 내근직을 지원했다. 2년여를 마케팅 부서에서 PM직을 수행하다가 생각을 바꿔 영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영업사원으로서 상기의 목표 달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무엇보다 최고의 세일즈맨이 되겠다는 현실적 목표가 필자에게 더 많은 추진력을 보태 주었다.   예를 들어 세일즈를 하면서 영업회의 시 월간목표를 발표할 때 남들은 대개 200이라고 할 때 필자는 보통 800이라 말하여 회의실의 사람들이 수군거렸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다음 달 결산회의 때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져 있었다.   보통 다른 영업사원들이 200의 목표를 세워놓고 180을 하여 90%의 실적달성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800의 목표를 세워 70%인 560의 실적을 올렸으니 소위 달성률은 낮았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3배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코웃음 치던 영업부에서도 이런 실적이 몇 번 계속되자 모두들 필자의 영업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필자는 맨 먼저 시내의 약국을 방문하여 시장조사를 철저히 하여 모든 실제적 수치를 가지고 영업에 임하였다.    실적도 덩달아 올랐다. 5년 만에 회장보다도 표면적 월급은 더 많이 받았다. 세금도 더 많이 내는 톱 세일즈맨으로 사보에 2년 연속으로 게재되기도 했다.   한 가지 기억나는 일이 있다. PM시절, 우리 회사에서 필자가 만든 소화제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자연 필자의 업무도 많아졌다. 더 많은 실적을 위해 지방출장이 잦았는데 그 당시 새마을 열차를 타고 가곤 했다.    서울을 좀 벗어난 소도시의 철로변 전봇대에 소화제 광고가 몇 십km를 가더라도 연달아 붙어있어 아주 흐뭇했던 기억이 있다. 소화효능이 좋아 이미 국민소화제가 되어 있었던 바로 그 대웅제약의 베아제이다.   연재 제7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
    2022-05-07

실시간 컬럼/연재 기사

  • 연재 제3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김현풍 나막사 총재 막걸리, 민족의 혼을 빚다 [글로벌문화신문] 우리들의 삶은 바로 3·1독립운동을 3·1혁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민족정신을 되세길 때입니다. 그리고 그런 민족정신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이 저는 ‘막걸리’라고 생각합니다. 막걸리는 우리 민족 고유의 술이며, 우리 민족의 얼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합일의식은 춤과 제사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 절차에서 매개가 되는 것이 막걸리였고 고수레할 때나 나무를 옮겨 심고 잘 자라라고 뿌려주는 것도 막걸리였으며 여러 사람이 모여 화합과 정을 쌓는 매개가 되었던 것도 바로 막걸리였습니다.       즉 막걸리는 우리 전통이자 민족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나막사는 막걸리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나라사랑 막걸리사랑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우리 유산 막걸리의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이를 나라사랑으로 발전시키며, 더 많은 분들께우리의 얼과 정신문화를 전하고자 이 책을 펴냅니다. 막걸리 책이야 누구든지 읽고 막걸리도 다 먹어본 줄 압니다. 하지만 막걸리를 왜 먹는지, 막걸리에 왜 민족정신이 담겨 있는지, 막걸리 한 잔이 기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고 나라를 살릴 수 있음을 이해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끝까지 힘써준 김석주 선생과 귀한 사진을 제공해준 조창섭 사진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막걸리 시를 한 편 감상하며, 막걸리에 담긴 우리 민족의 혼과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는 기회가 되셨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그대 막걸리 (만초 김정현) 모처럼  옛친구 만나면무엇으로 화끈한 회포를 푸랴 잔치판 그것 없이 무슨 흥으로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랴 승리의 기쁨에 화합에무엇으로 왁자지끈 웃음꽃을 피우랴 억울한 일을 나약한 이웃에게무엇으로 위로하고 용기를 주랴 하늘이 지상에 내린 선물 중낯선이도 한 잔 합세다아름다운 인심의 막걸리 선조들의 지혜의 우주가 담겨 있고낭만이 있는 먹거리 세계적인 발효술최고의 작품, 막걸리 토속문화로 이어진조상 대절의 살아 있는 고마움에 잔 부딪히며 술술 여름철 목 갈증에 노동에 출출할 때 값싸고 푸짐한 우리 신토불이 막걸리 세상이 변하고 변해도이 땅 이 나라만인에게 영원히 사랑 받을 막걸리 그대여 연재 제4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
    2022-07-07
  • 연재 제2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나막사 김현풍 총재   [글로벌문화신문] 1919년 3월 1일, 의암 손병희 선생을 선두로 한 민족 대표인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만들었습니다. 우이동의 천도교 봉황각에서였습니다. 의암 선생께서는 이곳에서 400명이 넘는 식구들에게 인쇄술을 비롯한 모든 것을 교육했고, 이곳이 3·1 독립운동의 발상지가 되었습니다.    봉황각에 가보면 아시겠지만 삼각산에서 가장 잘 보이고 아래에서 올려다 보는 경관이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삼각산이 가진 센 기운 때문에 의암 선생이 그곳에 터를 잡은 것이고 그 정기를 받아 3·1운동이 시작된 것이 아니겠습니니까?       더불어 삼가산 백운봉에 가시면 암각이 있습니다. 학생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정재용 선생이 쓰신 3·1운동 암각문이 그곳에 새겨 있습니다. 이 3·1운동의 비폭력 저항정신은 중국의 5·4혁명을 일어나게 했고, 인도의 간디가 이끄는 비폭력 불복종 저항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와 중동 지역의 혁명 그리고 미주에도 많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이 배운 것이 바로 의암 손병희 선생의 3·1정신이었습니다.   요즘 말하는 한류의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삼각산 봉황각에서 시작된 3·1 운동 정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격이니까요. 한류의 시작이 바로 1919년 3월이었습니다. 당시 손병희 선생은 100년 뒤에 새로운 시대가 온다고 했습니다.       2019년이 3·1운동 100주년, 우리는 그분이 말했던 100년 뒤를 살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에는 에펠탑, 미국 독립 100주년에는 예수상을 세웠습니다. 그렇다면 3·1운동 100주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리 나막사에서는 앞으로 100년 뒤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의암 선생님 같은 분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100년 전의 의암 선생을 기리고, 사라져 가는 민족의 혼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옵니다. 다행스럽게도 ‘미래연대’를 만들어 100년 뒤를 예측하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모두가 있는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2019년 3월 1일은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다함께 그분들의 뜻을 이어받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지금 모든 행사에서는 의암 손병희 선생이 33인의 한 분으로 속해 있을 뿐 지도자로 인식되어 있지 않습니다.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삼각산에서, 그 힘으로 대혁명을 일으킨 지도자 의암 선생, 우리는 그분이 그렸던, 그리고 그분이 지키고 싶어 했던 정신을 잊으면 안됩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가난하게 살고 친일파의 후손은 떵떵거리고 사는 게 우리 세상입니다. 정신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역사는 왜곡되어 있습니다. 나막사는 앞으로 뿌리째 흔들리는  이 나라를, 함께 끌어갈 수 있는 정신문화를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연재 제3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
    2022-05-19
  • 연재 제7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제약회사 입사 7년 만에 당초 입사 시 자신과의 약속대로 사표를 던졌다. 젊은 혈기에 더 큰 시장에 도전하고 싶었다. 1988년 당시 노태우정부는 대통령 공약대로 주택 200만 호 건설 정책을 밀어붙였는데, 이 건설붐에 편승해 1989년 경남 양산에서 건축자재 제조업에 손을 댔다.   부동산 활황기에 좀 더 큰 시장을 겨냥했고 무엇보다도 평소 존경하던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의 건축업 성공스토리를 본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건축·건설자재 품귀현상이 빚어질 때였다. 시멘트의 경우는 품질은 묻지도 않고 중국에서 마구잡이로 들여올 정도였다. 집을 지으려니 많은 콘크리트가 필요했고 그래서 산을 깎아 자갈을 채취하여 판매하는 사업을 했다.       그 당시 동일 업종에 손을 댄 사람치고 돈을 못 번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창업한 지 3년 만에 큰 성공을 하여 연간 매출액도 60억에 달했다. 그러나 건설경기가 하락하자 어음은 늘어나고 더욱이 어음기간도 늘어 운영자금을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하여 중국합작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합작을 위해 두 차례 방문하여 합작의향서를 교환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귀국하는 날 태풍의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현장공장이 매몰된 게 아닌가. 산을 깎아 공장을 지었는데 호우로 인해 절단면이 무너지며 사일로, 중장비창고, 컨베이너 벨트 시설 등을 덮쳐버린 것이었다.   하늘이 무심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서의 사업을 못 하게 미리 막아준 것이라 생각을 하고 아쉬움을 달래면서 하늘에 감사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중국 사업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현실적으로 간신히 이끌어가던 사업도 자재대금에 대한 현금결제가 3개월 어음에서 6개월, 10개월 심지어는 1년으로 늦춰졌다. 1992년 초 급기야 받아 쥐고 있던 어음 53억 원이 부도가 났다. 참담했다.         시작 3년 만에 살던 주택과 현장 생산시설까지 소위 빚잔치로 전부를 넘기면서 부채를 정리했다. 남은 500만 원으로 소형주택의 방 한 칸을 얻어 보증금을 걸고 월세를 주기로 하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부채정리를 하고 손에 남은 것은 단돈 500만 원 정도였으니 문자 그대로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된 것이다. 억장이 무너졌지만 가족들을 이끌고 전세방을 얻었다. 집은 좁고 겨울에는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바깥 날씨가 영하로 떨어질 때는 아이들을 중간에 두고 양쪽에 집사람과 내가 누워 서로의 체온으로 냉기를 이겨 내어야만 했다.   부도소식을 전해 들은 건설회사 여기저기에서 임원으로 합류해 달라는 부탁도 있었지만 이미 무너진 건설경기는 쉽게 돌아올 것 같지 않았다.   더 이상의 미련과 후회는 가지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며 필자는 “송충이가 갈잎을 먹으니 처음에는 너무 맛있었지만 결국 배탈이 났다.”고 뉘우치며 송충이는 역시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연재 제8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
    2022-05-18
  • 박명인 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의 '도식론 1'
          [글로벌문화신문] 일반적으로 도식이란 다이어그램과 같이 복수 항목의 관계나 사물의 커다란 윤곽을 나타내는 소묘를 말하지만, 철학적·미학적 개념으로서의 도식은 대상의 지각과 산출에 의한 정신의 규제적인 원리다. 흥미로운 것은 프랑스어의 경우에 전자를 le schéma(도식), 후자를 le schéme로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개념은 원래 전자를 후자에 적용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복잡한 사상(事象)에 대해서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복수 항목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다이어그램을 쓰는 것은 그 현상을 분석하고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며, 그러한 전체상(全體像)을 얻어서 처음으로 그 현상을 하나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라첼리에(Jean Lachelier, 1639-99)는 도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도표를 그릴 때 상상력 안에서 순수한 경향의 상태에서 찾아지는 규칙’ 미학에서 이 개념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은 레이먼드 바이엘(Raymond Bayer)이 효시다. 그는 ‘도식현상(schmatisme)’으로서 문체ㆍ공통 토포스(topos)ㆍ카논(canon)ㆍ유형 등을 채용하고, 그 특징을 구체적 보편에 의해 독특한 고차원적 감수성이라는 점을 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예술현상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의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체험은 항상 다른 것으로 통하는 보편적 특질을 전개해 간다는 것이다.    도식은 구체적인 개별적 경험을 보편적인 개념으로 다른 개별적인 표현에 매개하는 것이다. 래이먼드 바이엘은 결과로 얻을 수 있었던 표현을 도식적인 것만을 채용하고 있지만 이러한 도식이 움직이고 있는 장소는 넓다. 인간의 창조는 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소여(所與)로 변형하는 것이다. 도식이란 단적으로 인간적인 창조적 상상력의 형이 아니면 안 된다.   개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보편성이 있는 표현에 통로를 개척하는 예술가의 감수성은 독특한 것이며 보통 지각과 무연(無緣)한 것이 아니다. 그 메커니즘을 생각하는 동시에 칸트를 참조해야 한다. 칸트야말로 도식의 구조를 처음으로 지적하여 이론화한 인물이다. 그는 선험적 감성론이란 감각적 지각이 어떻게 성립하는 것인지를 해명하려고 했다.    이 문제는 고전적인 것으로써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질적인 두 개의 실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가능성을 묻고 있다. 다시 말해, 인식하는 것은 정신이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물적 대상을 지각하는 경우, 컵이 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대상을 어떤 의미에서 정신화하지 않으면 자기와 동화될 수 없다. 이 동화에는 정신의 능동적 작용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칸트는 우선, 물적 대상에 한하지 않고 인식인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신이 능동적인 형식으로서의 카테고리(순수오성개념)라는 것을 내세웠다. 그것은 일종의 규제적인 틀이며 대상이 제어될 때 처음으로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양ㆍ질ㆍ관계ㆍ양상의 네 가지에 대해서 각각 세 개의 규정성이 상정(想定)되고 있다. 그러나 카테고리는 순수개념오성이며 감각적인 것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 대상을 알게 되는 경우에 직접 이것을 감각소여에 적용할 수는 없다.   거기에서 감각소여와 카테고리를 이어 나가는 제3자, 다시 말해, 지성적인 것과 동시에 감각적인 것으로서 칸트는 선험적도식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시간의 형식 안에서 이 도식의 활동을 인정하고, 네 개의 카테고리의 각각에 대해서 도식을 규정했다(시간의 계열, 내용, 순서, 총괄). 따라서 도식이란 정신이 물적 대상에 제의하는 이른바 정신화하기 위한 능동적 원리이다.   문제는 지각론이 아니라 도식의 개념이다. 칸트에 의하면 순수한 감각적 개념의 근저에 있는 것은 대상의 상(Bild)이 아니라 도식이다. 예를 들면, 삼각형의 경우 각도나 변을 비교하면 수없이 많은 것이 있어서 서로 다른 상을 가지고 있다. 이것에 대한 도식은 개념과 상의 중간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 즉, 단순한 개념(3변을 가지는 다각형)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그려 내고 있지만 특정한 각도나 변의 비교에 한정되어 있지 않고 모든 삼각형에 해당된다.   이 의미에서 도식은 감각적 대상과 개념을 매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도식없이는 눈앞의 대상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처음 보는 네발 동물을 아마 동물로서는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이미 동물의 도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개(犬)라는 같은 종류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은 그 수준에서의 도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이것을 도식이라고 하지 않고 이미지라고 부를 때가 많다. 그러나 감각적인 상이 아니라 상당히 개념적인 표상으로서의 도식이다.   칸트가 문제로 하는 것은 이러한 개별적인 도식이 아니라 선험적 도식이다. 그것은 각각의 도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그것과 달리 예술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칸트의 도식보다도 개별적인 수준에 있다. 그래도 칸트의 구상은 예술의 경우에서도 중요하다. 다시 말해, 대상을 지각하여 이해하는 것이 결코 단순한 수동적인 프로세스(process)에서가 아니라 정신의 능동적인 관여가 전제되어 도식이 거기에서 대상에 적용되는 정신의 규정적인 계기라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지각의 능동적 형식으로서의 도식에 대해 잘 알려진 것으로 곰브리치의 설이다. 그가 말하는 도식은 심리학으로부터 차입된 심리구조(mental set)의 형태라고 생각된다. 이미 파장을 맞는 수신기를 가져서 그들 미술가의 작품에 임하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상술(上述)한 바와 같이 기대의 수준을 심리구조라고 칭하고 있다.    ‘심리적 구조란 정확하게 말하면 투사개시의 준비가 갖추어진 상태, 혹은 지각의 주변에 언제나 명멸하고 있는 환상의 색이나 환상 이미지의 촉수를 밀어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즉, 지각의 선별작용을 하는 독자적인 태세다. 개인적인 것도, 또한 시대의 규정에 의한 것도 있다. 그런 점에서 작품의 경향으로서의 양식과 같다.   곰브리치의 사상에는 독창적인 것은 없다. 도식의 사고방식을 미술의 장면에 적용한 것에 새로움은 있어도 지각이론이나 도식개념에 혁신을 초래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강점은 무엇 보다도 도식에 관한 풍부한 실례를 채용해 보도록 한다.       고래 판화, 16세기 말 ~17세기 초       MILLEFLEURS: 도식적인 꽃과 동물, 15세기,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두에 그려진 고래(鯨) 판화 2점에는 진짜 고래에는 없는 귀가 그려져 있다. 그것은 화가가 귀를 착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16세기 중간쯤 독일의 신문에 실린 로마의 조망도 성·탄제로 성에는 급경사 지붕의 목조가옥이 그려져 있다. 그것은 로마가 성새도시(城塞都市)라고 생각한 화가가 자신이 알고 있는 독일의 성새도시를 모델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는 상당히 황당한 것이지만 언뜻 보면 완전히 사실적이라고 보이는 그림조차 왜곡을 보게 된다.   17세기의 화가 마테우스·메리안이 그린 파리의 노틀담 측면도는 언뜻 보면 충실하게 재현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큰 반원형 창문을 가진 좌우 대칭의 높은 건물’이라는 사원관(寺院觀)에 따라 현실의 모습이 개변(改變)된 것이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오른쪽에 치우쳐 있는 대문 좌우 쪽에 잇대어 지은 행랑을 중앙에 두고 있다.   이것들의 예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미술이 개념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회화는 결코 자연적 기호가 아니다. 순수한 사실묘사라고 말하기 쉽지만 실제로 불가능과도 같다. 그것을 위해 타인의 지적을 받아 수정을 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하게 나아가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곤란해도 초등도식(initial schema)를 선택하고, 이것을 과정으로 묘사하는데 순응하는 수 밖에 없다.   그 미술가는 시각적 인상이 아니라 자신의 관념이라든가 개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고래를 그린 화가는 반드시 귀가 있는 동물의 머리를 표상하는 도식을 가지고 있고 로마를 그린 독일 화가도 성새도시의 도식에 있어서 성에는 급경사 지붕이 딸려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또한 노틀담 화가 메리안도 대성당은 좌우 대칭이 아니면 안되었다. 어떤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일반적인 이미지, 즉 도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화가는 그 도식을 출발점으로 만드는 것과 맞추는 것(making and matching)에 의해 작업을 진행시켜 간다. 초등도식(初等圖式)은 관찰하는 것도 불가결하다. 그것이 특히 작품해석에서 채용할 수 있었던 것이 mental set·swap allocation table인 것은 위에서 본대로다.   기대를 갖지 않고 관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며 과학에 있어서 조차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칼·포퍼(Sir Karl Raimund Poppe)가 역설한 것과 같이 모든 관찰은 자연에 대한 질문의 결과이며 시도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칸트가 ‘요소적·원리적인 수준으로 함께 이야기한 것, 지각에는 정신이 능동적인 관여가 전제되어 있는 것, 그리고 이른바 정신에 있는 것 밖에 볼 수 없다,라는 것의 옳음이 보다 유의미한 구체적인 활동에서 확인됐다고 말할 수 있다.     스위스의 지도 제작자인 마테우스 메리안이 1615년에 판화로 만든 파리 지도(메리안 지도).              퐁 뇌프 다리. 다리 뒤쪽 시테섬에 노트르담 대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위키피디아    곰브리치에 있어서는 지각 혹은 해석의 장면에서 ‘mental set’가 창작의 장면에서는 도식이 각각 별개로 논하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도식은 창작의 장면에서 작용하는 규제적인 원리이지만 고래(whale), 성새도시, 카테드랄(cathedral, 대성당)은 모두 표상의 왜곡된 예이며, 창조성이 생각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들의 도식이 기능하는 실태는 과거 경험의 집적(集積)에 의해 형성된 기대 혹은 예측에 의한 지각의 규제라는 성격이 강하다. 그것에 대해 참으로 창조론으로 기능하는 도식을 생각한 것으로서는 베르그송의 ‘역동도식(Le schéma dynamique)’이 있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말하는 역동도식이 무엇인가 말하자면 그 자신이 거론하고 있는 예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을 상기하려고 할 때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목구멍에서 나오려고 하는 그 느낌에 주목하는 것이 좋다. 이 목구멍에서 나오려고 하는 느낌이 그 이름의 역동도식과 같은 것이다. 베르그송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상기나, 설교사가 그 텍스트의 전체를 암기할 때의 메커니즘, 그위에 창조적인 예술가의 발상 등을 ‘지적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기억을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상기하는데 노력없이 기계론적인 암기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말이 나오는 것 같은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상기에 손이 간 것이 있다. 역시 긴 문장을 기억할 경우를 예로 든다면 기억술의 서적이 가르치고 있는 다음과 같은 프로세스다. 문장을 조심스럽게 읽고 그 다음 내적인 조직을 생각하고, 단락 또는 부분으로 나눈다. 거기에서 전체의 도식적인 겨냥을 할 수 있고, 그로부터 이 도식의 내부에 가장 두드러진 표현을 끼워 넣는다.   그리고 상기할 때는 반대로 이 추상적인 골조에 구체적인 말을 복원해 가는 셈이어서 거기에는 이미 어느 정도 창조적인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이 도식적인 도(圖)이며, 그 기억의 요체는 모든 관념, 모든 이미지, 모든 단어를 단순히 한 점에 집약하게 한다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 응축된 많은 이미지에 전개할 수 있는 단순한 표상을 가리켜 베르그송은 역동도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개념에 관해서 두 가지가 문제 된다. 우선 이 명명에서 베르그송은 ‘그리스어를 수용해’거절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어의 의미를 담아’라는 의미일 것이다. schéma도 dynamique도 함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 단어이며 이 단서는 어느 쪽에도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어로 모양을 의미하는 schéma는 특수한 의미로 이용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한정하고 있는 dynamique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역동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러면 그것은 어떠한 의미인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이 문맥에 있어서 베르그송이 ‘기타의 일절이 잔돈(monnaie)에 지나지 않는 기본화폐(piece)라고 하는 비유를 채용하면서 그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어의 dynamis에는 화폐의 가치의 의미가 있다. 이 의미를 거론하면 schéma dynamique란 고가치의 도식이라고 말하게 된다. 또 하나는 철학용어로서 친숙한 세태라는 의미다.   그 가운데에서 단어의 기본적인 어의로서의 계기는 당연히 은폐된 상태로부터 확실히 현현(顯現)해 가는 현실화의 경향에 있고, 이것도 또한 베르그송의 역동도식의 성격으로 타당하다. 다시 말해, 그것은 현실화하려고 하는 도식이다. 이 두 가지 해석은 어석(語釋)에서는 대립하지만 사상적으로는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역동도식의 특징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그것 자체가 현실화된 다이어그램이 아니라 세태적인 규제적 원리라면 왜, schéme가 아니고 schéma일까? 이것이 제2의 문제이다. 사실은 베르그송에서는 유사한 개념이 또 하나 있다. 즉, 운동적 도식(le schéme moteur)이다. 이것도 또한 기억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이며 말을 들어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 운동적 도식에 의한 것이다.   청각적 인상은 단순한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말의 움직임을, 즉 ‘초동적(初動的)인 근육감각(sensations musculaires naissantes)으로서의 듣는 말의 운동적 도식’을 듣는 사람 안에서 산출한다. 다시 말해, 운동적 도식도 현실화를 촉진시키는 원리이며, 역동적 도식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방향이 schéma에서 다른 방향으로 schéme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단지 각각 붙일 수 있었던 형용사의 성질에 의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개념상의 구별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베르그송이 이 두 가지 도식을 어떻게 표상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에 유래하는 것이 틀림없다. 역동적도식 쪽은 전체를 응축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전체가 잠재적으로 그 곳에 있으며 그 의미에서 전체상(다이어그램)을 인정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운동적 도식 쪽은 시간적으로 전개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전체상이 그 곳에 있으면 빛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것을 현실화해 가는 힘이라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예술창조를 생각하면 이 두 가지 도식을 공간적ㆍ시간적이라는 존재 위상의 차이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근본적인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베르그송은 역동도식을 발명이나 예술창조에서 인정하고 있다. ‘소설을 만드는 작가, 극중인물이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극작가, 교향곡을 작곡하는 작곡가, 시인은 처음에는 정신적으로 단순하게 추상적인, 즉 비물체적인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음악가나 시인에 있어서는 소리나 이미지에 전개해야 할 새로운 인상(印象)이다.    또한 소설가나 극작가에 있어서는 사건으로 전개해야 할 명제, 살아 있는 인물에게라도 구체화해야 할 개인적 혹은 사회적인 감정이다. 그들은 전체를 나타내는 도식에 조작을 가하고 판명한 제 요소의 이미지에 도달했을 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역동도식이란 보통 작품의 이미지라고 불리는 맹아(萌芽)이다. 그 맹아는 스스로 전개하려는 힘을 내포하고 있는 역동성이 예술가에 대해 현실화를 촉구한다. 예술가에 있어서 이 맹아는 마치 상기할 수 없는 이름과 같이 막연하게 취할 수 없는 것이면서 명확한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도식의 역동성으로 움직임으로 해서 시행착오(making and matching)를 되풀이해서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 때, 이름을 상기하는 것과 같은 경우와 다른 한 점이 있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상기하는 경우, 역동도식의 내실은 그 이름을 상기한 시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에 대하여 예술창조의 경우, 전개의 프로세스는 엄밀한 의미로 창조이며 단순한 전개나 현실화가 아니다. 다시 말해, 작품의 맹아는 완성된 작품에 고정할 수 없다. 창조의 과정은 당초 역동도식 바로 그것의 변경을 수반해 간다고 생각된다.   한편 베르그송의 개념을 예술철학에 있어서 앙리·구히에(Henri Gouhier, 1989-1994)가 구체적인 플롯(plot, 구성)에 전개해야 할 극적 행동(action)을, 또한 에티엔 수리오(Etienne Souriau)는 극적 상황을 역동도식으로 논한 예가 있다.   베르그송의 역동도식은 그 창조성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칸트(Kant)나 곰브리치와 같은 지각의 장면에도 적용되고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수용의 기능적 도식이 창조의 원리에 전환되어 가는 사실을 설명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배르그송은 지적노력(知的努力)으로서의 지식해작용(知識解作用, intellection)을 논한다. 글을 읽거나 말을 듣거나 해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수학의 증명을 풀어가는 경우와 같으며, 단지 받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떤 계산을 풀어 갈 때, 스스로 그것을 하고 있지 않으면, 풀어 갈 수 있을 것인가? 어떤 문제를 자신이 풀고 있지 않으면 그 문제의 해답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읽을 때나 들을 때도 일부분 밖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나머지는 기억에 의해 보완하게 된다. 외국어 단어를 듣고 알지 못하는 것은 이 보완 작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각은 기억만으로 점점 좋아질 수 없고, 명확한 형을 취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베르그송은 해작용(解作用)도 또한 잠세적(潛勢的)인 도식에서 지각적 이미지로 옮겨가려고 하는 것이라고 결론한다. 이러한 고찰을 근거로 최후에 베르그송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조의 노력이 도식으로부터 구체적 이미지로 전개하는 것을 논하고, 수용과 창조를 포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극을 받을 때에 이미 능동적인 관여가 시작되고 그 발전 안에서 창조가 행하여지는 셈이다.   그 사상은 크로체(Benedetto Croce)의 직관=표현설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보다 구체적인 설명의 가능성을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생(生)의 수동적 측면이 능동적 측면으로 전개해 가는 다이너미즘(dynamism)을 상당 정도까지 해명하고 있다.   
    • 컬럼/연재
    2022-05-11
  • 연재 제1편, 김현풍 총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나막사 김현풍 총재     [글로벌문화신문] ‘막걸리, 민족의 혼을 빚다’ 지금 제일 힘들고 고달픈 때입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기에 ‘나막사(나라사랑 막걸리사랑)’라는 이름 아래 모인 모두가 국민에게 기를 불어 넣고 다시 한 번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함께 만들었으면 합니다.   비극의 역사 일제가, 내선일체를 말하며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했던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민족의 얼과 혼, 기를 꺽기 위한 일제의 만행은 지명의 변화로도 많이 나타났습니다.   일종의 창씨개명과 같은 것이지요. ‘홍성’은 본래 ‘홍주’와 ‘결성’ 이었던 두 곳의 글자를 합쳐 기를 꺽은 경우이고, 인왕산(仁王山)도 王 자를 旺 자로 바꾸어 사용하여 마치 일본의(日+王)을 뜻하는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의왕시의 ‘왕’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속리산의 천황봉도 본래 천왕봉인데 일제가 천황봉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일본 천황을 가르키는 황皇 자를 쓴 것이었지요. 그 외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 일제가 특히 집중했던 곳이 있습니다.   삼각산    많은 분들께서 ‘북한산’이라고 부르는 산입니다. 이 이름은 1915년 일제에 의해 바뀌었던 이름입니다. 본 이름은 ‘삼각산’입니다. 동시에 청와대 뒷산인 ‘백악산’도 ‘북악산’이 되었습니다. 왜 일제는 산의 이름을 굳이 바꾸었을까요? 이 두 산은 민족의 정기가 흐르는 맥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경복궁을 비롯한 모든 터잡기의 기본은 풍수에 의한 것이었는데, 백두산의 정기가 조산(祖山)인 삼각산을 타고 내려와 주산(主山)인 백악산을 지나면 경복궁 위치에 다다릅니다. 이렇게 흐르는 민족의 정기를 끊어 놓고자 이름을 바꾼것이지요.   그러니 삼각산과 백악산의 이름을 제대로 되돌려놓지 않으면 나라가 잘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일제가 바꾸어 놓은 북악산에 사용했던 ‘북’ 자는 북망산천(사람이 죽어 묻히는 곳)의 ‘북’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가 꺽여 계속 사고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저는 2005년 강북구청장 재임시절 문화재청으로부터 삼각산과 백악산을 명승 제10호로 지정 받아 놨습니다. 그리고 산림청으로부터도 자정을 받아놨습니다. 그런데 서울시 지명위원회에서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뭘가요?   지명을 이렇게 고착화 시켜 놓은 것은 식민사관의 친일 사학자들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는 친일 사학자의 후손과 제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습니다. 날로 번성 하고 있고요.       그들이 지명을 바로 잡게 되면, 스스로 친일을 했다는 반증이 되므로 북한산, 북악산의 명칭이 일제 잔재가 아니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주류 사학계가 이런 실정이니 재야 사학자들의 외침은 묻힐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요.   북한 노래 가사 중에 ‘모란봉에서 삼각산까지’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예전에 개성공단에 남한 사람이 가서 ‘북한 산 잘 보인다’고 했더니 북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북한산은 북한에 있는 산이고 그 산은 삼각산입니다.” 망신스러운 일입니다.   오히려 이런 면에서 북한은 철저하게 하고 있는데 우리는 전혀 손도 못 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3.1운동의 항일정신을 잊고, 중요한 일을 해결하지 못한 부끄러운 후손이 바로 우리입니다.   연재 제2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
    2022-05-08
  • 연재 제 6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박희준 이사장   [글로벌문화신문] 굴지의 제약회사에서 톱 세일즈맨이 되다   열심히 1년을 재수하여 대구에 있는 대구고등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후일 알았지만 깡촌의 시골중학교에서의 학업실력과 대구의 일류 중학교 같은 학년과의 학업실력은 엄청난 차이가 났다.   대구에 유학하면서 타 고교의 학생과 사귀게 되었는데 고교 2학년 때 하루는 그 친구가 영어 시험지를 좀 봐 달라고 했다. 그 친구의 학교는 그 당시 등록금만 내면 합격하는 만년 미달의 3류 고등학교였는데 영어시험지가 적어도 필자의 눈에는 중학교 3학년 정도의 문제였으니, 창피한 소리이지만 옛날의 칠곡의 깡촌 중학교에서 ‘잘해 봤자’였던 실력이었던 것이다.     1982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몇 군데 응시한 대기업 입사시험에서도 수차례 고배를 마셨다. 우여곡절 끝에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에 면접을 보게 됐는데 늘 면접에서 고배를 마셨기에 거의 포기한 심정에서 할 말이라도 좀 하자고 마음을 비웠다.    최종 면접에서 회장 내외분과 사장이 임석한 가운데 회장님이 ‘술을 잘 하느냐’ 고 물어 왔다. “막걸리는 배불러서, 소주는 취해서, 양주는 돈이 없어 못 마십니다.” 라고 했더니 껄껄 웃으셨는데 결과는 합격이었다.   필자는 우선 앞으로의 계획으로1. 7년 안에 ‘톱 세일즈맨’이 된 뒤 퇴사2. 짬나는 시간을 이용해 석사학위 취득3. 영어·일어 학습 뒤 해외영업 진출 등 3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러기 위해서 필자는 입사 지원 시 마케팅부서로 내근직을 지원했다. 2년여를 마케팅 부서에서 PM직을 수행하다가 생각을 바꿔 영업부로 자리를 옮겼다. 영업사원으로서 상기의 목표 달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무엇보다 최고의 세일즈맨이 되겠다는 현실적 목표가 필자에게 더 많은 추진력을 보태 주었다.   예를 들어 세일즈를 하면서 영업회의 시 월간목표를 발표할 때 남들은 대개 200이라고 할 때 필자는 보통 800이라 말하여 회의실의 사람들이 수군거렸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다음 달 결산회의 때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져 있었다.   보통 다른 영업사원들이 200의 목표를 세워놓고 180을 하여 90%의 실적달성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800의 목표를 세워 70%인 560의 실적을 올렸으니 소위 달성률은 낮았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3배 이상의 판매 실적을 올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코웃음 치던 영업부에서도 이런 실적이 몇 번 계속되자 모두들 필자의 영업 능력을 인정하게 되었다.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필자는 맨 먼저 시내의 약국을 방문하여 시장조사를 철저히 하여 모든 실제적 수치를 가지고 영업에 임하였다.    실적도 덩달아 올랐다. 5년 만에 회장보다도 표면적 월급은 더 많이 받았다. 세금도 더 많이 내는 톱 세일즈맨으로 사보에 2년 연속으로 게재되기도 했다.   한 가지 기억나는 일이 있다. PM시절, 우리 회사에서 필자가 만든 소화제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자연 필자의 업무도 많아졌다. 더 많은 실적을 위해 지방출장이 잦았는데 그 당시 새마을 열차를 타고 가곤 했다.    서울을 좀 벗어난 소도시의 철로변 전봇대에 소화제 광고가 몇 십km를 가더라도 연달아 붙어있어 아주 흐뭇했던 기억이 있다. 소화효능이 좋아 이미 국민소화제가 되어 있었던 바로 그 대웅제약의 베아제이다.   연재 제7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합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
    2022-05-07
  • 김현풍 나막사 총재(의학박사)의 "나라사랑 막걸리사랑 책" 연재
    [글로벌문화신문] 나라사랑 막걸리사랑(나막사) 책은 2017년 9월 23일에 발간 되었다. 신간서적은 아니지만 우연한 기회에 책을 읽어 보고 내용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이 좋은 반면에 많은 독자들이 나막사 책을 모르고 있는것 같아  이 책을 다시 한 번 홍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저자와의 협의하에 신문에 연재를 하기로 하고 추후 내용을 첨삭하여 개정판을 출간 하기로 했다. 저자인 김현풍 나막사 총재는 현재 80의 고령의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미아동 미아사거리에서 치과의원을 운영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현풍  나막사 총재 김현풍 총재의 경력은 화려하다. 본업인 치과의원을 운영하면서 국가관도 투철하여 도봉문화원장, 강북문화원장과 민선 3, 4기 강북구청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많은 지역민들을 만나며 막걸리 한 잔을 벗삼아 서민들의 어렵고 힘든 고통과 애환을 현장에서 경청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 민족 고유의 술이자 서민적인 "막걸리"에 대해서 남다른 애정을 가질 수 박에 없었다.   이 나막사책은 "우리민족 고유의 술인 '막걸리'가 무엇인지, 그 안에 함축된 민족의 정신과 애환, 막걸리가 우리 몸과 건강에 어떻게 좋은지를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막걸리의 비밀 등을 알려주고 있어 막걸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나막사는 우리의 얼과 정신이 담긴, '민족의 술' 막걸리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국가의 전통주인 '국주(國酒)'로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다. 지구촌의 대표적인 주류문화를 보면 독일의 맥주, 프랑스의 와인, 일본의 사케 등이 있듯이 우리 민족 고유의 막걸리를 '문화'와 함께 성장하는 세계적인 국주(國酒)로 만들기 위해 그 정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다. 나막사에서는 확고한 목표를 설정하고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우리 막걸리에 문화를 입혀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나라 사랑의 디딤돌로  삼을 것이며, 문화가 담겨있지 않은 제품 위주의 세계화를 지양하고 막걸리를 한국의 문화유산으로 인식할수 있도록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또한 세계인들이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막걸리에 대한 문화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앞장서고, 막걸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사화적 관심을 촉구 할 수 있도록 캠페인을 전개하게 될 것이다. 특히 올바른 음주문화를 정립하여 한국의 전통적 풍류를 즐기고, 막걸리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막걸리와 더불어 한국의 맛을 찾아서 전통의 맛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 하고 있다. 나막사모임은 2019년 1월 24일에 인사동 자희향이란 막걸리 전문점에서 첫 모임을 시작으로 3개월 주기로 치협동호회 모임으로 출발했다.    2020년 코로나19사태로 인해 소규모 정기모임만 가졌으나 앞으로 각 분과별 각계 각층의 인물들과 함께하는 단체로 성장 할 것을 기대하며, 이 나라사랑 막걸리사랑(나막사)에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면서 "글로벌 문화신문"에 연재를 시작한다.     연재 제 1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
    2022-04-27
  • 한국미학연구소장 박명인 컬럼, '예술과 자연환경'
        박명인 컬럼 (한국미학연구소장, 아티파이 고문) 하이데거(Heidegger)는 ‘근대의 학문은 특정한 대상 영역에 기초를 두고 개별적 학문으로 분화된다’고 말하고 있다.   〈M·Heidegger, a,a, O.〉 이것은 일체 근본으로서의 인간(근대적 주관이 물리학에서는 질점(質點)의 운동, 화학에서는 원자간의 상호작용 등)에 따라 개별적 학문영역을 투기(投企)하고, 그 학문영역에 있어서 각각의 개별적 학문이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 경우에 물질이 세분화되는 만큼 학문의 인식은 전문화하고 정밀하게 된다. 따라서 정밀한 인식을 추구하는 근대의 학문연구는 점차 자율적인 개별학문으로 분화하게 된다.   예술도 또한 근대에서는 칸트가 예술영역을 인간의 마음의 활동(판단력 및 쾌·불쾌의 감정)에 대응시켜 규정한 특정 대상 영역(미적 영역)을 기초로 하는 정신적 당위(當爲)로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 대상 영역에서 예술의 자율성이 보증되어 그 영역이 시각적·청각적·촉각적 등의 영역으로 개별화되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투시도법은 외적 자연에 대한 인간의 시각적 관계를 화면에 묘사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합리적으로 일치된 화면구성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외적 자연 대상의 시각적 표현활동으로서의 회화적 자율성 원리가 되고 있다. 그런데 근대예술의 역사발전 과정에 있어서 이 투시도법이 회화에 자율성을 보증함으로써 도리어 존립성을 잃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자율성을 획득한 근대회화가 회화로서의 자율성을 추구할 때 현실적 자연공간 묘사의 수학적·합리적인 구성원리로서 투시도법보다 회화의 한층 본질적인 요소로서의 화면구성이 회화표현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동시에 투시도법은 필연적으로 후퇴하게 되어 자율적인 추상회화가 외적 자연묘사를 회피하게 되어 완전히 그 의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시도법을 본질적인 구성원리로 하는 풍경화는 그것 자체 풍경화의 종언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 이 사태를 명료하게 나타내는 사례에 대해서 회화의 본질을 추구한 현대회화의 선구자 세잔(Paul Cezanne)과 모네(Claude Monet)의 후기 작품에 대해서 각각 하나씩 증언을 이끌어 내 보기로 한다.                                              수련연못(Water Lily Pond), 100.4*201, 1919, 끌로드 모네(Claude Monet)   (1) 세잔의 풍경화는 일반적으로 현실풍경으로서는 공간이 좁고 작으며, 앞쪽 경치를 축소하여 안쪽으로 향하는 선의 수도(收斂度)의 소멸 등에 의해 과학적 투시도법의 공간구성 상태가 약하다.   약해지게 만들고 있는 한층 보편적·기초적인 요인은 색반(色斑), 터치에 있어서 대조의 정도가 평온해진 화상의 소구조(小構造) 형성 방법에 있어서 소구조에 의한 투시도법의 상태가 약해지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폐기되어 추상회화로 한 걸음 다가선다. 르네상스 이후의 유럽회화에 있어서 화면구성에 관해 이 소구조만큼 강렬하게 과학적 투시도법을 놀라게 한 것은 없다.   (2) 오랜 유럽의 클로드·로랭(Claude Lorranin)의 장대한 풍경화와 모네나 몬드리안(Piet Mondrian)의 후기 작품 사이에는 알려지지 않은 심연이 입을 열게 한다.   예를 들면 모네의 1884년의 풍경화 《레몬 나무와 들판》은 색반의 연속체를 위해서 이 색반은 사물과 거의 같은 작품의 주제가 되고 있다.   그래도 아직 눈과 화상(畵像)과의 거리가 지평선의 좌표에 의해 보증되고 있어서 여전히 풍경화라고 부를 수 있다. 수련(1918-25년)》에서는 이미 공간이 견고한 골조를 보증하고 있어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관조자의 좌표를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해서 자연은 원시적인 자연력이 상호 작용하는 모든 부분(물·빛·식물·천공)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영역이 된다.  관조자는 자연을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조형적 배치의 일부가 된다. 이것에 의해 이전 풍경화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바꾸어 지고 있다.   여기서 풍경화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의 고찰에 의하면 자연공간의 투시도법적 형성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관조자는 ‘자연과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 안에 있다’고 할 때 투시도법적인 풍경의 형상은 이미 소멸되고 있다.   그러나 관조자가 자연 안에 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떤 자연일까? 그것을 ‘능력 생산적 자연’이라고 부르고 현대에 있어서의 자연의 화상(畵像)을 ‘능력 생산적 자연의 등가물’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주관에 의한 과학기술적ㆍ산업사회적 당위가 우리들의 생존환경에 초래한 자연환경의 오염과 파괴에 직면할 때 예술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하여 그러한 소박한 견해에 만족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물론 인간은 능력 생산적 자연의 일부이지만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그 자연을 내부에서 침해하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의 예술과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할 경우에 이 사태를 무시할 수는 없다.   단지 자연경관의 보전과 도시환경의 디자인에 예술과 자연과의 적정한 관계만으로는 근대적 주관의 합리적인 논리적 대상의 인식이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단지 능력 생산적 자연의 등가물로서 자연의 생명이나 에너지를 직관하게 할뿐만 아니라 현대에 있어서의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바로 그것을 감성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어떤 예술작품일까?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흘러내리는 아스팔트(Asphalt_Rundown), 1969                      리차드 롱(Richard Long), 걷는것에 의해 만들어진 한개의 선(A Line Made by Working), 1967    인간과 자연과의 부정적인 관계와 긍정적인 관계를 각각 표현하고 있는 작품으로서 대지미술로 저명한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 1938-1973)의 《흘러내리는아스콘》와 리차드 롱(Richard Long, 1945-)의 《걷는 것에 의해 만들어진 한 개의 선》을 예로 들 수 있다. 전자는 도회의 한구석에 방치된 자갈이나 진흙의 퇴적물 위로부터 덤프트럭에 적재된 아스콘(asphalt concrete)을 흘려 떨어뜨리는 작품이다.   그 검은 점착성 물질은 부란(腐爛)한 비탈진 사면에 쏟아 부어 천천히 흘러내리며 침식되어가는 작품이다. 마치 엔트로피(entropy) 증대의 양상을 보이듯이 점차로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정지하게 된다.   산업용재로서의 아스팔트는 석유정제의 잔재로 입수되지만 천연의 지층에서도 찾아내 진다. 스미슨 자신은 작품을 통해서 산업자원의 낭비나 생태계의 보호 등에 대하여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현대 아스팔트의 하이웨이가 엔트로피의 증대를 향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함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R. Hobbs, Roert Smithson ; sculpture,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81)   후자는 ‘들판을 사람들이 오가는 동안에 평평한 풀밭이 햇볕을 받아 하나의 선으로 보이는 작품이다’. 그것은 대지와 풀과 햇볕과 인간으로부터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그 이외의 재료는 필요 없고 대지를 침해할 일도 없다. 그러나 다른 시간, 다른 기상 조건, 다른 정신상태에서 걸으면 그때마다 대지 위에 다른 풍경을 연출하게 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고정된 객체로서 세계의 부가물이 아니다. 걷고 있는 동안 만들어지고 있는 그 작품도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을 가지고 있지만 영원불변한 형은 아니다. ‘보행자의 발자국은 대지의 표면을 가로질러 가지만, 대지가 그 보행을 받아들이며 형체를 옮겨 가고 있는 것이다. 대지는 예술작품의 길동무가 되고 예술작품이 세계를 향수할 때에는 대지도 또한 예술작품과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R. Hobbs, Robert Smythson; New York; Cornell Unoversity Press, 1954.) 자연 환경. 그것은 단순한 능력 생산적이며 단순한 소산적 자연도 아니고 대상화된 풍경으로서의 자연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다른 생물과 함께 그 안에서 출생하여 거기에 의존하며 그 안에 살고, 그 안에서 죽어 가는 곳, 인간이 그것을 풍요하게 하거나 황폐하게 하면서 어떠한 형태로 그것을 변화시키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 남겨 가는 곳이다.    이 환경이 인간에 의해 오염되어 파괴된 상태로, 혹은 인간과의 친화적 상태로서 스스로 그 일부가 되어서 눈으로 보이도록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스미슨이나 롱에 의해 실천하고 있는 환경예술이다. 이러한 환경예술을 종언하고 있는 근대풍경화를 현대예술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를 개시하는 현대예술을생기하면서 예술의 본질을 사고해야 할 미학도 환경미학으로서 기술과 같이 단순한 경관 보전이나 도시환경 디자인의 미학이 아닌 근대과학기술의 지배 하에 있는 현대환경에 있어서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근원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컬럼/연재
    2022-04-12
  • 연재 제5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글로벌문화신문] 이 당시에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 중에서 일부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친구는 실업고교에 장학생으로 가고 집안이 부유한 친구들은 일류 인문계 고교에 가는 것으로 대개 진로를 결정하고 있었다.    이때 필자는 상업계 고등학교로 진로를 정하고부터 걱정은커녕 그런 곳은 눈 감고도 들어갈 수 있다는 자만심에 소위 껄렁한 친구들과 휩쓸려 다니면서 여자애들을 만나고 노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그렇게 신나게 보냈던 시간들이 시험을 치루기 이틀 전까지 계속되었으니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시험을 치르면서도 지금까지 놀던 말초적인 행위의 짜릿함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 뿐 제대로 문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마음을 추슬러 봐도 정신이 이미 마음을 떠난 듯 혼란스러웠다. 시험 결과는 당연히 반들반들한 미끄럼틀에서 신나게 미끌어지듯 시원하게 불합격이었다. 결과를 받아 들고는 마약에 취한 사람처럼 단지 몽롱할 뿐이었다. 주위의 다른 친구들의 사정을 알아보니 실업고에 장학생으로 간 친구들은 100% 합격이었다. 그러나 일류 인문계 고등학교에 응시한 친구들은 모두 불합격이었다. 그때 필자 마음속엔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란 말이 있듯이 묘하게도 친구들의 불합격이 오히려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말이 위안이지 본인이 고교진학에 일차 시험에 실패했으니 창피해서 누구에게도 얼굴을 내밀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연이어 2차 시험을 위한 원서접수를 했으나 조금도 반성 없이 지금까지의 방종하게 놀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아무 준비도 못했으니 2차 시험 결과도 처참한 불합격이었다.       다시 소문을 들어보니 행인지 불행인지는 몰라도 공부 잘한다는 친구들 모두가 필자처럼 2차에서 불합격하였다. 사실 깡촌과 대도시 학생들의 학력 차이였건만 이번에도 역시 친구들의 불합격이 필자에게는 구세주가 된 것처럼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친구들도 필자처럼 생각했는지 모르겠으나 왠지 창피한 마음이 들어 쑥스러웠다. 이후 경제적으로 부유한 부모님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친구들은 재도전을 위해 우수학원에 적(籍)을 두고 재수의 길을 준비했다. 그러나 필자는 1, 2차 모두 낙방을 했으니 패잔병처럼 풀이 죽어 귀향길에 올랐다.   집에 돌아와 한참 동안은 문밖으로 고개 한 번 내밀지 못하고 방구석을 굴러다녔다. 하루는 우연히 우체부 아저씨가 동장님 댁으로 배달하는 신문을 중간에서 필자가 펼쳐 보게 되었는데 이게 웬일이야, 고등학교 추가응시 모집공고가 눈에 확 들어오지 않는가. 필자는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기분이었다.   바로 어머님께 책을 구매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돈을 얻어서 응시를 하게 되었는데 필자와 입장이 같은 응시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비상한 각오로 최선을 다했으나 실력은 실력, 3차까지 낙방을 하게 되었다.   별 수 없이 고교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독서에 빠져들게 되었다. 제법 많은 양의 책을 읽었고 이때 읽은 책 속 위인들의 생애를 보고 다시 용기를 얻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공하는 사람은 항상 준비하는 사람이다.” “남들과는 다른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하고, 혁신해야 한다.” 등의 명귀를 새기며 이때부터 긍정적인 생각과 끈질긴 자신감으로 어려움을 돌파하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이리라. 그리하여 모든 계획을 세울 때나 앞이 캄캄하여 보이지 않을 때 가슴에 새기는 격언이 있으니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보고 가장 넓게 본다.” 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얻는다”이다.   연재 제6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
    2022-04-04
  • 연재 제4편 박희준 이사장의 "출산장려 성공시크릿"
        [글로벌문화신문] 큰 바위 얼굴을 보며 큰 꿈을 꾸다   부모님은 학하리로 이사하시면서 할아버지로부터 달랑 5마지기의 땅뙈기를 받아왔으니 소출이 갑자기 줄어들게 되어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재산은 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가을 수확 철이 지나고 나면 과거와 달리 일거리가 거의 없었던 관계로 같은 마을에 사시는 분들과 동네 사랑방에 모여앉아 노름을 하게 되었고 그 빈도가 잦아질수록 그나마 애써 농사지어서 모은 재산이 하나 둘씩 빠져 나가게 되었다. 결국 일 년 농사를 온통 말아먹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그런 세월이 흐르면서 모아둔 돈도 바닥이 나고 생활은 겨우 끼니만 거르지 않는 정도였으니 자식들 교육은 당연히 등한시될 수밖에 없었다. 자식은 부모 곁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효도나 잘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특이한 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은 대부분 제대로 교육을 못 받아 초등학교만 나오는 것이 전부이고 다만 장남인 큰형님만 겨우 중학교를 나올 뿐이었다. 큰아버지의 자식들은 대부분 대학을 나와 윤택한 사회생활을 하는 것과는 천양지차였다. 이러한 가운데 필자도 초등학교를 입학하게 되면서 어린 마음에도 가난의 서러움이 서서히 느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도 저 멀리 낙동강 너머로 보이는 금오산의 능선을 바라보면 사람 얼굴의 라인이 확연히 드러나는데 이마와 코, 턱의 윤곽이 뚜렷했다. 그것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항상 필자를 지켜보면서 인자한 웃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편안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릴 때 읽은 미국작가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소설 속 큰 바위 얼굴에 대한 희망과 동경심으로 금오산의 얼굴라인이 마치 큰 바위 얼굴처럼 어린 가슴 속에 각인되었다. 그 후 큰 바위 얼굴의 정기를 받아 큰 인물들이 나온다는 전설대로 주위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이 나타나고 있음에 그나마 위안을 받으면서 열심히 공부를 했고 초등학교 시절을 올곧게 보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집 논은 장마가 지면 홍수로 인해 낙동강 물이 범람해서 일 년 농사가 결딴이 나곤 했다. 그럴 때면 제대로 쌀밥 한번 못 먹어보는 건 다반사고 춘궁기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겪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늘 호박범벅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아 어머니에게 ‘우리도 밥 좀 먹을 수 없느냐’ 고 많이 보챘던 기억도 있다.    우리 가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필자가 윤달이 든 3월에 태어나 생일이 여러 해 만에 한 번씩 돌아왔기에 더더욱 생일상의 쌀밥 근처에는 가보질 못했다.   중학교에 진학해야 할 때가 다가왔으나 집안형편에 갈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외삼촌께서 손위 처남인 아버지에게 마지막 아들인 데다가 공부도 잘한다고 하니 중학교를 보내주라고 하셔서 아버지는 시골에서 보내겠다고 약속을 하신다.   중학교를 다니면서 혼자서 집 뒤편에 있는 천생산을 자주 오르곤 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과 싸워서 연전연승을 했던 곽제우 홍의장군이 진을 쳤던 산성이 있는 곳이다.   계곡이 제법 깊고 물도 많아 혼자서 조용한 사건을 보내면서 홍의장군의 애국심을 가슴에 새기기도 했다. 이때 역사 속에서 배운 애국이라는 개념이 지금의 출산장려운동을 하는 데 큰 동기부여가 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아울러 정체성이 확립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었으나 또 고등학교를 갈 수가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필자가 중학교를 입학할 때는 일류 인문계 고등학교를 거쳐서 서울의 소위 일류 대학교로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실제 필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 중의 하나는 실업계 고등학교 진학이고 또 하나는 삼류 인문고 장학생으로 가는 것이었다. 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전선으로 바로 가는 것도 탐탁치 않았지만 삼류 인문계 고등학교 장학생으로 가는 것도 자칫 인생의 출발점이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결정하기 쉽지 않았다.   오래 고민하다가 차라리 실업계를 가서 빨리 취직을 하고 돈을 벌어서 대학을 가는 것으로 진로를 정하였다.   연재 제5편으로 이어집니다.  * 이 글은 저자와의 협의하에 연재하는 것으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무단 전재 및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컬럼/연재
    2022-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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